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16일 1974년 선포된 대통령 긴급조치 1호가 국민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침해해 '위헌'이라는 대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당시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차한성 대법관)는 유신헌법을 비판하고 정부 정책을 비난하는 유언비어를 날조한 혐의(대통령긴급조치·반공법 위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한 오종상씨의 재심에서 일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모든 혐의에 무죄를 선고(파기자판, 破棄自判)하면서 대법관 전원 일치 의견으로 이같이 판결했다.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오종상씨(오른쪽)와 조영선 변호사가 기뻐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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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인 1974년 5월 17일 오전 9시에서 10시 사이, 경기도 평택군 오성면 안중리에서 동쪽 평택읍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일어난 일이다. 오성면 서쪽 현덕면에서 토끼를 사육하는 33세 남성 오종상은 옆자리 여고생들의 대화를 듣게 됐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07년 하반기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학생 중 하나가 "그런 행사에 나가는 게 처음이라 떨린다"라고 말했다. 오종상은 "어디에 가느냐?"고 물어봤다. 학생들이 가는 곳은 평택교육청이 주관하는 웅변대회장이었다.
오종상이 대회 주제가 뭐냐고 묻자, 안일여자종합고등학교(지금의 경기물류고등학교) 3학년 김아무개양은 '반공·근면·저축·수출증대'라고 답했다. 오종상의 귀를 끌어당긴 것은 '저축'이다. 그는 '박영복 은행사기 사건'을 떠올렸다. "박영복 은행사기 사건에서와 같은 사기꾼들을 위해 하는 저축은 필요 없다"라는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박영복 사건은 그해 2월부터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1974년 10대 뉴스를 정리한 12월 27일자 <동아일보> 4면은 육영수 저격사건, 긴급조치 선포, 민청학련사건 등과 더불어 일곱 번째로 박영복 사건을 선정했다.
신문은 "박영복은 74억 원을 8개 은행에서 부정대출 받은 것이 밝혀져 금융부정의 단면을 보여주었다"라며 "이 사건은 대검 특별수사부가 2월 1일 서울 금록통상 대표 박영복(39)과 김용환 상무(54)가 대구 교외에 있는 남의 땅을 서류 위조하여 담보로 제공, 중소기업은행에서 7억 원을 부정대출 받은 혐의로 구속되면서 드러나"라고 설명한다.
박영복이 구속된 지 15일 뒤에 정부는 짜장면값을 80원에서 110원으로 올렸다(2월 16일 자 <매일경제>. 이를 감안하면, 위의 74억 원에 70 정도를 곱해야 현재의 가치를 대략 가늠할 수 있다. "박영복을 모르는 부장검사가 없다"라고 할 정도로 그의 정·관계 네트워크가 두터웠기에 그런 거액을 8개 은행에서 대출받을 수 있었다(4월 26일 자 <동아일보>).
오종상은 아무리 열심히 예금해 봤자 박영복 같은 사기꾼들에게만 좋은 일이 되는 서글픈 현실을 지적했다. "샐러리맨들이 적은 월급에서 한푼 두푼 모아 저축을 하면 그 돈을 정부에서 잘 이용하여 산업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좋겠지만, 어떤 특정 개인이 대출을 받아 소비해 버리는데, 그런 저축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라고 말했다.
말 한마디 했다가 징역 3년
옆자리 학생인 김양은 오종상의 발언 중에 '정부'가 언급되는 것을 지나쳐 듣지 않았다. 그는 33년 뒤인 2007년 7월 21일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때 "그때만 해도 수업 시간에 반정부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을 빨갱이·간첩이라고 배웠어요"라고 진술했다.
웅변대회가 끝난 뒤 김양은 "빨갱이·간첩"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학교 반공교사인 우재현에게 제보했다. 우재현은 오종상을 찾아가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오라고 지시했다. 우재현은 오종상이 박영복 사건을 거론한 것으로는 부족하다 싶었던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민청학련 사건) 관련자가 아닌지도 알아보라고 당부했다. 그해 4월 3일 청와대 대변인이 발표한 청년·학생들의 인민혁명 모의사건과 관련되지 않았는지도 확인해보라고 했던 것이다.
버스에서 대화가 오고간 지 닷새 뒤인 5월 22일, 김양을 비롯한 그 학교 3학년 학생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하는 아산만방조제 준공식에서 새마을노래를 합창했다. 김양은 평택시와 충남 아산시를 잇는 이 방조제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기회에 친구들과 함께 "떡인가를 사서" 오종상의 집을 찾아갔다.
김양은 이때 나눈 대화를 메모해 우재현에게 제출했다. 우재현은 이를 다시 정리한 노트를 들고 중앙정보부로 향했다.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는 우재현이 6월 2일에 중앙정보부(중정)를 방문했다고 알려준다. 이때 제출된 노트에는 "저축과 수출증대 그리고 분식 장려에 대해 비판적 발언"을 한 것들이 적혔다고 보고서는 말한다.
그 노트에 적힌 내용은 중정이 취급할 만한 안보 관련 사안이 아니었다. 교사 우재현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중정은 우재현에게 면박을 주거나 그 노트를 돌려보내거나 하지 않았다. 중정은 반공사건에 맞게끔 노트 내용을 조작했다.
