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난 시민들의 행진‘윤석열 즉각퇴진 사회대개혁 4차 범시민대행진’이 지난 2024년 12월 28일 오후 서울 광화문앞에서 윤석열퇴진 비상행동 주최로 열린 가운데, 참가자들이 응원봉 불빛을 밝히며 명동입구까지 행진하고 있다.
권우성
내란의 광풍을 견디어내고, 대선을 통해 민주정부가 들어서고, '일머리 있는 대통령'의 여러 성과로 국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12.3 계엄과 뒤이은 일련의 정치적 혼란이 가져온 스트레스로부터 국민들은 많이 자유로워졌다. 우리 땅에서 '최소치의 민주주의'는 실현된 셈이다. 그럼에도, 이 안도의 분위기에서도 불안한 미래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을 가슴 밑바닥에 쟁여두고 있다. 왜 그럴까?
보다 협소해지는 경제성장의 가능성, AI 시대의 성공과 함께 다가올 일자리 상실, 미래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젊은이들, 늘어나는 일회용품만큼이나 심각해지는 환경파괴와 기후위기. 여전히 국민들의 뒷덜미를 사로잡고 있는 소비주의와 성장주의 신화. '시험' 하나로 능력을 평가하고, 이에 따라 한 사람의 등급이 매겨지고 사회적 존중과 경제적 보상이 결정되는 격차 사회.
특히 한국의 능력주의는 능력에 대한 평가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의심받고 있다. 그저 학벌주의일 뿐이다. 이는 경쟁에서 승자와 패자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고 있다. 낙오자라 생각하는 20, 30대 청년들의 분노·절망감과 승자들의 교만·정신적 피폐는 '혐오의 정치화'를 양산하고 있다. 이 모든 사회 현상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지금 아우성을 듣고 있다.
'일머리 있는 대통령'이 집행하는 실사구시의 정책들이 실행되어 민생문제가 해결되고 경제성과를 거두는 것은 당장의 과제이다. 그러나 이런 성과의 총합이 여전히 성장주의와 소비주의로 환원된다면, 대다수 시민을 위한 민주주의가 가능해질까?
12월 5일 프리드리히 에버트재단과 포럼 사의재가 공동주최한 대토론회 <지속가능한 민주주의, 다시 함께 쓰다>는 올해 4월부터 9월까지 전국 6개 도시(대구, 광주, 부산, 대전, 춘천, 서울)에서 진행된 토론회의 결과로 나온 보고서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각 지역의 현실인식과 과제'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이루어진 자리였다.
보고서는 제도 개혁에 대한 당면한 핵심과제로 1) 헌정질서의 건전성 회복, 2) 정치시스템의 대표성·책임성 강화와 승자독식 구조 해체, 3) 시민역량 및 문화 강화와 민주주의 교육 정상화, 4) 공론장 재건과 포용성 확대, 혐오·음모론 대응을 제안하였다. 특히 이 토론회는 각 지역의 특수성과 불균형 문제를 분석하고 여러 제안을 내놓은 시민들의 목소리를 모았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런 임박한 과제들을 실행으로 옮길 박차가 필요하다.
이제 6개월이 지난 새 민주정부가 내놓은 여러 정책과 공약들은 국민들에게 안도감을 주지만, 이를 체감하기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우리에게 인내의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정치권이 약속하는, '개혁을 지향하면서도 실용적이어야 하는 정책들'이 모여 만드는 '미래세계'를 상상하고 그 전체 그림을 그려보는 사회적 토론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인문학적 상상력도 중요하다. 급하게 밀려오는 AI 기술이나 산업적인 도전에 대한 정부의 신속한 대응은 칭찬할 만하지만, 내년 R&D 예산에서 인문학 예산이 0.93%에 불과하다는 것은 슬픈 소식이다. 성장단계의 청소년들이 AI를 무비판적으로 사용하면, 사고능력이 현격히 낮아지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이나 휴머니즘이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현실이다. 인문학 연구나 교육의 강화 없이 AI 시대를 제대로 살아낼 수 없다. 정부의 대응 전략에서 중장기적 비전에 대한 고민이 있는지 궁금하다.
민주시민교육 강화와 시민사회의 활성화
영국의 유명 언론인인 존 캠프너는 자신의 책 <독일은 왜 잘하는가>에서 나치 과거청산과 전후복구, 68혁명, 2015년까지 260만여 명의 난민 수용에 이르는 세 번의 전환점 앞에서 독일이 거둔 성공을 그간 수행해 온 '가치의 정치'에서 찾고 있다.
