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 집주인"을 강조한 EBS 섬네일(위) 문제를 지적하자 EBS 김유열 사장이 공유된 페이스북 게시물에 댓글로 사과문(아래)을 남겼습니다.
유튜브 / 페이스북
[중국인 집주인과 전세 계약했다가 2억 빚더미 절망한 여자] - EBS
EBS 유튜브 채널에 게시된 프로그램의 섬네일 문구입니다. 영상의 제목은 "무턱대고 계약한 전셋집 하나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사람들│계약도 특약도 의미 없었다…"였지만, 섬네일에서는 유독 '중국인'을 강조했습니다.
영상은 전세 사기를 주제로 다루고 있었으며, 피해자가 계약서상의 근저당권 문제로 전세금을 잃은 경우였습니다. 집주인이 중국인이라서 사기를 당한 게 아니라, 근저당 설정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것이 문제의 본질이었고 집주인이 중국인이었을 뿐입니다. 실제 방송 내용 역시 근저당 확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두 사례를 페이스북에 공유하며, 특정 국가나 민족에 대한 혐오는 위험하며 여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방송사는 더더욱 신중히 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많은 분이 공감해 주셨고, 특히 EBS 관련 글은 공유를 통해 EBS 사장에게까지 전달되었습니다.
다행히 EBS 사장은 "잘못되었습니다. 시정하였고 재발하지 않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인종이나 국적 등으로 차별하면 안 됩니다"라며 사과 댓글을 남겼습니다. 이후 해당 영상의 섬네일 문구는 "2억 빚더미 지옥이 시작됐다. 외국인 집주인과 전세 계약한 결과"로 수정되었습니다.
반면, SBS에는 제 지적이 닿지 않았는지 아니면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건지 모르겠지만 두 달이 지난 지금도 자극적인 제목은 그대로입니다.
'국적'이 사기의 원인?

▲중국인 집주인 한 사람이 84억 원의 보증금을 주지 않았다고 오해하기 좋은 기사 제목. 본문을 보면 전체 외국인 집주인의 전세 보증금 미반환 사례에 대한 내용입니다.
한국경제
["중국인 집주인이 보증금을 안 줘요"…84억 먹튀에 '피눈물'] – <한국경제>
이 기사 제목은 마치 한 명의 중국인 집주인이 84억 원을 가로챈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실상은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은 외국인 임대인 전체가 43명이고, 그 피해 총액이 84억 원이라는 내용입니다. 국적별로 보면 중국인(27명) 외에도 미국(8명), 캐나다(2명), 일본(2명) 등 다양한 국적의 임대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중국인'이라는 키워드만 뽑아내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국토교통부 통계(올해 6월 기준)에 따르면 국내 주택 소유 외국인 중 중국인 비율이 57%로 가장 높습니다. 모수가 많으니 사고 건수가 많은 것은 통계적으로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 국적이 사기의 원인은 아닙니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 통계(2022년~올해 9월)를 보면 전체 전세 보증 사고 3만 3540건 중 외국인 집주인 사고는 103건, 비율로는 0.31%에 불과합니다. 국내 주택 중 외국인 소유 비중(0.53%)보다 낮습니다. 통계적으로만 보면 오히려 외국인 집주인이 더 안전하다고 볼 수도 있는 수치입니다. 그럼에도 언론은 중국인이 만악의 근원인 양 보도하며 혐오를 조장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중국인 때리기'가 본질을 흐린다는 점입니다.
쿠팡 대신 '중국인' 강조하는 언론

▲정보 유출의 원인 중 하나로 "장기 유효 인증키 관리 부실"이 있다는 내용인데, 제목은 중국인 전 직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뉴스1
최근 쿠팡에서 이름, 주소, 전화번호 등 3370만 건에 달하는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전 국민을 불안에 떨게 만든 이 사건에서도 언론의 시선은 엉뚱한 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경찰이 지목한 유력한 용의자가 중국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보도는 일제히 '중국인'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쿠팡 중국인 전 직원이 韓 3400만 명 개인정보 털어간 방법] – 뉴스 1
많은 매체가 이처럼 "중국인 전 직원"을 헤드라인으로 뽑으며, 중국인이 한국인의 정보를 털어갔다는 식의 자극적인 프레임을 씌우고 있습니다. 이번 사태는 범인이 중국인이라서가 아니라, 보안 시스템의 허점을 파고든 범죄자가 쿠팡이 고용한 중국인일 뿐입니다. 하지만 언론이 쿠팡 대신 중국인을 강조하는 사이, 직장인 익명 게시판에 올라온 "쿠팡 내부 IT 인력 절반이 중국인"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글까지 기사화되며 중국인이라서 문제라는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범죄의 원인을 기업의 보안 시스템 부재가 아닌 특정 민족성으로 돌리려는 전형적인 갈라치기이자 혐오 조장입니다. 수천만 명의 개인정보가 탈취된 이 사건의 본질은 보안에 취약한 거대 플랫폼 기업의 관리 부실입니다. 그러나 언론이 중국인 범죄를 부각하는 순간, 쿠팡이 져야 할 무거운 책임은 슬그머니 뒷전으로 밀려나고 대중의 분노는 중국인 전체로 향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는 쿠팡이 현 상황에서 가장 바라는 바일지도 모릅니다.
▲이커머스 1위 업체 쿠팡에서 약 3400만 건에 이르는 대규모 개인정보가 유출된 가운데 4일 서울 시내 한 쿠팡 물류센터에 배송차량이 주차돼 있다. 3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온라인상에서는 '쿠팡 사태' 이후 로그인 시도와 스미싱 등 피해를 봤다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연합뉴스
언제부턴가 우리 언론은 중국과 관련된 소재만 있으면 침소봉대하여 혐오를 팔아 클릭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진실 보도라는 언론의 사명을 저버리는 것일 뿐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가려 우리 사회를 더 큰 위험에 빠뜨리는 해악입니다. 혐오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특정 국적에 대한 무조건적인 손가락질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점검하고 구멍을 메우는 이성적인 태도입니다.
중국인 직원 이슈 뒤에 쿠팡이 숨는다면 이번 사태는 언제든 다시 발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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