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2.12 12:04최종 업데이트 25.12.12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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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이 10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AI 시대의 K-반도체 비전과 육성전략 보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연합뉴스

"균형발전에 우리 기업들이 기여를 해주면 좋겠다.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남쪽 지방으로 눈길을 돌려서 그 지역에서 새로운 산업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관심을 가져 달라."

지난 1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인공지능(AI) 시대, K-반도체 비전과 육성 전략 보고회'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국내 주요 반도체 기업 관계자들에게 한 발언 내용입니다. 5분 정도 이어진 모두발언을 통해 이 대통령은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생태계 구축 강화와 함께,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비수도권 지역에 새로운 반도체 생태계를 조성하여 지역 균형 발전을 이루고자 하는 명확한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지난 3년간 <오마이뉴스>에 '반도체 특별과외'를 연재하면서 향후 반도체 클러스터는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호남 지역에 조성해야 한다고 수도 없이 반복해 주장해 온 저에게 큰 기대감을 안겨주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의 발언 이후 바로 이어진 김정관 산업부 장관의 "K반도체 비전과 육성전략"발표를 들으면서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습니다.

김 장관은 반도체 산업을 국가 간 전쟁으로 비유하면서 반도체 산업의 위협 요인으로 경쟁국 대비 부족한 정부 투자와 인재 및 인프라의 수도권 집중 위험을 지적하며 전략 발표를 시작했습니다. 주요 내용은 ▲ 반도체 초격차 기술 확보 ▲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 강화 ▲ 소부장 및 인재 육성 강화였으며, 그중 핵심은 국내 팹리스 규모를 10배 확장하고 기업들이 2047년까지 약 700조 원 이상을 투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통령의 관심 사항인 지역 균형 발전 관련 내용은 산업부 추진 전략 네 번째 항목인 '반도체 생태계 확장'에서 언급되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부권 반도체 혁신벨트라 이름을 붙였지만 기존에 있던 기업에 이름을 붙인 것일 뿐 반도체 팹 수준의 대규모 기업 이전 계획은 없습니다산업통상자원부

▲ 신규 반도체 특화단지는 비수도권에 지정 ▲ 수도권에서 멀어질수록 인프라 및 재정 우대 ▲ 지방의 자본 조달 방식 다양화 ▲ 비수도권 클러스터 내 연구직 노동시간 규제 완화. 여기에 광주(첨단 패키징), 부산(전력 반도체), 구미(반도체 소재)를 엮는 남부권 반도체 벨트 조성 계획도 발표되었습니다.

현 정부 임기 내 지방 클러스터 조성 계획 없다

문제는 이러한 '지방 분산' 대책들이 실질적인 핵심 요소를 배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산업부는 2047년까지 약 700조 원 이상을 투자하여 수도권에 반도체 생산 팹 10기를 신설한다고 명시했습니다. 이걸 반도체 팹의 증설 속도에 비추어 보면 반도체 산업의 심장인 생산 팹이 포함된 신규 비수도권 특화단지 지정은 사실상 2047년 이후에나 가능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현 정부 임기 내에는 팹이 포함된 지방 클러스터를 조성할 계획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뒤따라오는 재정, 인프라, 자본 조달 등 나머지 항목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지방의 반도체 회사에서 일하는 연구원은 노동시간 규제를 완화해서 일을 더 시킬 수 있게 하겠다는 내용을 기업 유인 대책이라고 내놓은 데서는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이재명 정부에서 나온 대책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 정부 역시 수도권에 반도체 팹을 모아 놓는 것이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에 위협 요소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을 뿐.산업통상자원부

사실 정부 관계자 모두 반도체 팹의 지방 이전이 반도체 산업을 통한 지역 균형발전의 핵심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기획재정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통상부 등 정부 관계 기관 10개 합동으로 내놓은 별첨자료를 보면 우리 산업의 위협 요인으로 "수도권 집중에 따른 산업 확장성과 안정성에 제약"을 명시했고, 수도권의 반도체 단지는 "전력망 포화 등의 인프라 한계에 직면"했으며, "대만·일본 등 경쟁국은 반도체 팹의 지역 분산 전략을 통해 리스크를 관리"한다고 정확하게 진단했습니다.

이처럼 관련 부처 모두가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도, 장관 발표나 산업부 보도 자료 어디에도 '반도체 팹을 지방에 짓겠다'라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대신, 수도권에 팹 10기를 더 짓는 데 정부가 적극적으로 규제를 해제하고 재정을 지원하겠다는 내용만 가득했습니다.

