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1.27 14:05최종 업데이트 25.11.27 14:05
  • 본문듣기
진주여성민우회 등 단체들이 지난 8월 29일 진주시청 브리핑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모두를 위한 성평등' 강의에 대한 양성평등기금 교부를 취소한 진주시를 규탄했다.윤성효

지난 9월 6일, 경남 진주를 찾았다. 나는 경상국립대에서 열린 '모두를 위한 성평등' 강좌의 강연자 중 한 명으로, '언론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을 주제로 강의하기로 돼 있었다.

학교 정문에서는 '사회적 합의 이루어지지 않은 경상국립대 성평등 특강 즉각 철회하라!'는 붉은 글씨 아래 다섯 명 안팎의 사람들이 특강 반대 집회를 이어가고 있었다. 공개적으로 내 강연을 반대하는 일련의 사람들을 만난 것은 처음이어서, 적잖이 긴장이 됐다. 그러나 정작 강의실 속 분위기는 달랐다. 약 60여 명의 청중들은 되레 젠더 이슈를 취재하는 페미니스트 기자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퀴어 혐오와 페미니즘 백래시(backlash·반동)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함께 치열하게 고민했다. 시작 전의 긴장은, 시간이 흐르며 차츰차츰 녹아내렸다.

'모두를 위한 성평등'을 주최했던 진주여성민우회가 진주시를 상대로 24일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다. 같은 날 경상남도 행정심판위원회에 행정심판도 청구했다. 진주여성민우회는 '2025 모두를 위한 성평등 사업'에 대한 양성평등기금 교부를 진주시가 일방적으로 취소하고, 페미니즘·퀴어·성평등 등의 특정 표현을 이유로 프로그램 변경을 요구한 행위가 중대한 인권침해에 해당한다고 봤다.

진주시는 '모두를 위한 성평등' 강좌를 2025년 양성평등기금 지원사업으로 선정, 보조금 705만 원을 교부했다. 그러나 지난 8월부터 진주시에는 '반동성애'를 표방하며 '성혁명에 반대'한다는 보수 기독교 단체들의 민원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진주여성민우회에 따르면 이때부터 진주시는 강좌에 등장하는 몇몇 표현들에 용어 변경을 요구하고, 이미 선정된 강사의 이력 및 활동 경력 자료 제출을 재차 요구했다.

'모두를 위한 성평등'은 질병, 퀴어, 환경, 언론, 미술, 대중문화, 과학, 법, 남성, 공동체 등 10개의 주제를 페미니즘 관점에서 조망하는 기획으로 꾸려졌다. 학계와 시민단체, 언론계, 대중문화 등에 속한 다양한 연사들이 '젠더'라는 프리즘으로 사회를 다시 읽는 시도였다. 양성평등기금에 선정된 덕분에 무료 행사로 기획돼 시민들이 문턱 없이 들을 수 있는 강연이었고, 그 바람에 강연장을 메운 젠더노소가 서로의 생각을 기탄없이 주고받는 자리도 됐다.

그러나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직전인 8월 28일 진주시는 '사회적 갈등 야기' 및 '공공의 이익 저해'를 사유로 보조금 481만원의 교부 결정을 취소했다. 이틀 전 "민원이 계속되고 있다"며 프로그램의 전체 일정 변경을 공식 요청한 것을 진주여성민우회가 수용하지 않자, 양성평등위원회를 긴급 개최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퀴어영화 상영 제한에 "평등권 침해" 결정 내린 인권위

진주여성민우회의 '모두를 위한 성평등' 강좌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지난 8월 29일 경상국립대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윤성효

지방자치단체가 퀴어와 페미니즘에 관한 민원에 굴복해 보조금을 취소한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진주여성민우회가 대리인단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경남지부와 함께 낸 보도자료에는 인천시가 인천여성영화제의 퀴어영화 상영을 제한하고 보조금 지원을 거부한 사건이 유사 사례로 등장한다.

