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2.03 14:43최종 업데이트 25.12.03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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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15일 당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경제안보담당상이 일본 패전일인 15일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도쿄 지요다구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모습.연합뉴스

일본 자민당 총재선거 일주일 전인 9월 28일, 후지TV 후보자 토론회에 나온 다카이치 사나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전범들을 두둔했다. 그는 살인·포로 학대·약탈 등을 범한 B급 전범과 상급자의 명령에 의해 고문·살인을 범한 C급 전범에 관해 "형이 집행되어 일본 국내에서 더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발언했다.

국제사회는 침략전쟁에 참여했는가 아닌가를 놓고 전범이냐 아니냐를 가리는데, 다카이치는 형기를 마쳤느냐 아니냐를 갖고 전범 여하를 운운했다. 이웃 나라들을 우롱하는 발언이다.

그는 침략전쟁을 기획·개시·수행한 도조 히데키 총리나 기시 노부스케 상공대신 같은 A급 전범도 두둔한다. 3선 경력의 전직 의원일 때인 2005년 5월 23일의 홈페이지 칼럼에서 그는 전범들이 사면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입장을 피력했다.

"점령 종결 직후 일본 국내에서는 A급과 B·C급을 불문하고 전범의 석방을 요구하는 국민 서명이 모여 그 수가 4천만 명에까지 달했다고 들었습니다. 이를 받아들여 국회에서는 모든 전범의 석방·사면을 요구하는 결의를 중의원·참의원 합해 4회나 실시했습니다. 정부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제11조의 '전범의 사면이나 감형은 판결에 참가한 국가의 과반수가 결정한다'는 규정에 따라 관계 국가와 교섭해 사면의 요건을 충족시켰습니다. 거기다가 정부는 '전범을 국내법상의 범죄자로 보지 않는다'는 취지의 통지를 냈습니다."

다카이치는 '전범들이 사면을 받았다'고 명시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관계국들과 교섭했다', '사면 요건이 충족됐다' 같은 우회적 표현을 사용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전범들은 죄 사함을 받았다'는 주장을 개진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야스쿠니신사에서 계속 제사를 받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전범 사면된 것 아니라면서... 야스쿠니신사는 그대로 유지?

그런데 지난 11월 28일 각료회의에서 다카이치 내각은 '전범이 사면된 일이 없다'는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2일자 <도쿄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태평양전쟁의 지도자가 재판을 받은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서 유죄가 된 A급 전범을 두고, 다카이치 사나에 내각은 11월 28일 각의에서 '복역 중인 전범의 사면을 요구하는 국회 결의나 전범의 유족에게 유족연금을 지급하기 위한 법 개정 등'과 관련해 전범을 사면하는 것은 아니라고 명기한 답변서를 결정했다."

다카이치의 칼럼에 언급된 중·참 양원의 사면촉구 결의나 전범 유족에 대한 연금 지급 등이 전범에 대한 사면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일본 정부는 명확히 했다. 그런데 이 답변에 따르면, 그동안 일본은 전범 유족에게도 연금을 지급해 온 나라가 된다. 이런 모순이 생기는데도 일본 정부는 이번 답변서를 채택했다.

전범들이 제사를 받는 야스쿠니신사는 19세기 중반 이후로 일왕을 위한 전쟁들, 특히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가담했다가 전사한 약 246만 명을 추모하는 곳이다. 강화도사건·임오군란·갑신정변 전사자들도 포함돼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일본에 시달린 한중 두 민족이 전범재판을 주도했다면, 246만의 상당수가 전범으로 규정됐을 것이다. 그러나 1941년 이후로 4년간 일본에 시달린 미국이 주도권을 쥐었기에 전범의 숫자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전범재판이 제대로 됐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 재판에 의해 국제적으로 공인된 A급 전범 14명까지 야스쿠니신사의 제사를 받는 현실은 현존 세계질서의 성격을 이상하게 만든다.

1945년 이후의 세계질서는 일본·독일·이탈리아의 전쟁범죄에 대한 반성에 기초해 있다. A급 전범들이 공식 제사를 받는 것은 이 세계질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만약 A급 전범들이 형식적으로라도 사면을 받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지만, 사면도 되지 않은 전범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일본이 이웃 나라들을 얼마나 무시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11월 28일의 내각 결의는, 사면도 받지 못한 전범들이 제사를 받는 야스쿠니신사에 총리가 참배하지 못하게 하겠다거나, 아니면 총리가 개인 명의로라도 공물료를 내지 않도록 막겠다는 후속 조치가 수반돼야 어느 정도라도 의미를 갖는다. 그렇지 않다면, 사면받지 못한 전범들을 야스쿠니신사의 제사 대상에서 분리하는 분사(分祠) 조치라도 있어야 한다.

미국 등이 전범으로 규정한 인물들을 분사하는 조치가 나온다고 해서 이 신사의 반인류적 성격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한국·중국이 볼 때 A급 전범으로 규정될 만한 허다한 인물들이 이 신사에서 제사를 받고 있다.

그렇지만 A급 전범 14명을 분사하느냐 아니냐는 일본이 전쟁범죄에 대해 최소한의 양심을 갖고 있느냐 아니냐를 보여주는 표지다. A급 전범이 사면되지 않았다는 공식 결정을 내렸다면, 이들을 야스쿠니에서 분사하는 조치가 수반돼야 마땅하다.

그런데 다카이치 내각이 그런 수고를 감내하기 위해 이번 결정을 내놓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가타 린타로 무소속 중의원 의원의 질의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답변서를 냈을 뿐, 과거를 반성하는 차원에서 이번 결정을 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중적인 일본의 태도

일본 도쿄 지요다구에 있는 야스쿠니신사wiki commons

44세 때의 칼럼에도 나타나듯이 다카이치는 A급 전범들이 사면받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소신과 충돌하는 정반대 결정을 내놓았다. 내각의 공식 결정과 총리 개인의 소신은 다를 수 있지만, 그가 이번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과거의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2010년 6월 8일에 취임한 민주당 소속의 간 나오토 총리도 같은 해 8월 20일에 참의원 의원의 질의에 답하는 과정에서 이 문제를 다뤘다. 참의원 홈페이지의 질문주의서(質問主義書) 코너에 게시된 나오토 총리의 답변서는 "사면된 자는 없다"라고 한 뒤, 전범 유족을 지원하는 등의 각종 조치는 "전범을 사면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이런 선례가 있기 때문에 다카이치가 이번 결정을 내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공식적으로 전범을 사면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일본 정부는 전범들이 제사를 받는 야스쿠니신사에 총리를 참배시키거나 아니면 총리의 공물료 납부를 묵인했다. 다카이치 칼럼에도 언급됐듯이 일본 정부는 '전범을 국내법상 범죄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국제재판에서 전범으로 규정됐든 아니든 일본 국내적으로는 범죄자 취급을 하지 않겠다는 식의 입장을 내세우며 그들을 비호했던 것이다.

이는 전쟁범죄에 대한 일본 정부의 이중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일본은 미국 등을 의식해 전범을 과감히 사면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전범을 사실상 사면하는 듯이 함으로써 극우세력이 야스쿠니신사에서 전범들을 추모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지금 일본이 해야 할 것은 전범을 공식적으로 사면했는지 아닌지를 재확인해 주는 것이 아니다. 이번 같은 공식 결정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그간의 각종 꼼수가 잘못됐음을 확인하고 전쟁범죄와 전범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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