그나마 산업부의 발표 내용도 신뢰도가 떨어집니다. 산업부 보도 자료에는 2047년까지 약 700조 원 이상을 투자해서 수도권에 반도체 생산 팹 10기를 신설한다고 했지만, 관계 부처 합동으로 내놓은 "AI 시대, 반도체산업 전략"이라는 보도 자료에는 연구용 팹 3기를 포함해 모두 16기의 팹을 신설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산업부 보도자료와 관계부처 합동으로 나온 보도자료에 신규 팹의 수가 다릅니다. 투자 금액과 기간은 같은데 팹 수가 6개나 차이가 납니다(연구 팹 포함)산업통상자원부

한 기에 수조 원에서 수십조 원이 필요한 팹의 수가 이렇게나 다른 이유를 산업부에 물었더니, 산업부 자료의 10기는 용인에 세워지는 팹의 숫자이고, 관계 부처 합동 자료의 16기는 평택을 포함한 수도권 전체에 세워지는 팹의 숫자라고 답했습니다. 산업부 해명대로라면 팹이 들어설 지역도 다르고 지어질 팹의 수는 다른데, 2047년까지라는 시기와 700조 원이라는 금액은 같은 겁니다.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료라면 최소한 숫자 확인은 하는 게 먼저일 것입니다.

종합해 보면 관련 부처 공무원은 반도체 팹의 지방 이전을 재벌 기업의 '선의'에 맡길 뿐 적극적으로 뭔가 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보고회에 참석한 재벌 대표들도 대통령의 반복되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지방에 팹을 짓는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미 전력 수요의 절반을 확보했다며 용인 팹을 그대로 밀고 나가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습니다. 그 확보한 전력이 재생에너지가 아니라는 건 숨겼습니다. 대신 대규모 투자 활성화를 위해 규제 완화를 요구하고, 대통령으로부터 "금산분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실질적인 대책을 거의 다 마련했다"라는 답을 끌어냈습니다. 이대로라면 대통령은 재벌에게 줄 것 다 주고 아무것도 못 받는 상황이 될 겁니다.

지역 균형 발전 방향 강력하게 추진해야

10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AI 시대의 K-반도체 비전과 육성전략 보고회가 진행되고 있다.연합뉴스

하지만 보고회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난 건 아닙니다. 정부와 대기업의 미온적인 태도 속에서도, 보고회 참석자들의 발언을 통해 반도체 팹의 지방 이전을 뒷받침하는 명확한 근거들이 제시되었습니다.

이호현 기후에너지환경부 2차관은 용인 클러스터에 전력을 공급하려면 발전소를 추가 건설하거나 호남에서 송전선로 4~5개를 설치해야 하는데, 모두 현실적인 어려움이 크다며, 전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시설은 전력이 풍부한 지역에 짓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습니다.

광주와 송도에 첨단 패키징 생산 시설을 운영하고 있는 앰코의 이진안 사장은 광주는 인력은 많은데 산업단지가 많지 않아 오히려 송도보다 인력 수급이 더 수월하다고 증언했습니다. 구미에서 웨이퍼를 생산하는 SK실트론의 정광진 사장 역시 인력 수급에 어려움이 없으며 지역 대학과의 산학협력을 통해 인력을 유치하고 있다고 밝혀, '지방에 팹을 지으면 인재를 구하지 못한다'라는 일부의 주장이 근거가 허술함을 드러냈습니다(반도체 팹은 기본적으로 생산 시설이며, 여기서 필요한 인력은 첨단 패키징이나 웨이퍼 제조 회사와 수준 차이가 전혀 없습니다).

보고회 전체 내용을 보면서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와는 별개로, 실무 부처와 재벌 기업들이 수도권 중심의 개발 논리를 고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과거 용인 반도체 유치에 힘썼던 일을 언급하며 "내가 왜 그랬지?"라고 말할 정도로 반도체 팹의 지방 유치에 대한 의지를 명확히 했습니다.

가야 할 길은 명확합니다. 향후 건설할 반도체 팹은 재생에너지 수급이라는 현실적·환경적 문제와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국가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호남 지역에 'RE100 클러스터'를 조성하여 지어야 합니다. 이는 전력 수급의 효율성 증대는 물론, 우리나라가 글로벌 RE100(재생에너지 100%) 요구에 대응하여 미래 경쟁력을 확보하는 필수적인 방안입니다.

대통령은 수도권을 떠나기 싫은 재벌 기업과 수도권 개발이 개인적 이익이라 여기는 관료 집단의 저항을 뚫고, 옳다고 믿는 지역 균형 발전의 방향을 강력하게 추진해야 합니다. 관계부처 합동 보고서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산업의 명운이 달린 지금, 그동안 실행하지 못한 정책 과제들을 총망라해 비상한 각오로 추진." 반도체 초호황기이자, 이재명 정부의 집권 초기인 지금이 추진하기 가장 좋은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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