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현재 한국 사회는 1987년과 달리 통일에 대한 생각도, 관심도 다양하게 변하고 있다. 국립평화통일민주교육원이 실시한 2024년 학교 통일교육 실태조사에서 통일의 필요성을 묻는 문항에 대한 전국 초중고 학생들의 응답 결과.
국립통일교육원
한반도와 동북아 질서의 새장을 여는 길
서독의 기본법은 동독이 서독에 편입되는 방식의 통일(제23조)과 동서독이 새로운 헌법을 만드는 방식의 통일(제146조)을 모두 담을 수 있었다. 통일을 염두에 둔 헌법 설계가 돋보인다. 그렇지만 서독은 동독의 국가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동독은 두 개의 국가로 영구적 분리를 추구했다. 빌리 브란트 수상은 동서독의 견해차이를 묶어 낼 수 있는 길을 정치적으로 찾아냈고(그것이 바로 특수관계론이다), 서독의 연방헌법재판소는 그 방향에서 서독내의 헌법적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해석을 만들어 냈다.
그래서 서서갈등을 생산적으로 전환시키면서 동서독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 올릴 수 있는 법적 기반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법적 근거가 만들어졌다고 해서 저절로 동서독 관계가 발전하고, 통일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의 교류와 협력이 쌓이고, 성과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수많은 사건을 이겨내는 과정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아직까지도 통일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묶어줄 공통의 기반을 만드는데 성공하지 못하고 있으며, 북한을 설득할 수 있는 공존의 논리적 근거조차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남남갈등의 생산적 전환이나 남북한의 평화적 공존에 근거한 통일은 불가능하다. 통일을 불가능하게 만들면서 통일을 말하고 있는 이 모순적 상황을 극복하지 않고서 어떻게 평화공존과 통일을 달성해 낼 것인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평화공존을 실질화시킬 수 있는 헌법적 기초를 만들어 내자. 물론 이 말이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통일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평화적 흡수통일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공존형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심지어 평화적 적화통일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무력통일, 전쟁통일을 반대하고, 민주적 공존을 바탕으로 한 통일만은 공통분모로 하자는 것이다. 남한이 북한보다 민주적이면 남한의 정체성이 더 강한 통일이 될 것이고, 북한이 남한보다 더 민주적이라면 북한의 정체성이 더 강한 통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자. 그것을 부인할 필요가 없다. 그 속에서 남한과 북한이 민주주의 경쟁을 하는 것은 허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보수든 진보든 그 정도의 자신감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사실 공존형 통일은 기계적 공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적대적인 남한과 북한을 모두 변화시키는 그런 통일의 길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헌법개정은 특정입장이나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치열한 토론을 통한 조율과 합의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제3조와 제4조를 수정하거나 보완, 혹은 삭제하는 문제들이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다수파를 만들어 소수를 배제시키는 방식으로 헌법을 개정하는 순간 그 소수파는 헌법을 이용해 저항하는 세력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려면 보수와 진보를 포함해 상식적이고 민주적인 압도적 다수가 합의하는 개헌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지금 우리는 헌법적 결단을 토론해야 한다.
서로의 차이를 수준 높게 드러내면서 합의할 수 있는 공동의 기초를 찾아가야 한다. 상대방을 적대시하고 토론을 거부하면서 낡은 것을 고집한다면 우리는 한치의 전진도 이루지 못한다. 남북의 공존을 말하기 이전에 남한내의 공존의 질서를 만들 필요가 있다. 그것이 바로 남북한의 평화공존을 위한 헌법적 결단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다. 제3조와 제4조의 개헌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제3조를 삭제하거나 '통일 후의 영토조항'으로 바꾸고 제4조를 '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통일정책'으로 바꾸는 방식이 가장 바람직해 보인다. 그러나 제3조와 제4조의 기계적 틀은 유지한채 약간의 수정만 하는 것보다는 두 조항을 통합해서 새롭게 구성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본다.
예컨대 제3조를 "대한민국은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영토로 하는 통일국가를 지향한다"로 바꾸고, 제4조를 "대한민국은 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로 바꿀 수도 있고, 제3조, 제4조를 통합해서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한다. 1항 통일국가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영토로 한다. 2항 대한민국은 민주적 기본질서에 바탕을 둔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한다"고 바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내용을 포함한 헌법적 결단을 토론하는 것이다. 그 토론을 통한 합의과정을 북한이 보게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남한도 북한을 잘 알아야 하지만, 북한도 남한을 잘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헌법학과 헌법재판소의 판결에는 '규범조화적 해석'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헌법정신과 가치, 다른 조항과의 관계를 고려한 '해석'을 통해 해결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1992년 남북합의서 비준논란, 1997년과 1998년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헌법해석 등이 있기 때문에 쉽지 않다.
평화공존을 위한 개헌은 남북한의 적대적 갈등만이 아니라 남한 내부의 극단적인 정치 갈등을 전환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새로운 조항을 통해 새로운 해석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할 때이다. 다가오는 미래의 위기를 능동적으로 대면하면서 대한민국과 한반도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 새로운 의지와 전략이 필요하다. 그것은 75년이 넘는 전쟁질서를 극복하는 것이며, 한반도와 동북아 질서의 새장을 여는 것이다. 그 길은 공존과 상생의 길이며, 민주-평화-통일의 길이다.
[필자 소개] 윤영상 :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종사해 왔다. 현재 KAIST 연구교수이며, 칠공화국을 여는사람들 기획실장, 시민개헌넷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