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2.13 18:07최종 업데이트 25.12.13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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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빨갱이'는 공산주의자보다는 반여당 세력을 매도하는 데 주로 사용됐다. 집권당을 반대하는 세력이 반국가 세력으로 포장되고 빨갱이로 지칭됐다. 그런데 반공 정권들이 말하는 반국가 세력의 '국가'는 한국 정권만 포함하는 게 아니었다. 미국 정권도 이에 포함됐다. 한미동맹의 부조리를 지적하는 것도 빨갱이의 핵심 표지로 간주됐다.

또 일본 정권도 포함됐다. 반공 정권들의 공안사건에서는 일본을 반대하는 세력도 빨갱이 범주에 들어갔다. 독립운동가 상당수와 친일 청산 추진 세력은 미 군정기와 이승만 집권기에 빨갱이로 몰려 살해되거나 투옥됐다. 이는 한국의 빨갱이가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추종하는 세력이 아니라 한미일 정권들을 추종하지 않는 세력이었음을 의미한다.

1964년 8월 14일 자 <동아일보> 기사 "북괴지령 받고 국가변란음모"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그런데 일본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빨갱이로 몰린 사람들이 해방공간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박정희 때도 그런 피해자들이 있었다는 점은 약 8만 명이 참여한 3·24 한일회담 반대 시위로 인해 반일 열기가 고조되던 1964년에 갑자기 툭 불거진 인민혁명당 사건에서도 나타난다.

인혁당 사건은 '반일=빨갱이' 공식을 전제로 진행했다. 그해 광복절에 나온 <동아일보>에 따르면, 그 전날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공개한 인혁당 사건 발표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인민혁명당은 1964년 2월 북괴 중앙노동당으로부터 남한의 전(全) 외국군의 철수와 한일회담 반대를 적극화하는 학생데모를 조직적으로 일으키라는 지령을 받고 당의 지도체계를 학생데모 지휘를 위한 방향으로 개편·강화하는 한편, 학생 지도층과 언론계 인사의 포섭에 주력하였음이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북괴는 남한 학생데모를 성원하기 위하여 김책공업대학을 위시한 대내적인 데모를 연일 감행하는 일방, 일본 조총련에 지령하여 재일교포 학생데모를 일으켰음이 이번에 밝혀지게 되었다."

박 정권은 한일협정 반대 세력을 빨갱이로 몰기 위해 이들을 '북괴 노동당 중앙' 및 '조총련'과 연계시켰다. 이런 허위 선전전이 얼마나 효과를 발휘했는지는 인혁당 관련자의 가족을 대하는 당시 어린이들의 모습에서도 확인된다.

경향신문사 사장을 역임하고 민주회복국민회의 상임대표위원 책임을 지고 있던 윤형중 신부(1903~1979)는 1975년 2월 18일 자 <동아일보>에 기고한 '정부의 좁은 도량이 가슴 아파'라는 칼럼에서 10여 년 전을 회고하며 이렇게 썼다.

"동네 어린아이들이 인혁당 가족의 아이를 잡아놓고 눈을 가리고 나무에 묶어놓고는 '너는 빨갱이의 자식이니 처형한다'면서 처형하는 흉내를 냈다고 하니, 그것을 본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비통했겠는가."

반일을 반미·친북과 연결시켜 빨갱이 딱지

반공 정권들은 '반미'는 곧바로 빨갱이와 직결시켜도, '반일'은 곧바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는 민심을 정면으로 자극하는 것이기에 그 어떤 정권도 그렇게는 못 했다.

그래서 반공 정권들은 반일을 반미·친북과 연결시키는 방법으로 반일에 빨갱이 딱지를 붙였다. 이 점은 해방 직후나 박정희 때나 마찬가지다. 인혁당 사건에서는 '관련자들이 한일협정을 반대한다'는 실제 사실과 '주한미군 철수 추진' 및 '북괴 지령'이라는 허구를 연결시켜 관련자들을 빨갱이로 몰았다. 동지적 관계인 일본 정권을 반대하는 세력을 빨갱이로 몰고 싶지만, 노골적으로 그렇게 할 수 없는 반공 정권들의 고민이 투영된 접근법이다.

그렇게 시작된 인혁당 사건은 둘로 나뉜다. 1964년의 제1차 인혁당 사건은 인민혁명당이 대학가의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배후 조종했다는 사건이고, 1974년의 제2차 인혁당 사건은 제1차 사건 관련자들이 구성한 인혁당재건위원회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의 반정부 투쟁을 배후 조종했다는 사건이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사건 전모를 발표하면서, 관련자 57명 중에서 도예종 인혁당 중앙당무위원장(당시 40세)을 비롯한 41명이 구속됐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것이 조작에 기초했음이 밝혀지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건을 담당한 검사들의 반응이 그것을 보여준다.

