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29일 서울 중구 대한적십자사 본사에서 열린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회의'에서 대한적십자회(임시정부 시절 대한적십자사)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 원본이 전시되고 있는 모습. 이 태극기는 임시정부 산하 대한적십자회 이사장(현재의 사무총장) 송암 서병호의 후손이 지난 2005년 대한적십자사 창립 100주년을 맞아 기증한 것이다.
연합뉴스
뒤이어 그는 인도주의 활동에서도 뚜렷한 성과를 남겼다. 한국의 적십자운동을 일본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참여한 일이 그것이다. 대한제국 때인 1905년 10월 27일 창립된 대한국적십자사는 1910년 8월 29일의 국권상실로 인해 일본적십자사에 병합됐다. 이로 인해 왜곡된 한국 적십자운동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에 참여했던 것이다.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024년 제120집에 수록된 황민호 숭실대 교수의 논문 '대한민국임시정부 적십자회 이사장 서병호의 생애와 독립운동'은 "1919년 8월 29일 대한적십자회가 내무총장 안창호에 의해 정식으로 인가장을 받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고 한 뒤 "11월 15일에 개최된 제1회 정기총회에서는 부회장 안정근, 감사 옥성빈·김태연과 함께 (서병호가) 이사장에 선임되었다"고 말한다.
서병호의 적십자운동은 독립운동의 성격도 띠지만, 인도주의 구호운동의 성격을 훨씬 더 띠었다. 이는 한국의 인도주의운동이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도록 견제하는 의미도 컸다.
대한국적십자사를 병합한 일본적십자사는 인도주의 사명을 망각한 채 한국인들을 차별했다. 2019년 11월 29일 대한적십자사와 한국민족운동사학회가 주최한 '일제강점기 대한적십자회와 민족운동' 학술대회의 발표자인 조규태 한성대 교수는 서병호 등이 대한적십자회를 창립한 동기를 언급하면서 일본적십자사의 반인도적 모습을 지적했다.
1910년부터 1919년 1월까지 15,000명 이상의 한인이 희생당하고 3·1운동 기간 10,000명의 한인이 목숨을 잃고 30,000명 이상의 한인이 체포되어 고통을 받고 있음에도 일본적십자회가 적십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자 분개하고 이를 대신하여 한인을 위한 적십자사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조직되었다.
대한적십자회는 당시의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간호원양성소를 운영하고 한국인 의사들과 함께 진료 및 예방 활동을 펼쳤다. 콜레라가 유행한 1919년 하반기의 상하이에서도 감염병 치료에 나섰다. 이 단체의 활동은 한국인들이 있는 외국 도시뿐 아니라,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국내에서도 전개됐다.
정치적 주권을 되찾는 일뿐 아니라 인도주의 구호활동에도 투신한 서병호는 교육 분야에서도 족적을 남겼다. 인성학교 이사장으로 재직한 것 외에, 상하이에 남화학원을 설립하는 이력도 기록했다.
1945년에 60세가 된 서병호는 일본이 패망해 세계 각지의 한국인들이 고국으로 귀환하는 상황에서도 인도주의자의 길을 걸었다. 해방 직후에 그가 최대 중점을 둔 것은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무사 귀환을 돕는 일이었다.
위 황민호 논문은 "해방이 되자 상해에 거주하고 있던 약 5000명의 교민과 각지에서 몰려든 피난민과 실업자들에 대한 당장의 대책과 귀환문제가 중국 내의 정치정세와 맞물리면서 긴급한 현안이 되었는데, 서병호는 동포들의 생활 안정과 안전한 귀환을 위해 노력하였다"고 한 뒤 이렇게 설명한다.
서병호는 남궁혁·최창식·장덕로 등과 함께 교민회를 조직하고 중국 내 한인들의 보호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우선 상해시 정부와 미국대사관 및 영국대사관으로부터 교민회가 공인단체가 되도록 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한국인증을 발급받아 신분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미국 국무성으로부터 동포들이 귀국 신청을 할 경우 교통편은 미군 측이 해결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1947년 4월 23일자 <동아일보> 2면은 고국을 향한 상해한국교민협회의 간절한 호소를 전하면서 "(교민협회가) 이번 귀국 동포의 편에 동(同)협회 이사장 서병호씨 명의로 다음과 같은 그곳 동포의 소리를 전해왓다"고 보도했다. 그런 뒤 서병호 명의의 연락에 "본국과 연락이 업스니 기맥을 통케 하여 주시옵. 서신이나 소식이라도"라고 호소하는 대목이 있다고 소개했다. 해방 2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도 동포들의 귀환을 위해 열의를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병호는 1947년 그해에 귀국했다. 상하이에서 한국까지 오는 데 2년이 걸린 셈이다. 그 뒤에도 그의 인도주의 활동은 계속 이어졌다. 그의 사진과 함께 보도된 1964년 2월 27일자 <조선일보> 6면은 그가 해방 뒤에 "농아협회 이사장, 기독교아동복리회 재단 이사, 안양기독교보육원 재단 이사"를 역임했다고 알려준다.
그러면서도 그는 항일독립운동가의 면모를 계속 유지했다. 1964년에 79세가 된 그는 박정희 정권이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추진하자 이를 저지하는 운동에 가세했다.
한일회담 반대투쟁이 약 8만 명이 참가하는 3·24시위를 향해 달려가던 시점에 발행된 그해 3월 10일자 <경향신문> 1면 하단은 "정부의 한일회담 조기 타결을 반대하기 위해 재야세력이 구성한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위는 10일 상오 지도위를 비롯한 상임집행부와 총무·재정·섭외·동원·조직·선전 등 6개 집행위의 임원을 다음과 같이 선정하였다"라며 서병호가 장준하·김시현 등과 함께 지도위원이 된 일을 보도했다.
서병호는 독립운동뿐 아니라 인도주의 활동에도 기여했다. 한국인들을 제국주의 지배에서 구출하는 것뿐 아니라 한국인들이 사회적 네트워크 속에서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하는 데도 이바지했다. 서병호는 일제의 강압에 맞서 학교 폐쇄를 선택하는 냉정하고도 과감한 모습과 해방 2년이 되도록 상하이에 남아 동포들을 귀환시키는 따뜻하고도 희생적인 모습을 갖고 20세기 초중반의 한국 사회를 이끈 휴머니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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