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일, 서울신인선수권복싱대회에 참가했다.
이현우
'복신이여, 들어오소서!'
드디어 링에 오를 시간이다. 이제는 링 위에 청코너 상대와 홍코너 나 그리고 심판뿐이다. 종이 울리고 1라운드가 시작되었다. 초반에는 몸이 정말 가벼웠다. 평소 연습했던 인 앤 아웃 스텝을 활용하여 가볍게 상대의 거리 안과 밖을 드나들었다. 속임수 잽도 던져주고 상대 공격도 이끌어내면서 빈틈을 찾았다. 매일 연습한 앞 손 잽을 적중시키기도 했다.
격투기에서 '셋업'은 진짜 공격을 성공시키기 위한 일련의 과정인데 쉽게 말해 상대를 속이는 동작이다. 예를 들면 원배(잽 후 바디를 공격하는 동작)를 셋업으로 깔아 두면 상대가 복부 쪽 방어에 신경을 쓴다. 그다음에는 원투로 상대 안면을 적중시키는 것이다. 그냥 원투만 던져서는 절대 상대 안면에 공격이 도달할 수 없다. 이 셋업을 활용해 몇 차례 공격을 적중시켰다.
하지만 나만 열심히 훈련한 건 아닌 게 분명하다. 상대의 속도는 나보다 빠르지 않았지만 다부진 체격과 안정적인 중심에서 나오는 강한 펀치로 나의 중심을 흐트러뜨렸다. 그러던 중 상대의 강력한 스트레이트를 측두부에 몇 차례 허용했다.
역시 만만치 않았다. 헤드기어 보호구를 착용하지 않은 시합은 처음이라 본능적으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힘이 들어가자 발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3분이 흘렀고 기다리던 종이 울렸다. 체육관에서 하던 스파링의 3분과는 밀도가 달랐다. 라운드 사이 1분간 휴식을 취하며 세컨드(다른 스포츠의 코치와 비슷하지만 복싱에서는 가벼운 부상 치료도 하는 보조인)와 응원을 와준 친구들의 지시와 조언도 듣는다.
2라운드부터는 1라운드에서도 잘 통했던 잽을 살려줬다. 왼쪽으로 돌면서 상대의 거리 바깥에서 빠른 속도로 앞 손을 맞춰나갔다. 그러면서도 근접전이 펼쳐지면 피하지 않았다. 자세를 낮춰 중심을 바닥에 깔고서 연타로 받아쳤다.
어느덧 마지막 라운드가 되었다. 마지막 라운드에는 도저히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천근만근 무거워진 다리 때문에 장기였던 속임수 동작조차 힘들었다. 상대는 공격적으로 전진했지만, 나는 백스텝으로 빠지지 못하고 위빙 동작으로 펀치를 피하려다 엉키는 장면이 자주 연출되었다. 위빙 순간에 몇 차례 고개가 숙여졌고 결국 1점 감점받았다. 라운드별 점수제에서 1점 감점은 치명적이다.
3분 3라운드는 정말 지옥 같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 남은 모든 힘을 쥐어짰다. 누군가 다리를 툭 건드리면 풀릴 것만 같은 느낌이었지만, 못질하듯 링 바닥에 두 다리를 박아놓고 안간힘을 써서 주먹을 뻗었다. 머리를 맞대고 접근전을 펼치는 순간에는 체육관에서 관장님과 매일 훈련했던 연타 동작이 자연스럽게 나오기도 했다. 어퍼컷과 바디도 적중시키며 3라운드 후반부는 주도권을 가져온 채로 마무리했다.
3라운드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상대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본능적으로 서로를 안았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죽일 듯 싸웠던 상대와 나는 이제는 서로가 필요했다. 진이 빠져버렸고 기댈 누군가가 필요한데 세컨드는 너무나 멀리 있었기 때문이다. 종소리가 우리 둘 모두를 살렸다. 적이었지만 종이 울린 후 복싱으로 하나가 되는 이 순간을 참 좋아한다. 흘린 땀과 피나는 노력은 서로가 가장 잘 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말 후련했다. 무심코 끝나자마자 관장님께 승패를 떠나 후회 없이 싸웠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제대로 서 있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동안 연습했던 화려한 기술을 맘껏 뽐내진 못했지만 9분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알고 있는 복싱의 전부를 쏟아냈다.
그러나 링 위에 오른 이상 심판에게 붙잡힌 내 손이 들리길 바라는 건 모두 똑같은 마음이지 않겠는가. 판정 시간이 오래 걸렸다. 박빙이었다는 의미일 테다. 심판위원장 주변으로 모든 심판이 모여 회의가 길어졌고 5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내 손이 들리지 않아도 박빙의 시합을 펼쳤다는 것과, 모든 힘을 쏟아냈다고 자부할 정도로 후회와 미련이 없다는 것에 더욱 만족했다. 이땐 정말 진심으로 져도 후회 없다고 생각했다.
링에 오르는 모두는 두려움 이겨낸 무패 복서

▲대진운이 따라 한 경기만 승리하고 1위를 차지했다.
이현우
아마추어선수로 등록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생활체육대회 출전은 어렵다. 생활체육'대회'는 끝났지만 생활체육인으로서 복싱 생활은 지속할 것이다. 복싱의 최종 목표가 챔피언인 이들이 있겠지만, 취미인인 내게는 승리만이 최종 목표는 아니다. 전 UFC(미국의 종합격투기 대회) 김동현 선수는 시합 출전은 즐겁게 운동하는 과정 중 일부일 뿐이라고 말했다. 나 또한 그 생각에 동의한다. 앞으로도 복싱 자체를 즐기고 싶다. 소박한 목표가 있다면 늘 어제보다 강한 내가 되는 게 목표다.
최근 tvN스포츠 <아이엠복서>에 출연한 장혁 배우는 50세다. 은퇴하고도 남을 나이인데 도전하는 이유를 묻자 "그냥 당겼나 보죠"라는 인터뷰를 했다. 복싱은 참 이상한 스포츠다. 끊임없이 도전 정신을 일으킨다. 시합을 준비하면서 눈탱이 밤탱이가 되어보는 경험도 해보고 시합 도중에는 귀, 이마, 볼 곳곳에 상처도 생겼다. 이기니까 좀 덜 아픈 걸까? 아니면 아직 덜 맞은 걸까? 나도 모르게 내년에 어떤 대회에 도전해 볼지 찾아보고 있다.
복싱은 참 매혹적이지만 잔인한 스포츠다. 승자와 패자가 확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느 팀 스포츠와는 달리 개인 스포츠로서 선수가 짊어져야 할 승패의 부담감이 큰 게 사실이다.
어쨌건 두려움 자체를 이겨냈다는 점에서 링 위에 오른 이들은 모두가 승자 아닐까. 일단 두려움을 딛고 링 위에 오른 것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의 대상이 패배 자체일 수도 있고 구체적인 상대일 수도 있고, 맞는 것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세계 챔피언이 아닌 이상 나보다 강한 사람은 어딘가에 존재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승패보다는 도전 자체에 의미를 두려 한다. 특히 도전의 여정 가운데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훈련했다는 것만으로도 선수들 모두가 충분히 박수받을 만하다. 링 위에 오르는 모든 이들은 두려움을 이겨낸 무패 복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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