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국회 처리 하루 전인 13일 오후 여의도 국민의힘앞에서 ‘내란수괴 윤석열 즉각 탄핵 시민촛불’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여사와 검사를 태운 윤석열차’와 ‘내란의힘’을 적은 대형현수막을 찢고 있다.
권우성
거리의 집회와 광장의 외침은 단호했으나, 체제를 전복하려는 충동이 아니라 헌정 질서를 회복하려는 집단적 의지를 드러냈다. 분노는 있었으나 방종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비판은 날카로웠으나 파괴로 흐르지 않았다. 이는 민주주의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시민들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소중한 경험적 실체다.
제도에 대한 태도 역시 성숙했다. 국회와 사법부, 행정부에 대한 불신과 비판은 분명 존재했지만, 그 비판은 제도를 무너뜨리는 방향이 아니라 제도를 통해 바로잡아야 한다는 요구로 수렴되었다. 절차의 정당성을 지켜야 한다는 인식과 다수가 동의하지 않는 힘의 사용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공감대가 사회 전반에 공유되었다. 제도를 맹신하지도, 전면 부정하지도 않는 이러한 태도는 한국 사회가 오랜 시간 축적해 온 민주주의의 실질적 자산이다.
지난 6월, 새 정부 출범 이후의 대외 환경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미·중 패권 경쟁은 세계 공급망을 흔들었고, 미국의 통상 압력은 한국 제조업의 심장을 겨눴다. 동맹의 가치가 경제 협상의 지렛대가 되고, 관세는 안보와 산업 사이의 경계를 흐르는 새로운 무기가 되었다. 전대미문의 광란 같은 외교·통상 전쟁터 속에서 정부는 중심을 잡고 버티기 전략과 기민한 대응을 통해 위험을 최소화하며 국익을 극대화하는 결과를 도출했다.
이 모든 과정은 정부나 특정 집단만의 성취가 아니었다. 불안한 일상 속에서도 질서를 지키고, 공동체의 안정을 우선하며, 감정의 격랑 속에서도 이성을 붙들어 준 국민들의 성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소수 언론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언론은 혼란을 증폭시키기보다 사실과 맥락을 전달하는 데 애썼고, 학계와 전문가 집단은 정치적 유불리를 넘어 제도의 취약점과 구조적 문제를 정확히 짚어냈다.
지난 1년,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며 이 나라를 지켜낸 모든 시민과 공직자, 기업인, 그리고 현장의 노동자들에게 마음속 깊이 우러나는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회고와 감사만으로 새해를 맞이할 수는 없다. 한국은 여전히 해결을 미룰 수 없는 구조적 과제들 앞에 서 있다.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는 더 이상 통계가 아닌 일상의 문제로 다가왔고, 급속한 기술 변화는 노동과 산업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있다.
대외 관계의 불안정성은 일시적 변수가 아니라 상수가 되었으며, 기후위기는 미래의 경고가 아닌 현재의 위험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어느 하나도 단기 처방이나 일회성 정책으로 해결할 수 없는 장기적이고 복합적인 도전들이다.
위기 속 학습과 회복력
자칫하면 이러한 과제들은 사회 전반에 무력감과 비관을 확산시킬 수 있다. 그러나 지난 1년의 경험은 우리가 이러한 위기 앞에서도 결코 무력한 공동체가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위기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시민의 역량, 제도를 전면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개선을 요구하는 현실적 태도, 행정과 전문성의 축적, 빠른 학습과 적응 능력, 그리고 갈등 속에서도 사회를 유지하는 회복탄력성은 한국이 가진 핵심 자산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위기를 단순히 견디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학습과 전환의 계기로 삼으려는 태도가 사회 전반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외부 충격을 겪은 뒤 "어떻게 복구할 것인가"를 넘어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를 묻는 질문이 우세하고, 제도의 허점과 구조적 한계를 성찰하려는 논의가 이어졌다.
이는 한국 사회가 실패와 충격을 집단적 학습으로 전환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가 직면한 인구·산업·외교·기후의 위기도 극복 불가능한 숙명이 아니라, 방향과 전략에 따라 충분히 해결 가능한 과제임을 확인할 수 있다.
다가오는 새해는 계엄청산을 단호하고 신속하게 마무리 짓고, 우리 앞에 놓인 산적한 과제 해결에 매진해야 한다. 새해 벽두는 전진을 위한 분명한 전략을 세우는 시간이다. 그 전략의 중심에는 포용과 혁신이라는 원리가 자리해야 한다.
구성원을 보듬는 포용은 단지 취약계층을 보호하기 위한 윤리적 선택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안정성과 지속 가능성을 떠받치는 생산적 기반이다. 나날이 발전을 추구하는 혁신 역시 일부 기업이나 특정 세대의 성취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기술 변화의 혜택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전환의 비용이 특정 집단에 과도하게 전가되지 않을 때, 혁신은 분열이 아니라 통합의 동력이 된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는 공론의 장을 실질적으로 복원하고 활성화하는 일이다. 포용과 혁신은 선언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서로 다른 이해와 가치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의견을 말하고 듣고 조정하는 공론의 장이 작동할 때 비로소 현실이 된다.
계엄 극복 과정에서 확인되었듯이,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공적 이성과 책임 있는 토론의 가능성이 살아 있다.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 정치·언론·시민사회가 함께 참여하는 숙의의 공간을 넓혀 가는 전략은 모범적인 표준국가로 나아가는 핵심 경로다.
모범적 표준국가로 향하는 새해
▲윤석열 탄핵 투표 가결, 환호하는 시민들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로 14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열린 '내란수괴 윤석열 즉각 탄핵 범국민 촛불 대행진'에서 시민들이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소추안 표결에서 탄핵 투표가 가결되자 환호하고 있다.
이정민
이 두 원리에 충실할 때, 한국이 지향해야 할 미래상은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것은 단순히 앞서가는 국가가 아니라 세계를 선도하는 모범적인 표준국가다. 표준국가는 규모나 성장률로 우월함을 과시하는 나라가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제도를 설계하고 운영하는 방식, 갈등을 조정하고 합의를 만들어내는 방식에서 국제사회의 모범이 되는 국가다.
산업 영역에서는 기술과 안전, 효율과 노동이 조화를 이루는 생산 모델을 제시하고, 사회 영역에서는 의료·돌봄·교육이 삶의 위험을 흡수하는 운영 기준을 확립하며, 행정과 거버넌스에서는 투명성과 신뢰를 기반으로 정책을 집행하는 기준을 만들어가는 나라가 바로 모범적인 표준국가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국민들은 풍요롭고 여유로운 삶을 당연하게 누리며, 이웃에 감사하는 일상을 살아간다.
새해는 이러한 모범적인 표준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기반을 본격적으로 다지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성과를 성급히 자랑하기보다 방향을 분명히 하고, 단기적 성취보다 장기적 궤도를 설계해야 한다. 지난 1년 동안 위기를 견디며 공동체를 지켜낸 경험은 우리가 그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그 축적된 성숙과 책임, 그리고 공론의 장을 되살리려는 노력이 새로운 국가 발전의 동력으로 이어질 때, 한국은 단순히 위기를 극복한 나라를 넘어 세계가 닮고 싶어 하는 모범적 표준국가로 거듭날 수 있다.
다가오는 2026년은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 가는 첫 발걸음이 되기를 기대하며, 밝게 떠오르는 동녘의 새해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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