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에 있는 딜리버리 히어로 본사 앞.
EPA/연합뉴스
사건이 알려진 25일 오후 3시에 서울 잠실 배민 본사 앞에는 1000여 명의 배달노동자, 상점주, IT노동자, 플랫폼 노동자들이 모여 배민과 쿠팡을 규탄하는 집회를 개최했습니다. 딜리버리히어로는 지난 2023년과 2024년 2년간 무려 9499억 원을 배민으로부터 가져갔습니다. 한국의 배달노동자, 자영업자들이 열심히 일해 배민에게 돈을 벌어다 주면 딜리버리히어로가 가져가는 겁니다. 배민 서비스를 개선하기 위한 재투자나 배달노동자의 근무조건을 개선시키거나 자영업자 수수료 부담을 줄여주는 데 쓰여야 할 돈이 독일로 사라집니다.
이는 자본가의 윤리에도 벗어나는 행위입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본을 소비하거나 낭비하지 않고 축적하거나 계획적으로 재투자하는 것을 자본가의 윤리라고 설명합니다. 딜리버리히어로에 매각되기 전 배민이 자영업자와 배달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기업을 성장시키는 데 최선을 다했다면, 딜리버리히어로는 배민의 성장보다는 배민이 벌어다 준 돈을 가져가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듯합니다. 마치 봉건시대의 지주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겁니다.
딜리버리히어로는 디지털 지주입니다. 그런데 지주의 마름 역할을 했던 게 바로 배민이 만든 앱인 '브로스'였습니다. 배달노동자가 받는 노동의 대가는 인공지능(AI)이 실시간으로 계산했습니다. 같은 가게 같은 손님에게 배달을 가더라도 1시간 전에는 5000원이었던 게 지금은 2500원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일감을 누구에게 배차하는 것도 AI가 정합니다. 상점주들은 자기 가게가 손님에게 어떻게 노출되는지, 자기 가게 주문이 어떤 라이더들에게 배차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딜리버리히어로는 한국의 배민이 만든 마름을 자신이 만든 '로드러너'라는 앱으로 바꾸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미 '로드러너'를 사용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딜리버리히어로는 원래 한국 요기요의 주인이었습니다. 2020년 7월 딜리버리히어로가 요기요에 로드러너를 도입해 저 역시 로드러너로 일을 해보았습니다.
로드러너는 전세계 공용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구글지도를 이용해 한국 상황에 맞지 않았고, 주소오류, 배달거리 오류 등이 빈번했습니다. 오류들이 생길 때마다 고객센터와 싸워서 주소오류로 발생한 시간낭비와 배달비 정산 오류들을 바로잡아야 했고 대부분은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2021년 8월 딜리버리히어로가 배민을 사기 위해 요기요를 GS리테일 컨소시엄에 매각했지만 자체 앱을 개발하기 전까지 로드러너를 계속 사용해야 했습니다. 요기요는 2022년 1709억 원, 2023년 1187억 원을 수수료 명목으로 딜리버리히어로에 지급했는데, 이중 로드러너 사용료만 약 522억 원으로 추정됩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딜리버리히어로가, 배민에게 기존 앱 대신 로드러너를 사용하게 한 것입니다.
배민은 지난 4월부터 경기도 오산 지역에 로드러너를 시범도입했는데, 로드러너 앱은 개선되지 않았고 상점주들도 피해를 받고 있습니다. 25일 집회에 참석한 자영업자가 그 실태를 증언했습니다.
"배민은 기준도 설명도 없이 주문반경을 4km에서 1km, 심하면 500m까지 줄여버립니다. 매출이 반토막 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수준입니다. 그마저도 사전 안내가 없습니다. 고객님들께서 가게 전화로 '사장님 가게 왜 안 떠요?' 문 닫으신 건가요? 수시로 전화가 옵니다. 저희는 그제야 거리제한을 알게 됩니다." - 이창선 공정한플랫폼을위한사장협회 공동운영위원장
딜리버리히어로가 이렇게 막무가내일 수 있는 것은 플랫폼 산업에 아무런 규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노동법을 준수하지 않아도 되니 AI가 마음대로 배달료를 삭감해도 괜찮습니다. 자영업자의 수수료를 제한할 방법도 가게 노출 시스템을 마음대로 바꾸어도 규제할 방법이 없습니다.
