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2.20 14:17최종 업데이트 25.12.20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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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에서는 일종의 DNA 조작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나아갈 방향을 정한 것은 1919년 3·1운동 이념이다. 대한민국의 유전자인 이 이념을 조작해 나라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려는 시도가 1948년 정부수립 이래로 끊임없이 일어났다.

1919년 9월 11일부터 시행된 대한민국임시헌법 서문은 "아(我) 대한인민은 아국이 독립국임과 아민족이 자유민임을 선언하도다"라고 첫 문장에서 선언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에 맞선 독립자주가 대한민국의 나아갈 방향임을 천명했다. 제2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인민 전체에 재(在)함"이라고 함으로써 주권재민을 선포했다. 제3조는 "대한민국의 판도는 구한국의 판도로 함"이라고 함으로써 한반도 전체를 하나의 나라로 인정했다.

그런데 일제 패망 이후의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제국주의에 맞선 사람들이 아니라 그에 부역한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고, 주권재'민'이 아닌 주권재'이승만', 주권재박정희, 주권재전두환으로 오염됐다. 또 대한제국 판도의 절반을 적대시하는 반통일정책이 당연한 것처럼 추진됐다. 3·1운동에 의해 주입된 DNA를 역행하는 방향으로 여러 정권들이 작동됐던 것이다.

1945년 남북분단은 진정한 의미의 자주독립을 훼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분단 상태는 위 임시헌법 제3조뿐 아니라 서문에도 위반된다. 반공냉전체제는 3·1운동 이념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한국 국민들은 반공냉전세력의 지배하에서도 3·1운동 이념에 토대를 두고 정권에 저항했다. 4·19혁명과 6월항쟁 때처럼 반공냉전세력이 허약해질 때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친일파를 청산하라!'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추구하라!'는 국민적 요구가 커지곤 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민통학련사건

민통학련 사건을 보도한 1961년 9월 8일자 동아일보 3면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이를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가 2010년 서울중앙지방법원 재심 판결에 의해 재조명된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민통학련·통일학련) 사건이다. 이승만 몰락 이듬해에 일어난 이 사건은 대한민국이 분단극복과 통일이 아닌 분단고착과 냉전을 지향하는 현실에 대한 한국 대중의 불만과 도전을 반영한다.

학생 통일운동단체인 민통학련은 1960년 11월 1일에 발기인대회를 갖고 18일에 결성식을 가진 서울대학교민족통일연맹에 토대를 뒀다. 서울대의 움직임이 건국대·경북대·경희대·고려대·국학대·단국대·대구대·동국대·부산대·성균관대·수산대·전남대·조선대·중앙대·한국외대 등의 민통련 결성을 추동하고, 이듬해 5월 5일의 민통학련결성준비위원회 구성으로 이어졌다.

민통학련은 1961년 2월 8일 체결된 한미경제협정의 굴욕적·예속적 성격을 비판하고 반공임시특별법안과 데모규제법안을 '2대 악법'으로 규정하는 대규모 반대운동으로 전개됐다. 이 투쟁으로 인해 2대 악법의 제정은 결국 무산됐다.

민통학련의 또 다른 중점 사업은 남북교류 추진이었다. 그해 9월 6일자 <경향신문> 3면 등에 게재된 검찰의 민통학련 공소장은 민통학련 위원장 윤식(23세)과 훗날의 조선일보사 주필 류근일(24세) 등을 거명하면서 민통학련결성준비위 구성 이틀 전에 지금의 서울 대학로에서 벌어진 일을 이렇게 기술했다.

피고인 윤식·황건·류근일·김재택·이영일은 동년 5월 3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구내다방에서 서울대학교민족통일연맹 대의원총회를 개최하고 통일에의 모든 방법을 채택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 한 민족의 판단과 용기에 달려 있으므로 조국의 마지막 과제를 수행하기 위하여 남북학생회담과 학생기자 교류, 학술 토론회, 모든 예술·학문 창작의 교류, 학생 친선체육대회를 단시일 내에 실현하기로 합의하고

서울대 학생들이 채택한 결의문은 5월 5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 위 결성준비위원회(위원장 윤식) 회의에서도 통과됐다. 공소장에 따르면, 결성준비위 결의문은 5월 3일 서울대 민통련 결의문에 대해 북한 학생 및 당국이 호응할 것을 촉구하고 '이달 안에 판문점에서 만나자'고 제안하는 내용을 담았다.

