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12 쿠데타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장태완 예비역 육군소장.
이종호
당시 48세였던 전두환은 쿠데타에 걸림돌이 될 게 뻔한 장태완과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을 자신이 사는 서울 연희동의 고급요정에 초대해 놓고 거사를 개시했다. 하지만 동갑내기 장태완은 정승화가 반군에 붙들려 간 지 8분 뒤인 12월 12일 저녁 7시 35분에 요정을 떠나 사령부로 향하면서 정승화 구출 지시를 내렸다.
그런 뒤, 서울 남산 쪽인 필동의 수도경비사령부에 도착한 8시부터 반군 진압을 본격화했다. 전두환의 계략에 휘말려 수렁에 빠질 뻔했던 장태완은 전두환을 응징하는 쪽으로 달려갔다. 장태완이 정변 진압에 나서는 것은 전두환의 시나리오에 없는 일이었다. 생각지 못한 인물의 전면 등장으로 인해 그날 밤에 반군은 여러 번 경악을 해야 했다.
10시 반경, 서대문에서 시청을 향하는 전차들이 땅을 밟으며 굴러가는 소리가 시청에서 약 1킬로미터인 경복궁의 반군 지휘부에까지 들렸다. 1993년 6월 15일 자 <동아일보> 기사 '청와대 근위부대' 제13편은 "쿠데타 지휘부는 이 전차 구르는 소리에 아연실색했다"라고 말한다. "등골이 오싹"해진 노태우(47)는 "장태완이가 정말 탱크를 앞세워 쳐들어오는구나", "우리는 모두 불법 하극상세력으로 체포되고 마는구나"라고 자조했다고 한다.
회고록 <12·12 쿠데타와 나>에 따르면, 장태완은 11시가 조금 넘은 뒤 수경사 장교 60여 명을 모아놓고 전두환 충복인 장세동 수경사 30경비단장 등을 "발견 즉시 체포 또는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그날 밤의 장태완은 반군들의 저승사자였다.
장태완은 결과적으로 민주주의 혁명을 돕는 편에 섰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의도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는 유신독재체제가 선포(1972.10.17.)되기 전인 1971년 1월 1일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고, 1973년 4월부터 1975년 7월까지 수경사 참모장을 지냈다. 유신체제를 지탱하는 군부의 주요 인물이었던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다음 날이자 12·12쿠데타 21주년 전날인 2000년 12월 11일이었다.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이 돼 있었던 장태완은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국가보안법 개정을 강력히 반대했다. 성우회장이 된 정승화도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냉전체제의 허위와 모순을 직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한계들이 있지만, 장태완은 군인의 소명을 성실히 이행한 충직한 인물이다. 군인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전두환·노태우와는 차원이 다른 군인이었다.
박정희의 총애를 받던 군부 비선조직 하나회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정부군 지도부는 우왕좌왕하거나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가운데서도 장태완이 용감하게 상황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기질과 신념 때문이기도 하지만 풍부한 전투 경험에도 기인한다.
경북 칠곡 출신으로 대구상업학교에 다니던 장태완은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육군종합학교 제11기로 입교했다. 그는 19세 때인 그해 12월부터 1953년 7월 휴전 때까지 소대장이나 중대장 역할을 하며 전투 현장의 최일선을 누볐다. 강원도 고성군·인제군을 무대로 하는 향로봉 전투 때는 결사대 장교로 투입돼 고지를 탈환했다. <12·12쿠데타와 나>는 이 일이 신문에 보도돼 부모형제들이 그때서야 그의 생존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그는 1965년 10월부터 1966년 9월까지 맹호부대 부연대장으로 베트남전쟁(월남전쟁)을 경험했다. 한국전쟁 휴전으로부터 12년 뒤에 베트남전을 경험한 군인이 그로부터 13년 뒤에 12·12 쿠데타를 접하게 됐다. 그의 입장에서는 인생 세 번째로 맞이하는 그날 밤의 전쟁이 낯설지 않았을 수도 있다.
장태완이 역사의 '승자'인 이유

▲영화 <서울의 봄> 스틸 컷. 영화 속 이태신(정우성) 수도경비사령관의 실제 모델은 장태완 장군이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전두환은 만약에 대비해 자기 쪽 장군들을 경복궁 내에 집결시켜 두기는 했지만, 장태완 같은 인물들에게 적당히 술을 먹인 뒤 대통령 재가를 받아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는 식으로 쿠데타를 마무리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장태완이 술집을 뛰쳐나와 전차부대를 출동시키고 장세동 사살 명령을 내리는 등의 상황은 전두환이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장태완은 12·12 한 달 전인 11월 16일에 수경사령관이 됐다. <12·12 사건 정승화는 말한다>에 따르면, 정승화가 장태완 육군본부 교육참모부 차장을 수경사령관으로 임명하려 하자 전두환은 이를 반대하며 재고를 요청했다. 두 사람보다 두 살 많은 정승화는 "전두환 장군은 장태완 장군이 자기에게 만만치 않은 상대가 되어 반대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고 회고했다. 제3자가 볼 때도 전두환이 장태완을 상대하는 게 쉽지 않아 보였던 것이다.
막상 장태완이 임명되자, 전두환은 "잘 되었습니다"라며 그만한 적임자는 없다는 식으로 현실을 받아들였다. 전두환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유능한 군인이었던 것이다.
장태완은 전투력을 갖췄을 뿐 아니라 깨어 있는 군인의 면모도 갖췄다. 그는 군대 정보기관이 순수한 군사정보만 수집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정보부대가 민간인 사찰이나 정치에 활용되는 것을 싫어했다.
장태완은 중령 시절인 1964년 7월 5일에 육군대학 단기과정을 졸업했다. 졸업논문은 정보부대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기존의 정보부대들을 해체한 뒤 "모든 정보부대를 통합하여 순수 군사정보지원 업무에만 활용하자"라고 논문에 썼다.
이 때문에 그는 "사상 불순자"로 몰려 베트남전 파견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결국 베트남에 가게 된 것은 채명신 장군으로부터 그의 이야기를 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위의 장태완 회고록에 따르면, "그런 개성이 강한 장교를 전장으로 데려가야지"라는 박정희의 말이 전해지면서 불합격 판정이 취소됐다고 한다.
장태완은 전투 경험이 풍부하고 유능한 데다가 신념과 배짱까지 갖고 있었다. 이런 인물이 12월 12일 밤에 정부군을 사실상 지휘했다. 갑작스러운 정변으로 육군 지도부가 패닉에 빠져든 결과였다.
밤 10시에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을 비롯한 지휘부가 전군 지휘 통신망을 갖춘 육본 벙커를 포기한 채 각자의 승용차를 타고 수경사로 집결한 것은 장태완이 사실상의 참모총장이 됐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이런 인물의 등장으로 인해 전두환은 다음 날 새벽 4시 50분이 돼서야 쿠데타를 끝낼 수 있었다.
장태완은 전두환의 반란을 막지는 못했다. 그래서 새벽 4시 30분에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들어가게 됐다. 하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그는 패자가 아니라 승자다.
장태완이 의도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그는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을 방해하는 반역사적 군사정변에 용감하게 맞섰다. 지금의 한국을 이끌어가는 힘은 그날의 전두환을 비토하는 쪽에 있다. 이 세력은 장태완을 응원하고 있다. 전두환의 입지는 죽은 지 4년이 넘도록 집 밖에 유골을 둘 수 없을 정도로 위축돼 있다.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편에 선 장태완은 군인이 누구의 명령을 듣고 누구를 지켜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일깨워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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