그런 뒤 6월 6일에 오종상을 연행해 일주일간 조사한 뒤 그를 서울구치소에 가두는 한편, 사건을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로 송치했다. 검찰은 7월 18일에 사건을 재판에 넘겼다. 검찰에 송치되고 법원에 기소되기까지 약 한 달 동안, 검찰의 조사는 전혀 없었다. 오종상은 "처음부터 중정에서 수사를 받았고" 검찰에는 가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그런데도 검찰이 기소하고 재판에 참여한 것처럼 관련 서류들에 기재됐다.
법원에 제출된 서류에는 서울시경찰국이 오종상을 체포하고 1차 수사를 했던 것으로 기재됐다. 중정이 체포하고 수사했는데도 서류상으로는 서울시경이 한 것처럼 조작됐던 것이다.
그해 1월 8일 공포된 대통령긴급조치 제2호의 제10조는 "중앙정보부장은 비상군법회의 관할사건의 정보·수사 및 보안 업무를 조정·감독한다"고 규정했다. 중정은 이런 사건을 조정하거나 감독할 수는 있어도 직접 수사할 수는 없었다. 이로 인한 위법 사실을 감추고자 위와 같이 조작했던 것이다. 검찰과 비상보통군법회의·비상고등군법회의·대법원도 이를 몰랐을 수 없는데도, 이에 대한 문제 제기 없이 징역형이 구형되고 1심서 징역 7년, 2심서 징역 3년, 대법원에서 징역 3년이 각각 선고됐다.
조작된 공소장... 고문까지 당한 오종상

▲서울 중구 남산 예장자락 사업 현장의 '기억6'. 과거 이 장소에 있었던 옛 중앙정보부의 지하 고문실을 재현했다. 2021.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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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된 공소장과 판결문에는 오종상이 하지도 않은 발언들이 기재됐다. 판결문에는 "이와 같이 우리나라가 부패돼 있으니 이것이 무슨 민주체제냐?"라며 "유신헌법 체제하에서는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없으니 이런 사회는 차라리 일본에 팔아넘기던가 이북과 합쳐서 나라가 없어지더라도 배불리 먹었으면 좋겠다"라고 발언한 것으로 기재됐다.
'이북과 합쳐져 나라가 없어져라'라고 기원했다는 것은 북한이 주도하는 흡수통일을 지지했다는 말이 된다. 오종상이 남북통일의 희망을 피력한 부분이 이렇게 '적화통일'을 찬양한 것처럼 조작됐던 것이다.
오종상이 세상 현실을 지적한 것은 박정희 정부를 비난한 것으로 과장되고, 이는 다시 김일성을 찬양한 것으로 이상하게 해석됐다. 재판부는 "대한민국 헌법을 비방하고 반국가단체인 북괴 활동을 찬양·고무·동조하여 북괴를 이롭게 하였다"는 죄목을 오종상에게 부과했다.
이런 사건에서 피의자가 신사적인 대우를 받았을 리는 없다. 조선시대 사극에 자주 나오는 주리 틀기 비슷한 고문도 이 사건에 등장했다. 오종상은 "실제 소리인지 녹음기 소리인지는 모르겠는데 사람 비명소리가 간간히 들렸다"라며 중정 조사실에서 겪은 일을 회고했다.
"각목으로 온몸을 마구 때렸는데, 얼굴이고 몸이고 가릴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때렸다. 양 무릎 사이에 각목을 X자 모양으로 끼운 다음 허벅지를 누르고 온몸을 때리기도 했어요. 팔·등·머리 같은 데를 맞아 입도 터져 피투성이가 된 적도 자주 있었다. 나중에는 하도 맞아서 기절까지 했는데, 기절하면 여의사인지 간호사인지 잘 모르겠지만 들어와서 주사를 놔주면 다시 의식을 되찾고 그러고 나서 또 조사를 받다가 부인하면 다시 때리고는 하였다."
그런 식으로 약 일주일 고생한 오종상은 구치소로 보내졌다. 이제야 고문이 끝나는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이 상태에서도 오종상은 중정으로 서너 번 끌려가 지옥 같은 일들을 온종일 겪었다.
박정희 유신체제하에서 긴급조치 위반자라는 죄목을 쓰고 억울한 고난을 당한 국민은 1140명이다. 이 기막힌 이야기는 오종상 한 사람만의 사연이 아니다. 대통령이 툭하면 '반국가세력'을 운운하며 비상계엄이나 긴급조치 발포를 즐기는 나라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상다반사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어이없는 시련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파괴된 오종상은 1975년 2월 10일의 대법원 상고기각에 의해 징역형과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다. 32년 뒤인 2007년 7월 10일 진실화해위원회는 직권조사를 결정했고, 10월 30일 진실규명결정을 내렸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오종상에 대한 불법체포 및 허위 수사뿐 아니라 위헌적인 기소와 재판에 대해서도 국가가 사과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오종상의 재심청구를 받아들인 서울고등법원과 대법원은 2010년에 각각 무죄를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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