독일은 기본법의 지배에 대한 확고한 신념 속에서 국가의 이해관계 추구 못지않게 도덕적 리더로서의 강력한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독일의 성공은 종전 이후로 지속된 치열한 이념적 대립을 헌정애국주의(Verfassungspatriotismus)의 토대 위에서 극복하면서, 치열한 자기 성찰과 '과거 기억하기'를 시도한 데에서 기인하였다. 종전 이래 엄청난 재정을 투입하여 민주시민교육(독일명: 정치교육)을 학교나 시민사회 내에서 시행해 온 노력도 독일의 단단한 민주주의 형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앞의 토론회에서 '시민역량 및 문화 강화와 민주주의 교육 정상화'가 시급한 과제로 제기된 것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24년 총선에서 민주당과 국민의힘 양당에 대한 지지율이 94%에 이른 것에서 드러나듯이 우리는 도처에서 심각한 정치적 양극화를 확인할 수 있다. 집회 시위자들의 이념성도 강해졌다. 특히 박근혜와 문재인 정부 이후 보수의 참여율이 늘어났고, 정당 외부에서도 집단적 대립이 일상적으로 나타난다. 거기에다가 경제 양극화, 정치의 감정화, 확증편향, 가짜뉴스 등도 시민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다. 이런 정치적 양극화에 맞서 과거처럼 시민단체들이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기가 힘들어졌다. 이제는 시민이 직접 나서야 한다.
당면한 위기 요인들에는 사람 문제와 제도 문제가 함께 섞여 있다. 제도 개혁의 차원에서 접근으로는 먼저 학교현장에서 민주시민교육을 확대· 강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교과과정에서 민주시민교육이 필수교과로 배치하고,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는 인권교육, 양성평등교육, 폭력예방교육, 다문화이해교육, 평화교육, 통일교육 등을 통합적으로 재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여기에는 그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미디어·디지털 교육도 포함되어야 한다.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최고 지도자의 강한 의지와 교육부의 결단이 먼저 필요하다.
윤석열 정부에서 학교교육에서 진행되던 민주시민교육은 폐기되거나 축소되었다. 새 정부에 들어와 민주시민교육 강화가 교육부를 중심으로 논의되고, 통일부는 그간의 통일교육을 민주시민평화통일교육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공무원 조직은 새로운 정치 흐름에 늘 신속하게 적응하고 있다. 그러나 정권 초기에 드러나는 최소한의 제스처는 오래 지속되지 않거나 형식적으로 진행되기 십상이다.
정부의 개혁노력이 현장의 당사자들에게 전달되고 실제로 현장을 바꾸어가는 과제는 별개의 문제이다. 개혁을 위해서는 열정적인 전담주체가 형성되어야 하고, 정책 입안자에 못지않게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각성된 교사들의 네트워크와 참여가 필수적이다. 탈정치화되고 있는 청년세대가 민주시민교육을 통해서 사회적·도덕적 책임감, 사회참여, 정치 문해를 습득할 가능성을 열었으면 좋겠다.
마찬가지로 시민사회의 역할을 강화하려는 정부의 노력이 필요하다. 12.3 내란 사태의 극복은 위기에 맞서 결집하는 시민들의 저력과 민주주의 회복력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그러나 광장에 모였던 거대한 에너지는 일상으로 돌아갔고, 이제 국민은 정부나 국회가 전담하는 개혁정치를 지켜보는 관찰자로 존재할 뿐이다. 윤석열 정부 아래에서 많은 시민단체나 시민운동이 여러 탄압에 직면하였고, 시민단체에 대한 지원금 역시도 거의 끊긴 상태여서, 시민운동은 재생산 위기에 처해 있다.
오래 광장을 지킨 활동가들은 지금 건강문제나 단체의 재정문제로 고초를 겪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독일의 사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민단체에 대한 엄정한 검증과정을 거친 후, 활동가들의 인건비를 중산층 생활을 유지할 만큼 지원하는 독일의 정책은 일상적 민주주의가 시민사회를 통해 지켜진다는 진지한 자각에서 왔다. 12.3 내란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데에 시민단체들은 마중물 역할로 크게 기여하였다. 지금은 다소 위축된 시민운동단체들의 질적 고양과 약진이 요청되고 있다.
이재명 정부는 여러 급박한 현안들로 바쁘더라도, 다가오는 새해 2026년에는 한국 사회의 중장기적 전망을 열어갈 민주시민교육 강화나 시민사회의 활성화라는 중요한 당면과제를 적극적으로 끌어 안기 바란다.
▲정현백장관
포럼사의재
*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정현백은 역사학자이자 시민단체 활동가로 문재인 정부의 초대 여성가족부 장관을 역임했다. 현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로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및 공동대표, 참여연대 공동대표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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