▲아버지의 안전을 뜨겁게 희망한 광부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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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은 광부의 딸로 태어난 한 어린이가 거쳐간 동네 주변을 샅샅이 보여준다. 교실 한 칸에 60, 70명씩 공부하던 풍경, 탄광에 보내는 값싸고 질 나쁜 쌀 '광산미'에 얽힌 추억, 아버지 없는 사람을 손들게 해 가정환경조사를 숙제처럼 하던 선생을 조명한 시들을 읽는 것도 백미다.
한때 어린이였던 시인은 이 한 권의 시절 속에서 "월말 시험 기말시험보다 더 싫은 질문들" 앞에서 슬프게 우는 친구를 발견하고, "화가 나 강물 위로 돌멩이를 마구" 날리기도 한다. 가난하고, 유머 있고, 당당하다. 그리하여 이 시집은 서러운 시절만 그리지 않는다. "배꼽 빠지게 웃던 온 마을"과 슬픔 뒤에 켜지는 기쁜 이웃들의 찬란함을, 와트(W)가 센 조명처럼 비춘다.
시인은 갱도의 막다른 곳을 뜻하는 막장에서 "가쁨 숨을 내시며 일하"는 아버지의 안전을 뜨겁게 희망한다. 의사와 간호사, 대통령을 장래 희망이라고 써내는 친구들 틈에서 "연탄"이 되고 싶다는 포부도 밝힌다. "죽어서도 빙판길 덮는/연탄처럼/타오르고" 싶은 이 어린이의 바람은 근거가 있다. 수업 도중 한 아이가 일찍 하교하는 이유를 친구들과 가만히 예감하고, 어제까지만 해도 살아있던 옆집 아저씨의 부고가 드나든 생활을 매섭게 통과해야 했으므로.
그럼에도 광부의 딸은 침잠하지 않는다. 동짓날에 이웃들과 팥죽을 나누던 어머니를 보며 "세상이 얼어붙어도 따뜻했고/가난해도 나눌 수 있다는 걸 엄마의 큰 손에서 배웠다"고 고백한다. 당시 광부의 아내들 대다수가 석탄 가운데서 나쁜 것을 가려내 품질 좋은 석탄을 분리하는 '선탄부' 작업을 하며 자식들을 함께 길러냈다. 그렇게 공부하고 심부름하며, 일하는 어른들 곁에서 끝내 삶을 공부한 어린 사람의 경험이 모여 단단한 인생이 되어간다.
가난했으나 불행한 적 없던 직업의 흥망성쇠
종종 어른 세대의 직업을 논할 때, '저물어간다'라는 말을 써도 되는지 의문스럽다. 나 역시 휴직기에 접어드는 생애 주기를 만날 텐데, 내 노동이 소멸돼간다는 누군가의 평가에 속수무책으로 납작해질 수 있으니까. 더구나 생계 유지가 가능한 청년 혹은 중년을 사회적 기준으로 삼는 사고방식이 '절대 표준'이 될 순 없으니까. 그래서 이 시집의 소녀는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우리 기억 속에서 잊혀가는 한 직업의 역사를, 한 사람의 피와 땀이 스민 흥망성쇠를 쏘아올린다. 분명하고, 환하다.
...방바닥 아래에선 쾅쾅 소리가 들렸다//무서워 이불을 똘똘 말다 깬 아침/갱도에서 다이너마이트 터트리는 소리라 했다//내가 잠들어 있을 때/아버지가 굴착기 들고/검은 석탄을 깨는 소리였다/더는 그 소리가 두렵지 않았다//언젠가 나도 어른이 되면/세상 어둠 깨는 다이너마이트 하나 들겠다/다짐했다
<다이너마이트를 든 소녀>(정지민) 중에서
다짐한 시인은 자신이 나고 자란 삼척시 도계읍을 그리움의 자리에 앉히지 않는다. "어떻게 살고 있니?" 독자에게 질문을 건네며 고통에 처한 나의 한때를, 나의 노동을 가능하게 해준 고마운 사람들의 노동을 현재의 자리로 불러온다. 거기엔 아버지의 검은 작업복, 엄마의 하얀 머릿수건, 학교에 가는 대신 공장으로 향하던 친구들과 철로, 갱도 바깥으로 나리는 흰 눈이 담담하게 떠오른다.
그 기억들 덕분에 자신이 서 있는 지금을 긍정하는 시인이 십 대를 위로하는 글이 책 끄트머리에 실려 있으니, 놓치기 않길 바란다. "아홉 살부터 열여덟 살의 내게 쓰는 편지"라는 제목의 이 글엔 "도계에서의 삶은 가난했지만 단 한 번도 불행했다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밝히는 뾰족함이 반갑게 명치를 스친다. 그렇게 광부였던 아버지 어깨너머 석탄만큼 단단한 글을 쓰는 시인이 탄생한다.
불행과 행복을 건너 더 많이 탄생했으면 좋겠다. 탄광촌이어도 달동네여도 내가 사는 동네가 어딘지 큰 목소리로 말하는 아홉 살이. 양육자가 하는 일을 초코빵처럼 달게 말하는 열여덟 살이. 우리 존재의 다이너마이트가 올해도 곳곳에서 반짝이기를. 불편하고 속시원하게 서로에게 의탁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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