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서트장 같은 무대음악회가 열리는 도서관
이인자
2층 종합자료실 벽면 쪽 테이블로 자리를 옮기려다 무언가를 발견했다. 벽에 남은 낙서였다. OO중 3학년, 반 이름 초성 퀴즈. 'ㄱㅎㅈ, ㄱㅁㅈ, ㅂㅈㅇ, ㅁㄱㅊ... ' 숭고한 원형 경기장처럼 느껴지던 도서관이 그 순간만큼은 동네 분식점처럼 친근해졌다. ㄱㅎㅈ은 김해준일까, 김효진일까. 아니지, 김 씨가 아닐 수도 있지. 감씨일까, 기씨일까. 나도 모르게 초성 놀이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나 역시 공공도서관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떠올라 순간 멈칫했다.
낙서를 막아야 하는 사람과 남기고 싶은 사람 사이의 눈치 싸움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주는 긴장은 결코 가볍지 않다. 내가 근무하는 도서관 역시 인근 중학교의 시험 기간만 되면 조용한 전투 상태에 들어간다. 떠들려는 쪽과 말려야 하는 쪽이 서로의 기척을 살피며 하루를 버틴다. 그러니 이 낙서도 치열한 눈치 싸움 끝에 남겨진 것일지 모른다.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사실은 한 시간 전부터 함께 온 남편이 배가 고프다며 계속 눈치를 주고 있었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라는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만큼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아까웠다.
짐을 챙겨 나가려는데, 선물처럼 숨겨진 공간 하나를 발견했다. 문을 여는 순간, 디지털 미디어 아트가 아름다운 빛으로 쏟아졌다. 설악은 자부심, 자작은 속삭임, 명화는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천천히 흘러갔다.
인제 자작나무숲을 아직 가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는데, 이렇게 빛으로 먼저 만날 수 있었으니 뜻밖의 행운이었다. 이곳은 공공도서관 최초의 몰입형 미디어아트실이라고 했다. 책과 공간을 넘어, 미래적인 감각까지 품고 있는 도서관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미디어아트실환상의 빛의 향연
이인자
기적의 도서관에서 기적을 만나다.
전국에 '기적의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서관은 현재 18곳이다. 인제 기적의 도서관은 그중 17번째다. 2023년 개관 이후 이미 십수만 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우리는 무엇을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기적이라 부르지만, 평범한 하루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그 말은 종종 멀게 느껴진다. 내 안의 불안한 정서 탓인지, 기적이라는 말 앞에는 언제나 큰 불행이 먼저 놓여 있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삶에게, 기적은 지나치게 극적인 단어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런데 인제 기적의 도서관을 다녀온 뒤,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조용한 자연의 도시에 새로운 도서관 하나가 세워졌고, 그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게 되었다. 인제 여행에서 도서관에 가는 일은 더 이상 비상식적인 선택이 아니라, 상식적인 동선이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 사는 누군가의 인생이 도서관을 통해 새로운 동선을 꿈꾸게 되었다면, 그것 역시 기적이 아닐까 생각했다.
'사람과의 만남은 역사를 만들고, 책과의 만남은 기적을 만든다.'
인제 기적의 도서관 한쪽 벽에서 만난 문장이었다. 책이 가진 기적, 그리고 그 책을 품고 있는 공간이 만들어내는 기적이 함께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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