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근의 사형 선고 소식을 전하는 1969년 5월 10일자 <경향신문> 1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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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수근은 얼마 안 가 피로감을 느꼈다. 위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남쪽에도 자유가 없다"고 느끼게 됐다. 특히 표현의 자유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또 독재정치에도 실망감을 품었다. 1968년부터 박 정권의 3선 개헌 조짐이 두드러졌다. 그는 자신이 이북을 과도하게 비판하면 북의 가족이 위험해질 것이라는 염려도 품었다. "근거 없이 김일성을 비난하는 것에 대한 양심상 가책"도 느꼈다고 한다.
이수근의 출생지가 38도선 부근이었기 때문에 그의 친척들은 남한에도 있었다. 그는 본처 김순배의 조카인 29세(1969년 당시)의 배경옥과 함께 제3국 망명을 결행했다. "캄보디아에서 생활하다가 스위스 같은 유럽의 중립국으로" 가보자고 결심한 그는 1969년 1월 27일 위조 여권을 들고 김포공항을 통해 홍콩으로 날아갔다. 그런 뒤 캄보디아로 넘어갔다가 1월 30일에 사이공 공항 기내에서 중정 요원들에게 체포됐다.
배신감에 휩싸인 박 정권은 이수근과의 '첫 만남'을 포함한 모든 것을 거짓으로 몰아갔다. 40여 발의 총알이 날아다닌 판문점 탈출도 다 쇼였다고 규정했다. 그가 처음부터 위장귀순해서 간첩질을 했다는 쪽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증거가 없었다. 그에게서는 간첩의 표식인 암호명이나 난수표도 발견되지 않았다. 중정 대공수사국장이 진술했듯이 1년간이나 조사해봤는데도 수상한 점이 없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므로 이수근을 위장귀순자 겸 이중간첩으로 몰아세우려면 자백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는 그가 변호인의 조력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가혹행위나 강요가 있었고, 이로 인해 허위자백"이 나왔다고 기술한다. 이북 정권의 숙청이 두려워 월남했다는 귀순 당시의 진술을 담은 중정 기록들도 재판 서류에서 제외됐다. 위장귀순이라는 중정과 검찰의 주장에 걸림돌이 되는 증거들은 다 배제됐다.
자백이 유일한 증거이고 그것이 가혹행위나 강요에 의해 나왔을 것으로 보이는데도,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6부는 1969년 5월 10일 이수근과 배경옥에게 국가보안법·반공법 등을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다. 세 명의 합의부 판사 중 어느 하나도 자백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선고 당일 발행된 <경향신문>은 "사형을 선고받은 이(李)는 판결 직후 일심판결에 불복, 서울고등법원에 항소하겠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그런데 항소장은 제출되지 않았다.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서울구치소 교화위원이었던 고중렬은 "구치소 2층에 중정 사무실이 있었고 이수근은 맨 끝 독방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그 수감방 앞에 중정 직원이 앉아서 지켜보고 있었다"라고 증언했다.
항소하지 않은, 혹은 항소하지 못한 이수근은 항소장을 제출한 배경옥의 2심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인 7월 2일에 사형집행을 당했다. 9월 2일부터 서울고등법원에서 항소심 재판을 받은 배경옥은 2심과 3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은 뒤 20년 형으로 감형되어 1989년 12월 22일 출소했다.
배경옥의 신청을 받은 진실화해위원회는 2006년 12월 19일 국가의 사과와 재심 등을 권고했다. 재심을 담당한 서울중앙지방법원은 2018년 10월 11일 유일한 증거인 자백이 증거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고, 검찰의 항소 포기에 따라 무죄가 확정됐다.
이수근의 북한 탈출과 남한 탈출에는 남북 두 정권을 화나게 하거나 배신감을 느끼게 할 만한 요소들이 있다. 그렇다고 이수근에 대한 불법적인 수사와 무리한 사형 집행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이수근에 대한 비상식적인 사법처리는 정권 및 정보부 핵심들의 격한 감정이 검찰의 기소와 법원의 재판에 그대로 영향을 미친 박정희 집권기의 허술한 사법 시스템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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