민통학련의 제안은 혁신계로 불리는 진보진영의 지지는 받았지만, 보수진영과 민주당 정권으로부터는 비토를 받았다. 5월 7일자 <조선일보> 톱기사에 따르면, 윤보선 대통령은 민통련 결의문이 채택된 다음날인 6일의 기자회견에서 "먼저 우리가 남한에서 가난한 사람이 없이 잘살게 된 연후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이라며 민통학련의 대북 제안을 비판했다.

10일자 <동아일보> 톱기사는 장면 총리가 10일 오전 기자회견에서 "일부 학생들의 남북학생회담 개최 제의 등은 정부로서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고 발언한 사실을 알려준다. 장면은 '통일은 유엔을 중심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통령과 총리가 이처럼 신속한 반응을 보인 것은 이 시기 학생 통일운동의 파급력을 가늠케 해준다.

윤보선은 빈곤층이 사라진 뒤에 통일운동을 하자고 했고 장면은 국제연합을 무대로 하자고 했지만, 민통학련 학생들은 이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이들은 장면 총리의 불허방침이 천명된 이후인 13일과 14일에도 대중집회에 참석해 남북학생회담을 촉구했다.

5.16 쿠데타 이후 '특수범죄'로 처벌... 49년만에 재심

민통학련과 장면 정권의 갈등이 증폭되던 상황에서 돌출한 사건이 5·16 쿠데타다. 군사정변을 일으킨 박정희 군부는 민통학련 문제에 관한 한 장면 정권과 입장을 같이했다. 이들은 민통학련 체포작전을 서둘렀다. 류근일의 경우에는 그달 30일 구속됐다.

민통학련 지도부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에 의해 설치된 혁명재판소의 판단을 받게 됐다. 국가재건비상조치법 제22조는 "반민족적 부정행위 또는 반혁명적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혁명재판소를 둘 수 있다고 규정했다.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한 것이 "반민족적 부정행위 또는 반혁명적 행위"로 간주됐던 것이다.

혁명검찰부는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하는 문건을 작성하고 이를 민족일보사 등에 보낸 것이 '특수범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그해 6월 22일 제정된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례법' 제1조는 위의 반민족적·반혁명적 행위를 특수범죄로 규정했다. 민통학련 학생들은 북한을 찬양·고무하고 동조했다는 혐의로 이 특례법의 적용을 받았다.

학생들은 혐의를 부인하며 2심인 상소심까지 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해 11월 30일자 <조선일보> 3면은 "혁재 상소제1부는 30일(원문은 3일) 상오 10시 민통학련사건 상소심 언도공판을 열고 윤식 피고인 등 9명에게 상소기각의 판결을 내림으로써 이들에게 1심 판결인 최고 징역 15년으로부터 최하 징역 5년까지의 실형을 확정시켰다"고 보도했다.

학생들이 분단상태를 해소하고자 통일운동에 나선 것은 3·1운동의 이념에 부합했다. 하지만, 혁명검찰부와 혁명재판소는 이를 특수범죄로 규정하고 중형을 부과했다. 이 판결이 잘못됐다는 점은 49년 뒤인 2010년 9월 10일의 서울중앙지방법원 재심 판결에 의해 사법적으로 확인됐다.

류근일이 신청한 재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은 "무력에 의한 통일을 지향하지 않는 이상 평화적 통일을 이루기 위하여는 그 전제로서 남북교류가 선행되어야 함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므로 위와 같은 남북교류의 주장 자체가 북한을 찬양·고무·동조한 것으로는 볼 수 없는 점" 등을 무죄 선고의 근거로 제시했다. 재심에서 무죄판결이 확정돼 류근일은 형사보상금을 받게 됐다.

위 판결문의 표현처럼 남북학생회담 제안은 지극히 당연한 것인데도 박정희 군사정권하에서는 그것이 반민족적·반혁명적 특수범죄로 취급됐다. 지극히 부당했던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일이다. 이 재심 판결은 통일과 남북화해를 지향하는 것이 결코 범죄가 될 수 없는데도 이를 범죄시했던 반공정권들의 부조리와 모순을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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