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2.06 11:17최종 업데이트 25.12.06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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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67년 3월 22일 오후 5시 23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휴전협정을 감독하는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가 열린 이곳에서 액션영화의 한 장면이 벌어졌다.

양측 대표단이 자리를 뜨기 시작한 그 시각, 회의장 뒷문으로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민간인이 있었다. 취재단의 일원인 조선중앙통신 부사장 이수근이었다. 43세인 이 인물은 회의장 바깥의 유엔군 승용차에 접근했다. 뒷문이 열려 있는 차였다.

이수근이 차량에 접근하자, 미군인 톰슨 중령이 누구냐고 물었다. 이수근은 망명하겠다고 답했다. "톰슨 중령은 그대로 발차를 명령했다"라고 다음날 <조선일보>는 보도했다. 이때 북한 경비병들이 달려들더니 차 안으로 팔을 집어넣어 톰슨의 어깨를 잡으려 했다. "이를 뿌리친 채 차는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은 2018년 6월 30일에 김정은과 도널드 트럼프가 악수한 지점을 중심으로 남쪽 관할과 북쪽 관할로 나뉘지만, 당시에는 이 구역 전체가 유엔과 북한의 공동 관할 하에 있었다. 이때는 남쪽 구역에도 북한군 초소가 있었다. 그래서 이수근의 망명이 성공하려면 남쪽 구역 내의 북한군 초소도 통과해야 했다.

톰슨의 어깨를 놓친 북한 병사들은 악을 쓰며 고함을 쳤다. 이 상황은 남쪽으로 3백 미터쯤 떨어진 북한군 초소에 전달됐다. 북한 초소병들은 차단기를 내리고 길을 가로막았다. 위 기사의 보도다.

"이때 차는 차단기를 부수면서 질주했는데 북괴 경비병들이 권총 40여 발을 난사했으나 차체에는 맞지 않았다. 다만, 앞 윈도우가 깨지면서 앞자리에 앉았던 미 공동안전지구부대장 톰슨 중령이 얼굴에 가벼운 상처를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수근(오른쪽)씨의 약혼 사진연합뉴스

이수근의 망명 이유

40여 발의 총알을 피해 한국에 망명한 이수근은 오늘날의 황해남북도 중간쯤이자 38도선 인근인 황해도 서흥군 구포면에서 출생했다. 구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광산 노동자가 된 그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지원병 형식으로 일본제국주의에 강제동원됐다가 8·15 광복 뒤에 상하이에서 귀환했다.

그는 스물세 살 때인 1947년에 북조선노동당 황해도당 학교에서 3개월 과정을 이수하고 해주신문사 당생활과장이 됐다. 북조선노동당이 조선노동당으로 개칭된 이듬해인 1950년에는 이 당의 간부학교에서 또다시 3개월 과정을 이수했다. 그로부터 7년 뒤에 개성신문사 주필이 됐고, 그 후 <노동신문> 기자를 거쳐 1967년에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이 됐다.

북한 언론계에서 승승장구하던 그가 탈북을 결행한 것은 그 자신의 진술에 따르면 숙청 가능성 때문이다. 그해 3월 27일 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그는 2월 8일의 인민군 창설 기념식에 관한 취재 기사를 쓰면서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제대로 강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의 질책을 받았다. 그 뒤 숙청 조짐이 판단돼 3월 22일 오후 4시 30분쯤 판문점의 한국인 유엔사 직원에게 망명 의사를 표시했고, 유엔군 측이 1시간 동안 자신의 망명을 준비하게 됐다는 것이 그의 진술이다.

중앙정보부는 귀순 과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대공수사국장이었던 홍필용 변호사는 1989년 3월호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이수근을 1년간 관찰한 뒤 관계관 회의를 거쳐 위장귀순이 아니라는 결론을 냈다고 증언했다.

이수근의 진의를 확신한 박정희 정권은 파격적인 대우를 베풀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06년 하반기 조사보고서>는 "중정은 이례적으로 이수근을 1967.8.1.부터 7국 1급 판단관으로 대우하여 국민승공 계몽사업에 활용하였고, 이수근에게 군부대 및 산업체를 견학시켰으며 정착금을 지급하고, 우석대 조교수 이강월과 결혼하도록 주선"했다고 기술한다.

이수근이 망명한 1967년 3월이라는 시점은 남한이 북한에 한창 시달릴 때였다. 경제적 우위에 있었던 1960년대 중후반의 북한은 남한을 교란해 남조선혁명을 유발시키는 한편으로 북베트남과 싸우는 미국의 군사력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무장공비들을 대거 파견했다.

