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신박물관 이집트하우스 전용실에 전시된 네페르티티. 연간 백만의 방문객을 유혹하는 3500세의 이집트 왕비.
Staatliche Museen Berlin
베를린 이집트관 전용실에 전시되어 있는 네페르티티 흉상에 대해서도 간간이 반환 요구가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카이로의 대이집트 박물관 개관과 함께 반환 요구가 거세졌다. 다만 여러 단체에서 요구하는 것이고 이집트 정부에서는 아직 반환 요구가 없다.
독일 측의 논리는 일관된다. ▲ 획득 과정이 적법했다, ▲ 이집트의 공식 요구가 없다, ▲ 보존상의 이유로 운송이 불가능하다. 이 세 번째 논리는 특히 흥미롭다. 백 년 전에 올 때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 왜 갑자기 현대의 기술로 안전하게 운송할 수 없다는 것인가?
적법하게 배당받아 이집트 정부의 허가를 받아 베를린에 오게 되었으므로 약탈품과는 전혀 다르다고 주장한다. 대체 남의 나라 유물을 가져오는데 무엇이 적법했다는 것일까? 그때의 상황을 보면 이러하다.
루트비히 보르하르트(1863-1938)는 베를린 출신의 이집트학자였다. 그는 1907년부터 독일동방학회를 대표해 텔 엘-아마르나에서 발굴을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 열강들은 이집트의 고고학적 보물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고고학자들은 나일강 유역을 파헤쳐 발굴한 유물의 절반을 챙겼다. 소위 말하는 분배 프로토콜에 의거했다.
보르하르트의 발굴을 재정 지원한 사람은 제임스 시몬(1851-1932)이었다. 베를린의 유대계 섬유 사업가였던 시몬은 막대한 재산으로 독일의 고고학 발굴을 지원했고, 그 대가로 발견된 유물의 소유권을 얻었다. 독일은 늦게 참여했으나 그 성과는 눈부셨다.
1912년 12월 6일, 보르하르트가 이끄는 발굴팀은 조각가의 작업장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폐허에서 석회암 흉상을 한점 발견했다. 48센티미터 높이의 이 흉상은 놀라울 정도로 보존 상태가 좋았다. 채색이 거의 온전했고, 세부 묘사가 정교했다. 보르하르트는 그날의 감격을 발굴 일지에 이렇게 기록했다. "이루 형언할 수가 없다. 직접 봐야 한다!" 그는 즉시 이것이 네페르티티의 초상임을, 그리고 엄청난 발견임을 알아차렸다.
발견 후 한 달여가 지난 1913년 1월 20일, 카이로에서 유물 분배가 이루어졌다. 당시 이집트는 영국의 보호령이었고,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다. 이집트 정부의 고고학청이 발굴 유물을 검수했다. 절반은 이집트에 남기고 절반은 발굴자에게 넘기는 것이 규정이었다.
분할을 감독한 사람은 프랑스인 귀스타브 르페브르였다. 보르하르트가 제시한 유물 목록에 네페르티티 흉상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의혹이 있다. 보르하르트가 흉상의 중요성을 의도적으로 축소 표현했다는 것이다. 목록에는 흉상이 "석회암으로 만든 한 공주의 채색된 흉상"이라고만 기술되어 있었다. 네페르티티라는 이름도, 왕비라는 신분도 명시되지 않았다. 더구나 흉상의 사진도 매우 어둡고 품질이 나쁜 것으로 제출되어, 실제 아름다움을 알아보기 어려웠다고 전해진다.
일부 연구자들은 보르하르트가 의도적으로 흉상의 가치를 숨겼다고 주장한다. 이집트 측도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것은, 이 흉상의 실물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독일 측, 즉 제임스 시몬의 몫이 되었다. 이집트 고고학청의 반출 허가까지 받았다. 절차에 하자는 없었다.
하지만 이 프로토콜 자체가 식민지 권력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당시 이집트는 주권 국가가 아니었다. 늙은 오스만터기의 영토에 속했고 영국의 보호령이었다. 프랑스인 감독관이 유물 분할을 감독했으며, 독일인이 발굴을 주도했다. 이집트인들 자신은 모든 과정에서 주변인이었다.
이제는 보낼 수 없는

▲베를린이 자랑하는 박물관섬. 고대 이집트, 그리스 등지에서 온 유물로 가득하다.
고정희
그렇게 해서 베를린으로 온 네페르티티 흉상은 1924년 마침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사람들은 3300년 전 여왕의 완벽한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언론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네페르티티는 순식간에 베를린의 아이콘이 되었다.
베를린은 유럽의 다른 오래된 수도들과 달리, 중세나 르네상스의 화려한 유산이 부족했다. 뒤늦게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로 성장한 도시여서 파리나 런던, 비엔나의 문화적 권위에 미치지 못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독일 제국은 문화적 정당성이 필요했다.
페르가몬 제단, 바빌론의 이슈타르 문, 그리고 네페르티티 흉상 같은 고대 문명의 보물들을 베를린으로 가져옴으로써, 고대 문명의 정당한 계승자로 자리매김하려 했다. 사실 네페르티티 흉상을 이집트에 돌려준다면 바빌론의 이슈타르 문도, 터키의 페르가몬 유물도 돌려주는 것이 맞다. 그렇게 되면 베를린의 신박물관은 텅 빌 것이다.
베닌의 황동 장식품은 돌려주면서 네페르티티를 지키는 베를린의 선택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한편 식민지 유산 청산이 얼마나 선택적이고 계산적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 네페르티티와 베를린 시민들과의 관계도 무시할 수는 없다.
베닌의 유품 반환은 모두의 환영을 받았다. 네페르티티는 단 하나뿐이어서 대체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베를린의 얼굴"이라는 정체성이 문제이다. 베를린 시민들이 그사이 그녀를 너무 사랑하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것과 쉽게 작별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네페르티티는 여전히 묻는 것 같다. 언제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고. 베를린 사람들은 말한다. 여기가 그대의 집이라고. 다른 곳에 가면 위험하다고, 여기서 우리가 최고로 안전하게 지켜주겠다고. 이집트 박물관에서 과연 우리처럼 잘 대접하겠느냐고.
그러나 12월은 성찰의 계절이기도 하다. 보낼 수 있는 것과 보내지 못하는 것, 청산된 불의와 청산하지 못하는 불의 사이에서 우기기보다는, 그리고 우리가 이집트보다 낫다고 주장하기보다는 차마 보내지 못하겠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거기서부터 해답을 함께 찾는 것은 어떨까?
12월의 베를린, 어둠 속에서 박물관 조명도 빛나고 성탄절 불빛도 빛난다. 그 빛은 황홀하지만, 그림자는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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