인권위는 지난해 12월 해당 사건을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평등권을 침해한 차별행위"로 보고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권고한 바 있다. 당시 인천시는 인권위에 제출한 답변에서 "인천여성영화제는 영화를 매개로 일반 시민 대다수가 참여하고 공감할 수 있는 양성평등을 실현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시행하는 사업"이라며 "공적 재원을 집행함에 있어 동성애자 또는 동성애를 지지하는 시민도 존재하지만, 동성애를 반대하거나 더 극소수자인 탈동성애자 시민들이 존재함에 따라 어느 한쪽을 우대, 배제하지 않기 위해 수정을 요청한 것"이라는 답변을 내놨다. 퀴어에 대비되는 '더 극소수자'를 거명하며 어느 한쪽의 편을 '우대'하거나 다른 한쪽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인권위의 판단은 분명했다.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책무가 있으므로, 비록 집단 간 견해 차이로 인한 대립과 갈등이 발생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사회적 소수자가 불합리한 차별과 억압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보호하고 소수자에 대한 불합리한 편견과 혐오를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 "민원 유발을 이유로 퀴어 영화 상영을 불허하는 것은 성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심화시키고 이들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사회적 약자는 불합리한 편견과 혐오에 처한 성소수자들이며,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는데 노력하는 것이 지자체의 책무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해당 사건의 심의에는 현 성평등가족부 장관인 당시 원민경 인권위 비상임위원이 참여했다.

양성평등기금을 향한 백래시

진주지역 여성단체들은 지난 2023년 11월 7일 진주시청 브리핑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여성혐오범죄에 대한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윤성효

문턱이 없는 성평등 강연의 기초가 되었던 양성평등기금은 일선 지자체들에서 자주 백래시를 겪어왔다. 진주가 속한 경남도는 2015년 홍준표 전 경남지사 시절 전국 처음으로 양성평등기금이 폐지됐다가 김경수 전 지사 시절 되살아났다. 2023년 12월 31일부로 성평등기금이 폐지된 경기도는 올해 여성가족기금을 설치했다. 대구시는 2022년 7개 기금을 통폐합했는데, 그중에 양성평등기금도 포함됐다.

'양성'이라는 이름이 표상하는 성별 이분법에도 불구하고, 현시점에서 양성평등기금의 존재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양성평등기본법 상 '양성평등'은 '성별에 따른 차별, 편견, 비하 및 폭력 없이 인권을 동등하게 보장받고 모든 영역에 동등하게 참여하고 대우받는 것'으로 정의되며 '양성'을 넘어선 성평등을 상정한다. 진주시 양성평등 기본조례에 명시된 양성평등기금의 용도도 '성차별·성폭력·가정폭력 방지를 위한 사업'처럼 성불평등 타파에 기여하는 사업 전반의 지원이다.

다행스럽게도 진주시는 지난달 조례 개정을 통해 양성평등기금의 존속 시한을 올해 12월 31일에서 2030년 12월 31일까지 5년 연장했다. 이번에 진주여성민우회가 제기한 인권위 진정과 행정심판 청구는 진주에서 향후 5년간 양성평등기금의 운용 방향을 규정짓는 가늠자가 될 전망이다.

지역 여성단체에 대한 성원이 필요하다

지자체의 양성평등기금에 대한 주목과 더불어 한 가지 환기하고 싶은 것은 지역의 여성단체들에 대한 관심이다. 1997년 6월 창립된 진주여성민우회는 한국여성민우회의 지방 지부 중 처음 생긴 조직이다. 1996년 5월 진주의 한 유치원에서 발생한 성추행 사건에 공동 대응하는 과정에서 설립됐는데, 사회학자 이혜숙은 이를 두고 "비록 지부이기는 하지만 위로부터 결성되었다기 보다는 지역사회를 바탕으로 아래로부터 지부가 결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이혜숙, <지역여성운동과 젠더정치–경상남도를 중심으로>)

진주여성민우회는 2023년 11월 '진주 편의점 여성혐오 폭행 사건' 발생 당시에도 진주 지역의 다른 여성단체와 더불어 "머리가 짧아서, 페미니스트라서 그 어떤 이유로 여성이 폭력 당할 이유는 없다"며 기자회견을 열고 대응에 나섰다. 진주 지역 내 여성혐오, 성차별에 맞닥뜨려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할 수 있는 일을 도모해 왔다.

진주여성민우회는 인권위에 동일한 차별행위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및 관련 공무원 대상 인권교육 실시 권고를, 경남 행정심판위에는 보조금 교부결정 일부 취소 처분의 취소를 요청했다. 여기에 따른 결정은 향후 진주 뿐 아니라 여타 지자체에서 양성평등기금이 운용되는 원리 원칙에 관한 규준이 될뿐더러, 지역 여성단체의 운신의 폭에도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성평등한 사회를 바라는 많은 이들이 이를 주시하고 많은 성원을 보내야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