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채
위키미디어 공용
서장직을 던질 당시, 최석채는 35세였다. 태어난 해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이자 3·1운동 2년 전인 1917년이다. 본적지는 경북 금릉군(김천시 일원)이지만 출생지는 충북 보은군인 그는 1930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상업학교에 진학했다. 우체국 직원이었던 아버지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일본에 가 있었다. 넉넉지 않은 집안의 6남매 중 셋째였던 그가 일본 유학을 하게 된 것은 아버지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 가서 신문 배달 등을 하며 주경야독을 한 그는 19세 때인 1936년에 일본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하고, 도쿄 서남쪽 약 250km인 오카자키(나고야 인근)에서 시청 직원으로 일했다. 이를 계기로 생활을 안정시켜 어머니와 동생들을 일본에 이주시킨 뒤, 주경야독을 계속해 주쿄법률학교와 주오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법학부를 졸업한 해는 25세 때인 1942년이다. 그 뒤에는 한자명이 법제(法制)인 <호세이>지의 기자가 됐다가 편집주임 직무대리로 승진했다. 이 상태로 28세 때 해방을 맞아 귀국한 뒤, 대구 <건국공론> 편집부장, <경북신문> 편집국 차장, <부녀일보> 편집국장으로 일하다가 한청 부단장을 거쳐 1949년 2월에 경상북도경찰국 사찰과 부과장으로 특채됐다.
극우 청년단체들이 정치 경찰과 더불어 정권을 지탱할 때였다. 그런 시절에 그는 지역 언론사들의 편집 책임자와 극우 청년단체의 부단장을 지냈다. 위 <경향신문>은 그가 "좌익 무리들의 책략에 굴함이 없이 짧은 기간이나마 자기의 맡은바 임무에 충실하였다"고 평한다. 언론사와 한청에 있을 때 진보 진영과의 대결에서 능력을 발휘한 사실은 그가 경북도경 사찰과 부과장으로 발탁된 배경을 추론케 해준다.
그는 '좌익 무리들'뿐 아니라 북한군과의 싸움에서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경북 성주경찰서장·문경경찰서장·영주경찰서장을 역임하면서 공비 토벌작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1955년 9월 20일 자 <동아일보>는 "1·4후퇴에 제(際)하여 예(例)의 유명한 경북 조령전투를 지휘하여 군인 이외의 유일한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고 알려준다. 펜과 총을 다 잘 쓰는 독특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경찰을 떠난 뒤인 1954년에 대구일보사 편집국 부국장이 되고 1955년에 대구매일신문사 편집국장이 된 그는 이승만 정권의 폐부를 정면 겨냥하는 글들을 썼다. 대구 시내의 학생 전체가 임병직 주유엔상임대표를 위한 환영 행사에 동원돼 4시간 동안이나 도로변에서 고생한 그해 9월 10일 토요일의 일에 분노한 그는 임병직이 아닌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는 사설을 13일 자 신문에 내보냈다.
제목이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인 이 사설은 "수천 수만의 남녀 학도들이 면학을 집어치워버리고 한 사람 앞에 돈 10환씩을 내어 수기(手旗)를 사 가지고 길바닥에 늘어서야 할 아무 이유를 발견 못한다"라는 직설적 화법으로 자유당 정권을 공격했다. 그런 뒤 "국무위원급 이상의 현관(顯官)이 내왕할 때"에 이런 소동을 벌이는 것은 "불유쾌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라고 질타했다.
자유당 정권을 향해 '불유쾌하다'는 사설이 나간 다음 날, 곤봉과 해머를 든 자유당 당원 및 국민회(관변단체) 회원 20여 명이 대구매일신문사 사옥에 난입해 인쇄기 전부를 파괴하고 직원들에게 테러를 가해 여덟 명을 부상시켰다. 38세의 최석채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대법원 재판까지 갔다가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해 12월 11일 자 <경향신문>은 '대구매일 테로사건'을 을미년의 10대 국내 뉴스로 선정했다.
좌우를 떠나 정권의 잘못을 가차 없이 비판

▲경북 김천시 대항면 직지문화공원에 들어선 몽향 최석채 선생의 기념비.
연합뉴스
최석채는 그 뒤에도 이승만 정권을 강타했다. 정권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1959년 9월 대구매일신문사를 그만두고 다음 달에 조선일보사 논설위원이 된 그는 새 직장에 들어간 지 5개월 만에 또다시 '사고'를 쳤다. 3·15부정선거 이틀 뒤, 43세의 최석채는 '호헌구국운동 이외의 다른 방도는 없다'라는 유명한 사설을 쓴다.
1960년 3월 17일 자 <조선일보> 1면에 실린 이 사설은 "뜻 있는 전 국민은 엄숙히 자문자답해본다"라며 "과연 이것이 선거인가?고"라고 말한다. 사설은 "호헌구국의 대의를 내걸고 전체 국민과 더불어 투쟁하는 국민운동"밖에 없다며 국민적 궐기를 촉구한다. 위의 <신문과 방송> 기고문은 "이 사설은 4·19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된다"라고 말한다.
최석채는 박정희 정권이 아직 군사정권이던 1963년 3월 16일에는 정치 군인들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일부 군인들의 탈선 행동에 경고한다'는 사설을 내보냈다. 현역 군인 80여 명이 쿠데타 세력의 원대 복귀를 반대하며 민정 참여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자 그는 그처럼 과감한 사설을 내보냈다. 그날 조선일보사는 이 사설을 톱기사로 실었다.
최석채는 글쓰기를 그만둔 이듬해인 1972년 이후에는 정권의 영향하에 있는 문화방송(MBC)의 회장도 되고 5·16장학회의 이사장도 역임했다. 잘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를 두고 독재정권과 타협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경찰서장직을 사퇴하기 전에 극우 노선을 걸었던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경찰서장직을 버린 것과 이승만·박정희 정권을 비판한 것은 그가 진보 진영으로 전향했음을 보여주는 표지들이 아니다. 그는 좌냐 우냐, 진보냐 보수냐를 떠나 정권의 잘못을 가차 없이 비판했다. 항상 소신과 신념을 택했던 것이다. 좌·우나 진보·보수의 잣대로 평가하기 힘든 인물이다.
MBC에 가고 5·16장학회에 간 뒤에도 그는 훌륭한 언론인으로 존경을 받았다. 2000년에 IPI는 "그는 자유 언론의 강력한 옹호자였으며 오랜 언론인 생활을 통해 모든 형태의 부정에 반대하는 탁월한 용기를 보여주었다"는 말로 세계언론자유영웅 선정 이유를 밝혔다.
최석채는 극우의 정치 경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이런 경력과 정치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옳지 않은 것을 언제나 비판했다. 이승만을 등지고 맹비판한 데서도 나타나듯이 그는 진영 논리에 휘둘리지 않았다. 설령 동지일지라도 선을 넘은 세력과는 과감히 결별하고 "모든 형태의 부정을 반대"했다. 1991년에 향년 74세로 작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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