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1.30 10:35최종 업데이트 25.11.30 10:35
  • 본문듣기
고문 피해 사실을 주변에 알리지 않고 40년 이상을 지역미술 발전에 공헌한 화가가 있다. 괴암 김주석이 바로 그다.

김주석은 일제 때의 고문 경험을 자서전에 써나갔다. 이 기록은 1993년에 타계한 지 10여 년이 지나서야 발견됐다. 이로 인해 가족과 제자들은 물론이고 세상도 그의 사연을 뒤늦게 알게 됐다. 2020년 광복절의 KBS <황금연못>에서는 사위인 김진태 김주석기념사업회 부회장이 친필 자서전을 공개하는 장면이 방영됐다.

독립운동하다가 극심한 고문 피해 입어

KBS <황금연못>에서 다룬 괴암 김주석 KBS 교양 유튜브 캡처

1927년 8월 22일 김주석이 태어난 곳은 지금의 창원시인 경남 마산부다. 이곳에서 성장한 뒤 경성전기학교(수도공고) 토목과에 다니던 그가 고문을 받게 된 이유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편찬한 <독립운동인명사전>이 들려준다. 한국을 강점한 무쓰히토(메이지)일왕의 생일인 메이지절(명치절)에 벌어진 일이다.

"1942년 11월 교내 명치절 행사 진행 도중 일본인 교관이 민족차별적 언사와 모욕을 행하자, 경성전기학교 재학생들이 해당 교관을 구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헌병대가 사건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경성전기학교 학생 간부와 재학생들을 헌병대로 끌고 갔다. 이때 학급 간부라는 이유로 함께 끌려가 1주일 동안 고초를 겪고, 학교에서는 정학처분을 받았다."

15세의 김주석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의열단장 김원봉과 비슷한 길을 걷게 됐다.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공훈록> 제24권은 김주석이 '국내판 의열단'을 조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943년 1월경 이춘삼·김창석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학우동인회를 결성하였다. 학우동인회는 당시 결사대로 불리기도 했는데, 대장은 이일전이 맡았다. 김주석은 경리를 담당했다고 한다. 이들은 여러 차례의 토론 과정을 거쳐 맹서서(盟誓書)를 작성하고 활동 계획을 수립하였다."

공훈록은 학우동인회가 "고위 관리를 처단하고 일본의 통신군사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권총과 다이너마이트 등 무기를 입수"했다고 알려준다. 이 조직은 김주석을 고이소 구니아키 조선총독 암살 작전에 투입했다. <독립운동인명사전>은 김주석이 "김창석과 함께 조선총독부 관저 탐색에" 나섰다고 알려준다.

하지만 회원 하나가 불심검문에 걸리는 바람에 1944년 1월에 이 조직 구성원들은 검거됐다. 치안유지법(국가보안법) 위반죄 등으로 검거된 김주석은 그해 8월까지 진해 헌병대와 부산형무소에 수감됐다.

17세 나이로 석방된 그는 제대로 걷지 못하는 사람이 됐다. 그는 지팡이에 의존해야만 걸을 수 있었다. 헌병대에서 당한 고문 때문이었다. 그는 "매일 고문에 시달리는 어느날이었다"라며 친일 헌병인 신상묵(시게미쓰 구미오, 重光國雄) 등에게 당한 고문을 기록으로 남겨뒀다.

"중광은 '네 놈을 이제 묻어버려야 하니 순순하게 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창고로 데리고 가더니, 사람이 죽으면 넣는 관에 들어가라고 명했다. 나는 관에 들어갔다. 삽으로 흙 뜨는 소리에 이어 관 뚜껑에 흙 퍼붓는 소리가 계속 났다. 호흡이 점점 거칠고 급해졌으며 질식할 것 같았다. 나는 죽음의 일보 직전까지 갔다. 실신했다. 눈을 떠보니 온몸이 물투성이가 되어 누워 있었다."

김주석을 관에 넣고 흙을 덮어 질식시킨 뒤 물을 부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자행된 고문은 한둘이 아니다. "손톱 끝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는 방법, 손톱 끝에 뚫린 송곳 구멍에 노끈을 넣어 뱅뱅 돌리는 방법" 등등이 김주석의 기록에 담겨 있다.

앞날이 창창한 이 청년은 다른 항일투사가 눈앞에서 죽어가는 장면도 목격했다. 자서전에는 일제헌병이 항일투사의 무릎을 꿇리고 그 위에 의자를 놓은 뒤 "사상 나쁜 놈은 죽여버린다"라며 의자 위에 올라타는 삽화가 그려져 있다. 김주석은 그림 밑에 "2~3분 이내에 전신 충혈로 피를 토하고 쓰러져간 어진 애국청년들의 억울한 모습"이라는 글귀를 달았다.

