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1.23 19:07최종 업데이트 25.11.23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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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11일 당시 제주지방경찰청사 앞에서 민갑룡 경찰청장이 과거 제주4·3과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총살 명령에 저항해 수많은 목숨을 구한 고(故) 문형순 전 제주 성산포경찰서장을 추모하는 흉상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경찰은 문 전 서장을 2018년 '올해의 경찰영웅'으로 선정, 제주지방경찰청사에 그의 흉상을 세웠다.연합뉴스

한국전쟁(6·25전쟁) 발발 2개월 뒤인 1950년 8월 30일, 제주도 동북 해안 쪽의 성산포경찰서장은 해병대 정보참모의 명령서를 받았다. '반국가세력'인 예비검속 대상자들을 총살한 뒤에 보고하라는 내용이었다.

개전 사흘 뒤인 6월 28일, 북한군은 한강철교와 한강인도교를 폭파했다. 하지만, 독립군 출신인 김홍일 장군이 한강 이북의 패잔병들을 모아 강 남쪽에서 저항하는 바람에 북한군은 7월 3일에야 한강을 넘었다. 이 때문에 시간을 번 미군 제24사단은 7월 2일 평택·안성에 진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미군이 평택·안성 방어선을 사흘도 지키지 못해 6일에는 이 라인이 뚫렸다.

경찰서장이 된 독립운동가, 주민들을 살리다

이런 상황에서 7월 8일에 전라남도·전라북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전남 소속이었던 제주도(島)는 1946년 8월 1일 제주도(道)로 승격됐기에 이 비상계엄의 적용을 받게 됐다. 성산포경찰서장이 국군의 지시를 받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지시는 거부하기 힘든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권을 반대하는 이들을 '블랙리스트'로 분류했다. 그는 전쟁이 발발하자 이들부터 처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성산포서장이 받은 것은 그런 명령이었다. 53세인 이 경찰서장은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의뢰의 건'이라고 적힌 공문서 상단에 메모를 했다. "부당함으로 불이행"이라는 문구다. 명령을 거부하겠다고 적어넣었던 것이다.

용감한 메모의 주인공은 김홍일처럼 임시정부 한국광복군을 거친 문형순이다. 경찰청이 발행한 <대한민국 경찰정신의 표상: 참경찰 인물열전 2021>은 그의 프로필을 이렇게 정리한다.

"1897년 2월 7일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난 문형순은 문시영·이도일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1908년 4월 안주에 있던 대성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3월 서간도지역 독립군 양성학교인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1920년 9월 한국의용군에 편입되어 시베리아지역으로 이동하였다. 1921년 한국의용군이 고려혁명군으로 재편되자 군 교관으로 복무 후 1929년 5월 만주에 있던 국민부의 중앙호위대장을 지냈다. 광복 직전인 1945년 8월에는 중경 임시정부 광복군에 입대하여 주로 화북지역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예비검속 대상자들을 처형하라는 국군 공문서에 적힌 "부당함으로 불이행"이라는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의 메모.경찰청

22세 때부터 독립운동에 헌신해온 인물이 전쟁 중의 내란행위과 다를 바 없는 일에 동조할 리 없었다. 그는 명령서 작성에 사용된 펜보다 훨씬 두꺼운 펜을 들어 "성산포경찰서장 귀하" 바로 위에 "부당함으로 불이행"을 써넣었다. 불이행(不履行)의 행(行)은 아래로 쭉 그어졌다. 불법 명령을 거부한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는 불법 지시를 거부했다는 물증을 남긴 뒤 학살 명령을 무시했다. 현직 경찰 13명과 역사학자 3명이 연구 혹은 편집에 참여한 위 책은 "그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려 성산포 관내 예비검속자 278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 시기에 제주도 서남부 해안가인 모슬포 쪽에서도 예비검속자들이 대거 처형됐다. 이들 중에서 1957년에 발굴돼 공동묘역에 안장된 132위의 묘는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로 불린다. 신원 불명자가 포함된 시신들을 유족들이 한마음으로 수습하는 상황이 백조일손이라는 글귀에 반영됐다. 이 시기에 아버지 이현필이 제주도 예비검속으로 처형된 재미동포 이도영 박사의 논문 '백조일손지묘가 말하는 전쟁기 제주도 양민학살'(<역사비평> 2000년 제51호)은 이렇게 기술한다.

