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0일 광주광역시청 시민홀에서 '2025 광주 주민자치·공동체 한마당'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영국과 일본의 주민 자치
그렇다면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자치를 하고 있을까. 영국과 일본은 우리나라 다음으로 지방자치단체 평균 인구가 많지만, 우리와는 견줄 수 없을 만큼 주민 자치가 단단하게 뿌리내렸다. 영국은 준자치단체로 100~1000명 규모의 작은 의회인 패리쉬 의회(Parish Council)를 두고 있고, 일본은 우리의 읍·면에 해당하는 정·촌까지를 지자체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영국 '패리쉬 의회'는 일정 기준을 넘는 주민 요구만 있으면 설립할 수 있는 주민 대표 기구다. 법적 권한과 독립적 예산도 갖추고 있어 준자치단체로 꼽힌다. 유권자 수가 500명 미만인 경우엔 유권자의 37.5% 이상, 500~2500명인 경우는 187명 이상 그리고 2500명을 넘을 경우엔 7.5% 이상의 주민 요구가 필요하다. 의회는 5~15명 정도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보수가 없는 명예직이다.
패리쉬 의회는 오랜 역사를 지닌 지방자치법(Local Government Act)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자치와 책임, 재정과 계획, 의사결정과 집행 권한을 모두 갖추고 있다. 지역 사회의 실질적 운영기구인 셈이다. 주민이 직접 선출한 의원들이 공공예산의 사용처를 결정하고, 법적 효력을 지닌 마을 계획(Neighbourhood Plan)도 세운다. 인구 규모에 따라 주민세 일부를 받는 것은 물론, 따로 세금을 걷거나 기부금·위탁금 등을 스스로 편성·집행할 수도 있다.
'마을 계획' 제도는 2011년 제정된 로컬리즘법(Localism Act)에 따라 도입됐는데, 우리나라의 국토계획·도시기본계획처럼 법적 권한을 갖는 계획을 주민이 직접 수립하고 승인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마을의 미래를 주민이 직접 계획하고 결정하는 '주민 자치'의 진수라 할 만하다.
잉글랜드에만 1만 개의 패리쉬 의회가 운영되고 있고, 특히 농촌 지역에선 어디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패리쉬 의회의 뿌리를 따라가면 중세 초기에 닿는데, 이는 풀뿌리 공동체가 (근대) 국가보다 더 단단하고 질긴 결속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어쩌면 우리나라도 일제강점기나 권위주의 정권 시절을 겪지 않았다면 오랜 자치의 전통이 이어졌을지 모를 일이다.
"시·정·촌은 국가가 만든 단위가 아니다. 원래 존재하던 공동체를 행정이 나중에 규정한 것일 뿐이다. 자치체는 본래 공동체 기반의 자치적 삶에서 출발했다."
일본 나가노현, 인구 5700명의 작은 산촌인 아치무라(촌)에서 네 번이나 촌장을 맡았던 오카니와 카즈오 전 촌장의 말이다. 영국과 일본의 주민 자치는 마치 같은 뿌리에서 뻗어 나온 것처럼 닮았다.
일본은 우리로 치면 읍·면인 정·촌이 자치의 기본 단위다. 한때 7만 개 넘던 정·촌의 수가 정부의 통폐합 정책으로 지금은 1천 개에도 못 미칠 만큼 크게 줄긴 했지만 아직 정·촌을 기반으로 한 주민 자치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헌법을 전면 개정했는데, 핵심은 '전쟁을 포기하고 중앙집권 국가에서 분권 국가로 나아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 헌법과 지방자치법은 지방자치의 핵심 이념으로 '인권 보장'과 더불어 '주민 자치'와 '단체 자치'를 내세우고 있다. 오카니와 전 총장은 "주권에 근거한 주민 자치가 우선이며, 단체 자치는 그것을 지원하는 틀"이라고 했다.
아치무라에선 가을이면 다음 해 예산을 편성하려고 주민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밟는다. 이듬해 봄엔 예산안을 설명하고 조율한 뒤, 결산이 끝나면 자치회마다 결산 내역을 공유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또 주민 학습을 중요하게 여겨 다섯 명 이상만 모이면 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도록 하고 이들에게 10만 엔의 활동비를 지원한다. 이렇게 모인 위원회들은 마을 과제를 발굴하고, 학습과 토론을 거쳐 정책으로 제안할 수 있다. 제안이 받아들여지면 위원회가 실행 책임을 맡기도 한다. 그는 "주민 삶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결정은 주민이 주도해야 한다"는 점을 놓쳐선 안 된다고 했다.
지금 서울·수도권 밖 중소도시와 농산어촌이 겪는 소멸 위기를 극복할 길도 결국 주민 자치에 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목을 매는 대규모 지역 개발 사업이 지역을 되살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난 지금, 지역을 가장 잘 아는 주민 스스로가 지역만의 해법을 찾아가도록 하는 자치가 절실하다.
이재명 정부는 13년째 시범사업에 머물고 있는 주민자치회를 전면적으로 확대·시행하겠다고 여러 번 약속했다. 윤호중 행정안전부 장관도 최근 전국 읍·면·동에 주민 자치 기구를 설치하고 마을 단위 정책 결정권을 부여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겠다고 했다.
벌써 한참 늦었다. 이번엔 이름뿐인 자치가 되지 않도록 과감한 혁신이 이뤄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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