김주석의 자서전에 담긴 일제 헌병의 고문 모습.괴암김주석기념사업회

일제 지배에 학을 떼게 된 김주석은 열여덟 살 되던 해의 8월 15일에 "소리 높히 만세를" 외쳤다.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항복 선언이 방송된 12시 이전에 해방 소식을 들었다. 그날 오전 밤중에 "대문을 차면서 부락 청년 몇이가 내 집으로 달려"왔다면서 "주석아 이제 살았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순간을 그는 "손가락에 불을 켜어 하늘에 올라갈 기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일제에게 당한 고통, 예술로 승화시킨 어른

이날 그는 해방 이후의 첫 작품을 남겼다. '도화지'는 일장기였다. "나는 제일 먼저, 잃었던 우리나라 국기를 왜놈 국기 위에다 먹칠을 하여서 시급하게 만들어 대문 앞에 게시하고 소리 높히 만세를 외쳤다"고 <자서전>에 썼다.

그 후 그는 일제 지배의 아픔과 상처를 글과 그림에 담았다. <자서전>에도 나타나듯이 그는 일제를 증오했다. 그러면서도 그때의 고통을 입에 담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만 꾸준히 알렸다. 한과 고통을 문학적·예술적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관한 우리 사회의 역사교육은 그때의 시련을 남들이 아닌 우리 자신에게 알리는 과정이다. 김주석의 <자서전> 집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교내 미술대회에서도 상을 많이 탔다. 그림을 구경하러 서울의 전시회에도 가보고 미술 서적도 탐독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경성전기학교 토목과에 진학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그때 못다 이룬 꿈을 해방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펼쳤다. 교원시험과 미술교사시험을 통과한 뒤 마산여중과 제일여중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부터 40년 이상 교원 생활을 하면서, 지팡이를 짚어야 하는 불편한 몸으로 학생 지도뿐 아니라 지역미술 발전에도 기여했다.

2020년에 경남교육청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경남의 역사적 인물 3인'으로 주기철 목사 및 한글학자 이윤재와 더불어 김주석을 추천한 것은 그 때문이다. 경남교육청은 지역미술에 대한 그의 공헌을 그해 4월 10일자 네이버 블로그 글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김주석 선생은 자유상상화라는 장르를 개척했고, 1955년 마산 최초 미술단체 흑마회 창립회원으로 전국 최초로 가두 전시회를 개최하며, 1960년 마산미협 지부장을 맡아 지역미술을 이끌었습니다. 미술 교육자이기도 한 그는 1949년부터 1990년까지 중등 미술교사로 재직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냈습니다. 바로 김주석 선생을 '영원한 미술선생님'이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그가 개척한 자유상상화 기법은 어떤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결심하고 붓을 드는 게 아니라, 붓이 움직이는 대로 그림을 그려 나가는 기법이다. 생각나는 대로 선과 점을 그린 뒤 거기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완성하는 식이다. <미술교육논총> 1997년 제6집에 실린 오창성 마산시 진전초등학교 낙동분교장의 논문 '자유상상화 지도에 관한 연구'는 이렇게 설명한다.

"자유상상화란 글자 그대로 자유롭게 그리는 상상화라는 말로 아무런 부담과 형식·기법에 구애받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내용으로, 의미가 있건 없건 직선이나 곡선을 자유롭게 그린 다음 그 선을 보고 연상되는 그림을 그려가는 과정을 통하여 창의력이나 상상력이 길러질 것이며, 그다음 작업으로 배경을 그리고 장식을 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채색을 하거나 자료를 이고 긁고 뿌리는 등의 활동을 통하여 질료를 이해하고 미적 체험을 할 수 있다."

'뭘 그릴까' 고민하지 않고 그리기에 착수하는 것이 자유상상화 기법이다. 어떻게 글을 쓸까 고민하지 않고, 머릿속의 생각을 곧바로 글로 풀어내는 것과 비슷한 면도 있다.

제자인 화가 전보경은 미술시간을 두려워했던 자신이 그림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김주석의 지도 방식 때문이었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다. 김주석은 학생들에게 "줄 한번 그어보라"라고 한 뒤 "어, 잘하네" "이 선 하나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라며 선과 선에서 연상되는 것을 그리도록 했다고 한다. 그래서 학생들은 다들 미술시간을 기다리게 됐다고 한다.

김주석은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스스로 치유하고 승화시킨 독특한 수도자다. 그는 일제의 만행과 자신의 상처를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고발했다. 그는 글과 그림을 통해 이 일을 수행했다. 글쓰기와 더불어 미술을 통한 이 같은 치유 활동은 그 자신뿐 아니라 제자들과 지역사회 그리고 세상의 미술 발전에도 공헌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