"한국전쟁 당시 제주도경찰국 산하에는 제주·서귀포·성산포·모슬포 등 4개 경찰서가 있었다. 현재 각 경찰서별로 예비검속 중에 학살된 사람들의 수는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내가 수집한 자료에 의하면 제주 400~500명 이상, 서귀포 250명, 모슬포 250명, 성산포 6명 정도로 추산된다."

성산포에서는 희생자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부당함으로 불이행"에 담긴 문형순 서장의 의지와 서장의 결단을 따라준 경찰관들의 판단이 낳은 결과다.

한국 경찰의 진정한 '어른'

250명이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모슬포는 그 이전에 문형순이 거쳐 간 곳이다. 그가 그곳에 근무할 때는 성산포 때와 비슷한 상황이 일어났다. <2019 경찰백서>는 "문형순 경감은 1948년 4·3사건 당시 모슬포경찰서장서리 재임 중 좌익 혐의를 받던 모슬포 주민들에게 자수를 권유, 100여 명을 훈방시켜 모슬포 주민들을 학살로부터 구해냈"다고 기술한다.

그의 자수 권유는 남북분단을 반대하는 도민들의 항쟁을 막는 것이 아니라, 학살 위기에 처한 그들을 살리는 행동이었다. 제주도립 송악도서관이 발행한 문영택 사단법인 질토래비(역사·문화 단체) 이사장의 <대정 역사 바로 알기>는 4·3항쟁 때 모슬포경찰서 관할권에서 벌어진 일을 이렇게 설명한다.

"1948년 12월 경찰은 남제주군 대정읍 하모리 좌익 총책을 검거하고, 4·3사건에 관련된 백여 명의 좌익명단 서류를 압수하였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이들은 전원 처형될 위기에 놓였으나, 모슬포경찰서 문형순 서장은 조남수 목사와 김남원 민보단장 등과 함께 관련자들이 자수를 하자 전원 훈방하여 100여 명의 주민들이 무사히 귀가케 하였다. 계엄하에 군의 지휘를 받는 입장에서 일개 경위인 지서장이 위와 같은 과감한 결단을 내린 것은 자신의 목숨을 건 것과 다름없는 용단이었다. 모슬포 지역에서는 문형순 지서장이 결단을 내린 이 일을 자수사건이라 부르고 있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서남 해안 쪽의 모슬포 주민 100여 명을 구하고, 한국전쟁 중에는 동북 해안 쪽의 성산포 주민 278명을 구했다. 문형순은 사람 살리는 경찰이었다.

정권의 방침을 무시하고 세상을 살리는 길을 택한 그는 휴전 직후에 퇴직하고 쌀 배급소를 경영했다. 그러나 잘되지 않아 그만두고, 극장 매표원으로 일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그의 의로운 길은 평안도 사람인 그가 제주도에서 존경과 추앙을 받는 이유가 되고 있다. 위의 <참경찰 인물열전 2021>은 이렇게 기술한다.

"제주 4·3평화기념관에서는 예비검속자의 학살을 거부했던 문형순 서장의 의로운 행동을 '의로운 사람들' 코너에서 전시하고 있으며, 경찰청에서는 문형순 경감의 애국애민정신을 널리 알리고 이를 기리기 위해 그를 '2018 올해의 경찰영웅'에 선정하였다. 또 제주청에서는 문형순 서장의 흉상을 설치하는 한편, 매년 그의 묘소를 찾아 주민들과 함께 벌초 및 참배 행사를 열어 그의 숭고한 정신을 추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생존자 고춘원 씨 등 당시 문형순 서장에 의해 죽음의 위기를 면했던 생존자들도 합심하여 2005년 7월 2일 마을 입구(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 동일삼거리 짐개동산)에 '문형순 서장 공덕비'를 건립하여 그의 덕을 기리고 있다."

1966년 6월 20일 6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문형순에게는 후손이 없다. 제사를 지내줄 직계 후손은 없지만, 위와 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감사한 마음으로 그를 추모하고 있다. 그의 무덤은 '일조백손'지묘다.

문형순이 경찰로 재직한 시기는 정치 경찰이 이승만의 폭정을 돕던 때다. 이런 시기에 문형순은 정권의 불법 지시를 거부하는 참경찰의 길을 걸었다. 그는 권력의 도구가 아닌 세상의 도구였다. 한국 경찰의 귀감이 될 만한, 경찰들의 어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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