국가정보원의 과거사 보고서인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주요 의혹사건 편 상권(II)>는 "1964.8 서울지검 공안부로 송치된 후, 서울지검 공안부 이용훈 부장검사를 비롯한 김병리·장원찬·최대현 검사는 20여 일 간의 수사 끝에 1964.9.5.(구속기간 만료일) 증거불충분으로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으며 공소를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며 기소장 서명을 거부"했다고 알려준다.

공안 검사들은 정보기관이 보내준 웬만한 조작 사건들은 눈감고 재판에 넘겼다. 그런데 이 사건의 경우에는,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 1명도 아니고 네 명이 '양심상 도저히 못 하겠다'며 손을 놓았다. 다른 조작 사건들에서도 "증거불충분"이 심하기는 매한가지이지만, 이 사건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너무 심했던 것이다.

공안 검사들이 볼 때도 엉터리 조작

1961년 5.16 당시 계엄사무소 앞에 선 군사혁명위원회 장도영 위원장과 박정희 부위원장(오른쪽).위키미디어 공용

약 8만 명이 참가한 3·24 시위에 이어, 5월 20일에는 한일협정 반대 세력이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거행해 박정희를 자극했다. 박정희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땅에 묻는 이미지를 연출했던 것이다. 5월 25일에는 반대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6월 3일에는 박정희 하야 구호가 시위 현장에서 나왔다.

2년 반의 군정을 정리하고 1963년 12월 17일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를 상대로 임기 6개월도 안 되는 시점에 하야를 요구하는 구호가 나왔다.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가 정권 붕괴로 연결되는 모습을 4년 전에 지켜봤던 박정희는 6월 3일 그날 비상계엄령을 발포했다.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인민혁명당 사건이 급조됐다. 공안 검사들이 볼 때도 너무 엉터리 같은 조작이었다. 그러나 박 정권은 검사들의 항명에 개의치 않았다. 위 국정원 보고서는 "신직수 검찰총장은 당직검사(정명래)를 통해 26명을 국가보안법 위반(반국가단체) 혐의로 기소"했다고 기술한다. 이를 지켜본 이용훈 부장검사와 김병리·장원찬 검사는 사표를 던졌다.

이 사건이 급조됐다는 점은 윤형중 신부의 고발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피해자와 가족들의 증언을 소개하면서 "정보부에 잡혀 들어가 보니 이미 조서 작성이 다 돼 있고 거기에다가 손도장만 찍으라고 했다"는 증언을 전했다. 또 "처음에는 조그마한 한 점을 솜사탕처럼 불리더니 이제는 거기에다 빨간 보자기까지 씌웠다"는 사형수의 탄식도 전했다.

불법 수사와 가혹행위도 있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이 위원회는 "국가는 중앙정보부가 수사 과정에서 범한 불법구금·가혹행위·사건조작에 대하여 사과"하라고 권고했다.

3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은 제1차 인혁당사건 관계자들은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 심할 때인 1974년에 제2차 사건으로 다시 엮여 고난을 겪었다. 이번에는 8명이 사형선고, 7명이 무기징역, 4명이 징역 20년, 4명이 징역 15년을 받았다.

제2차 때도 박 정권은 조급했다. 대법원이 형량을 확정(4.8.)한 지 18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1975년 4월 9일에 사형을 전격 집행했다. 이를 전해 들은 국제 앰네스티는 다음날 항의 성명을 발표했고, 스위스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회는 사법 살인으로 규정하면서 4월 9일을 '사법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선고 통지서 도착 전에 사형 집행

이 사건에는 등장 주체가 많다. 한국 정권뿐 아니라 주한미군을 파견한 미국 정권과 한일회담을 추진한 일본 정권도 '반국가 세력'의 '국가'로 등장했다. 또 한국 국가기관들도 많이 관련됐다. 일반적인 사법살인은 정권이 주도하고 정보기관·경찰·검찰·법원이 참여하는 식으로 진행되지만, 이 사건에서는 교도소까지 명확히 가세했다. 대법원 사법정책연구원의 <형사재심의 현황과 운용방안에 관한 연구>는 이렇게 말한다.

"당시 이들의 선고통지서가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있기 전(에) 군 검찰에 접수되었고, 서울구치소에서도 선고통지서가 도착하기도 전에 사형을 집행했다는 정황이 문서로 드러났다."

여러 정권, 여러 국가기관이 개입한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서도 여러 기구가 참여했다. 위 책은 "대통령 직속기구로 구성된 의문사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한 재조사에 착수하였고, 2002.9. 인혁당 사건이 고문에 의해 과장·조작된 것이라고 밝혔다", "국가정보원 과거사위원회도 2005.12.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가혹행위와 인혁당 구성 및 가입 등에 대한 조작 사실을 인정"했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원회도 진실 규명에 나섰다. 박 정권이 성급하게 엉터리로 조작했지만 피해 규모가 크고 파급 효과가 세계적이라 위원회 세 곳이 진상조사를 하게 됐던 것이다. 재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저세상에 가 있는 사형수 8명에게 2007년 1월 23일 무죄를 선고했고, 이 선고는 그달 31일 확정됐다. 나머지 피해자들의 무죄도 그 후의 재심에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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