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1.24 17:29최종 업데이트 25.11.24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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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 입국장에서 열린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환국 재현' 행사에서 임시정부 요인 후손들이 김민석 국무총리, 우원식 국회의장과 함께 도열한 의장대를 사열하며 입장하고 있다.연합뉴스

임시정부 요인 1진이 환국한 지 80주년인 지난 23일, 김포공항에서 인상적인 행사가 거행됐다. 태극기를 손에 쥔 임시정부(임정) 요인의 후손들이 각군 의장대의 사열을 받으며 입국장에 들어서고, 우원식 국회의장과 김민석 국무총리 등이 꽃목걸이를 걸어주며 환영하는 의식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해 1945년 11월 23일 귀국한 임시정부 1진 15명과 김원봉·조소앙을 비롯해 12월 2일 귀국한 2진 14명은 임시정부 요인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고국 땅을 밟았다. 미국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회의장과 국무총리가 참여한 이번 행사는 독립운동가들이 정부 요인 자격으로 귀국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임시정부 요인 환국은 지지한 미국의 속내

미국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한국 독립운동을 낮게 평가했기 때문은 아니다. 미국이 1943년 12월 1일 중국·영국과 함께 한국 독립을 지지하는 카이로선언을 발표한 것은 임시정부 한국광복군이 미국을 돕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국의 항일투쟁이 국제적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미국은 임시정부 자체만큼은 낮게 평가했다. 3·1운동의 결과로 수립돼 고도의 상징성을 갖고 있다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임시정부의 현실적 역량에 대해서는 다른 시각을 갖고 있었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1942년 이후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국무성은 임정 지도자들이 개인적으로 야심적이며 어느 정도 무책임하다고 생각했으며, 그 지지자의 수가 망명자들 사이에서도 제한되어 있었다고 보았다. 1945년 여름에 이르러 미국은 한국 인민을 진실로 대표한다고 인정할 수 있는 집단을 발견하지 못했다."

독립운동 진영에서 임시정부 지지세력이 제한돼 있다고 1942년 이후의 국무부는 판단했다. 임시정부뿐 아니라 다른 단체도 한국인 전체를 대표하지 못한다고 본 것이다. 한국 독립운동의 역량이 낮다고 평가한 게 아니라 독립운동진영을 대표할 단체가 마땅치 않다는 평가였다. 임시정부의 상징성이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게 미국의 인식이었다.

이처럼 미국이 임시정부를 낮게 평가했기에 그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는 인식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인식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미국의 승인과 지원하에 귀국했다. 이들이 타고 온 비행기도 미군의 C-47 비행기다. 이들을 국내에서 이동시키는 데도 미군 차량이 사용됐다. 개인으로 대우하면서도 실제로는 정부 요인처럼 예우했던 것이다.

임시정부를 낮게 평가하는 국무부의 인식대로라면, 개인 자격으로 입국시켜 예우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도 미국은 임시정부를 예우했다. 이는 국무부의 판단과 미군정의 판단이 절충된 결과였다.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선언 뒤에 한국 땅을 밟은 주한미군은 이곳에서 거대한 장애물을 맞닥트렸다. 한국인들이 중도나 좌파 성향의 독립운동가들을 지지하면서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중심으로 단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건준이 '건국준비'라는 표현을 썼다고 해서 이들이 1919년 대한민국 건국론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건준 참여자들도 3·1운동을 독립국가의 출발점으로 인식했다. 이들은 그때의 희망과 목표에 따라 독립국가의 퍼즐을 맞춰나가고자 했다. 이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건국이었다. 1919년 건국론이 정부수립 당시의 헌법 전문에 반영된 것은 그런 의미의 건국론이 보편적 공감대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한국 민중의 보편적 지지를 받는 건준을 당해낼 세력이 없다는 점에 미군정은 주목했다. 건준의 영향력은 '한국 점령'과 '군정 실시'를 선포한 미군정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미군정의 교묘한 판단

1921년 1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하례회 기념 사진.오마이TV

친일세력과 보수진영이 주도하는 한국민주당(한민당)이 있었지만, 미군정은 이들을 갖고는 건준을 상대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중국에 있는 임시정부다. 본국의 국무부는 임시정부를 낮게 평가했지만, 한국 현장의 미군정은 임시정부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판단했다. <한국전쟁의 기원>은 존 하지 중장을 비롯한 미군정 지도부의 입장을 이렇게 설명한다.