약관 변경도 앱 공지 하나면 됩니다. 약관 변경에 동의하냐고 묻고 라이더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면 앱 접속자체가 안 되게 하면 그만입니다. 플랫폼에서 일하는 자영업자와 라이더에게 중대한 변화인 앱 변경도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노동법 준수 의무가 있는 사업주는 근무조건을 불이익하게 변경하려면 노동자 과반의 동의를 얻어야 하지만, 플랫폼노동자는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라이더, 자영업자, 개발자들의 역사적 연대투쟁... 정부는?

▲지난 25일 오후 3시 서울 송파구 몽촌토성역 인근 배달의민족 본사 앞에서 <배민 '로드러너' 저지 공통투쟁> 집회가 열렸다.
공공운수노조
불안한 건 앱을 만드는 개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배민에서 일하는 IT노동자들은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우아한형제들지회(우아한유니온)을 결성해 딜리버리히어로의 행태를 비판해 왔습니다. 딜리버리히어로가 로드러너를 전면 도입하면, 배민 앱을 개발하고 관리하던 노동자들을 구조조정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25일 집회에 IT노동자들도 참여한 이유입니다.
"해외 기술에 의존하게 되면서 우리의 기술력은 사장되고, 심한 경우 구조조정 압박에 시달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 화섬노조 IT위원회 부위원장 오세윤
라이더, 자영업자, 개발자 배달 플랫폼에서 일하는 세 주체가 한자리에 모인 역사적인 투쟁이 벌어진 겁니다.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는 대리운전기사, 웹툰작가,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들 플랫폼의 행태에 문제인식을 가진 시민들까지 연차를 쓰고 함께 했습니다.
같은 시간 김영훈 고용노동부장관은 '특고·플랫폼·프리랜서 노동자'를 보호하겠다며 타운홀 미팅을 진행했습니다. 노동법 밖 노동자를 위해 '일하는 사람 기본법'을 만들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하는 사람에게 최소한의 보호를 하기 위해서 만든 법이 근로기준법입니다. 최소한 최저임금 이상으로, 노동시간의 기본은 40시간이고, 최소한 연차와 퇴직금은 줘야 한다는 법입니다. 근로기준법 확대적용이 아니라 별도의 법을 만들겠다는 것은 근로기준법보다 못한 보호를 하겠다는 겁니다.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을 가능성이 낮은, 정말로 자유롭게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면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게 있습니다. 가격도, 일감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이 종속적으로 일하지만 형식상 플랫폼 특수고용노동자로 위장된 노동자들을 가려내는 일입니다. 이재명 정부의 국정과제 93번에 있는 근로자추정제도를 먼저 도입하면 됩니다.
현재는 자신이 노동법의 보호를 받아야 할 근로자임을 플랫폼 특고 노동자가 시간과 돈을 들여 노동위원회와 재판을 통해 증명해야 합니다. 근로자추정제도는 이 입증 책임을 사용자에게 돌려 사용자가 입증하지 못하면 노동법을 적용시키는 겁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와 유럽연합 등은 오분류를 막기 위해 '고용관계 추정 및 증명책임 전환'을 입법했습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25일 세상에 알려진 라이더 갑질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이 같은 날 두 가지로 제시되었습니다. 플랫폼 이용자들의 연대로 기존의 노동법을 확대 적용해 플랫폼이 누리고 있는 규제차익을 없애는 것과, 플랫폼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약한 규제인 '일하는 사람 기본법'을 별도로 만드는 겁니다. 두 가지 모두 실현시킬 방법이 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의 약속대로 근로자추정제도를 먼저 도입하고, 그래도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 기본법을 추진하면 됩니다. 25일 배민 앞 거리가 김영훈 장관이 참석했어야 할 '타운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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