<군사> 2014년 제91호에 실린 이윤규 국방대 교수의 논문 '북한의 도발 사례 분석'에 따르면, 무장공비 침투 횟수가 1965년에는 60건, 1966년에는 91건이었다. 남한이 이처럼 시달릴 때에 이북 고위층이 액션영화를 연상시키는 방법으로 북한을 탈출했다. 남한 정부의 자존심을 세워줬으니, 망명 6개월도 안 돼 1급으로 특채하고 맞선까지 알선했던 것이다.

조작된 간첩 사건의 피해자가 돼 억울한 죽음

이수근의 사형 선고 소식을 전하는 1969년 5월 10일자 <경향신문> 1면 기사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그런데 이수근은 얼마 안 가 피로감을 느꼈다. 위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남쪽에도 자유가 없다"고 느끼게 됐다. 특히 표현의 자유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또 독재정치에도 실망감을 품었다. 1968년부터 박 정권의 3선 개헌 조짐이 두드러졌다. 그는 자신이 이북을 과도하게 비판하면 북의 가족이 위험해질 것이라는 염려도 품었다. "근거 없이 김일성을 비난하는 것에 대한 양심상 가책"도 느꼈다고 한다.

이수근의 출생지가 38도선 부근이었기 때문에 그의 친척들은 남한에도 있었다. 그는 본처 김순배의 조카인 29세(1969년 당시)의 배경옥과 함께 제3국 망명을 결행했다. "캄보디아에서 생활하다가 스위스 같은 유럽의 중립국으로" 가보자고 결심한 그는 1969년 1월 27일 위조 여권을 들고 김포공항을 통해 홍콩으로 날아갔다. 그런 뒤 캄보디아로 넘어갔다가 1월 30일에 사이공 공항 기내에서 중정 요원들에게 체포됐다.

배신감에 휩싸인 박 정권은 이수근과의 '첫 만남'을 포함한 모든 것을 거짓으로 몰아갔다. 40여 발의 총알이 날아다닌 판문점 탈출도 다 쇼였다고 규정했다. 그가 처음부터 위장귀순해서 간첩질을 했다는 쪽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증거가 없었다. 그에게서는 간첩의 표식인 암호명이나 난수표도 발견되지 않았다. 중정 대공수사국장이 진술했듯이 1년간이나 조사해봤는데도 수상한 점이 없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므로 이수근을 위장귀순자 겸 이중간첩으로 몰아세우려면 자백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는 그가 변호인의 조력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가혹행위나 강요가 있었고, 이로 인해 허위자백"이 나왔다고 기술한다. 이북 정권의 숙청이 두려워 월남했다는 귀순 당시의 진술을 담은 중정 기록들도 재판 서류에서 제외됐다. 위장귀순이라는 중정과 검찰의 주장에 걸림돌이 되는 증거들은 다 배제됐다.

자백이 유일한 증거이고 그것이 가혹행위나 강요에 의해 나왔을 것으로 보이는데도,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6부는 1969년 5월 10일 이수근과 배경옥에게 국가보안법·반공법 등을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다. 세 명의 합의부 판사 중 어느 하나도 자백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선고 당일 발행된 <경향신문>은 "사형을 선고받은 이(李)는 판결 직후 일심판결에 불복, 서울고등법원에 항소하겠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그런데 항소장은 제출되지 않았다.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서울구치소 교화위원이었던 고중렬은 "구치소 2층에 중정 사무실이 있었고 이수근은 맨 끝 독방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그 수감방 앞에 중정 직원이 앉아서 지켜보고 있었다"라고 증언했다.

항소하지 않은, 혹은 항소하지 못한 이수근은 항소장을 제출한 배경옥의 2심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인 7월 2일에 사형집행을 당했다. 9월 2일부터 서울고등법원에서 항소심 재판을 받은 배경옥은 2심과 3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은 뒤 20년 형으로 감형되어 1989년 12월 22일 출소했다.

배경옥의 신청을 받은 진실화해위원회는 2006년 12월 19일 국가의 사과와 재심 등을 권고했다. 재심을 담당한 서울중앙지방법원은 2018년 10월 11일 유일한 증거인 자백이 증거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고, 검찰의 항소 포기에 따라 무죄가 확정됐다.

이수근의 북한 탈출과 남한 탈출에는 남북 두 정권을 화나게 하거나 배신감을 느끼게 할 만한 요소들이 있다. 그렇다고 이수근에 대한 불법적인 수사와 무리한 사형 집행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이수근에 대한 비상식적인 사법처리는 정권 및 정보부 핵심들의 격한 감정이 검찰의 기소와 법원의 재판에 그대로 영향을 미친 박정희 집권기의 허술한 사법 시스템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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