"1945년에 하지와 그의 고문들은 이승만과 김구 같이 한국임시정부와 관련된 한인들은 미국의 노력을 도울 수 있는 대중적 지지와 정통성을 지녔다고 생각하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H. 메릴 베닝호프는 임정 지도자들을 귀국시켜 점령당국의 형식적 지도자들로 만들겠다는 하지의 건의를 상부에 제출했다."

임시정부 지도부를 군정청 간판으로 내세워야 한다는 하지 중장의 건의는 더글라스 맥아더 사령관과 그의 정치 고문인 조지 애치슨의 지지를 받았다. 커밍스에 따르면, 애치슨은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표현을 꼭 사용할 필요는 없다면서 한국인민행정위원회 같은 명칭도 괜찮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 중장이 임시정부에 호의적이 된 데는 육군 전략정보처(OSS)에서 활동한 클라렌스 윔스(Clarence Weems)의 역할도 한몫했다. <한국근현대사연구> 2003년 제25집에 실린 한시준 당시 단국대 교수의 논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환국'은 이렇게 설명한다.

"윔쓰는 선교사의 아들로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말을 잘했고, OSS 대원으로 중국 곤명과 중경에서 활동한 일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광복군이 OSS와 군사합작을 이루어 훈련을 실시할 때 제3지대의 훈련 책임자였던 인물이기도 했다. 9월 28일 제출된 윔쓰의 보고서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에 대해 '명백한 반공주의자, 다른 어떤 나라보다 미국의 영향력을 호의적으로 수용할 것, 한국 독립운동의 신적(神的)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는 한편, 임시정부가 '고위 지도력, 훈련된 기술요원, 다른 한인집단과 공조할 수 있는 능력, 애국투쟁의 상징'을 미군정에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임시정부는 한국 인민을 대표하지 못한다'는 국무부의 판단과 '중도·좌파에 맞서려면 임시정부를 내세워야 한다'는 미군정의 판단이 절충된 것이 '임시정부 요인들을 귀국시키되, 정부 요인 자격만큼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이다. 이것이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의 개인 자격 귀국과 11월 23일 및 12월 2일 임시정부 요인들의 개인 자격 귀국으로 현실화됐다.

미국이 임시정부를 저평가했기에 그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게 된 것이 아니다, 임시정부의 능력을 어느 정도 인정했지만 이들이 한국민 전체를 대표하기는 힘들다는 미국의 판단이 그런 형식의 귀국을 실현시켰다.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을 지지한 미군정의 방침은 남한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환국 직후에 임시정부가 주도한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남한 사회의 반공 분위기 형성에 기여했다. 이는 미국이 그리스와 한반도를 거점으로 유럽 및 아시아의 냉전정책을 전개하는 발판이 됐다.

한편, 임시정부의 법적 권위를 부정한 국무부의 방침은 임시정부의 존립 기반을 약화시키고 친일세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임시정부가 주도하는 반탁운동에 가세한 친일세력은 이 기회를 통해 스스로를 애국세력으로 세탁하고 사회적 발언권을 높였다. 이는 미국이 임시정부를 버리고 친일세력과의 제휴를 한층 강화하는 토대가 됐다.

임시정부의 개인 자격 환국은 미국이 임시정부를 이용해 중도·좌파를 약화시키다가 나중에는 임시정부마저 용도 폐기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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