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건강보험은 국민들의 건강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사회보험 방식에 따른 역진성, 저수가와 행위별 수가 방식 등 약점도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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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렌 소리와 함께 구급대원이 다급하게 외치는 현장. 수십 군데 병원에서조차 응급실 입실 허가를 받지 못해 결국 생명을 잃은 환자. 이런 일이 시골뿐 아니라 대도시, 심지어 세계적 규모의 대형 병원이 몰려 있는 나라에서 매일 벌어진다. 의사를 매년 2000명씩 더 늘려도 필수 분야 의사 부족은 나아지지 않을 것 같다. 이게 바로 세계 10위 경제 대국이라는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지 반년이 지났다. 정부는 쌓여 있는 여러 난제에 대한 개혁을 약속하며 하나씩 과제를 풀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초 가장 어려운 과제로 의료문제를 꼽았던 것처럼, 보건의료 분야는 개혁의 흐름에서 한 발짝 뒤에 서 있는 모습이다.
올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보건의료 분야 통계와 국가별 순위에 따르면, 여러 지표에서 그다지 나아지지 않고 있다. 치솟고 있는 종합 주가와 대조적이다. 평균 수명, 예방 가능 사망률, 암 치료 생존율, 영아 사망률은 분명 나아지고 있지만 삶의 질과 직결된 자살률, 산재 사망률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병의원 이용 횟수와 병상수는 세계 평균의 세 배에 달하지만 인구 대비 의사 수는 절반에 불과하다. 팬데믹의 악몽이 채 가시기도 전 1년 반 동안 지속된, 의대생과 전공의 이탈 사태는 우리 의료 체계의 근본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 글에서는 우리나라 의료 체계가 가진 문제와 그 원인을 간략하게 짚어보고, 더 나은 건강복지사회를 위해 어떤 방향이 필요할지 살펴본다.
보편적 의료 가치 약화
복지의 중요한 한 축인 보건의료는 양보다 질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국민이 건강하게 살고,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국가의 기본 책무다. 국제연합(UN)은 1946년 세계보건기구(WHO) 헌장에서 이를 분명히 했고, 1948년 세계인권선언에서도 의료·보건서비스 접근을 기본권으로 규정했다. 1966년 국제인권규약은 건강권의 기초를 다졌고, 1978년 알마아타 선언(현 카자흐스탄 알마아타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WHO와 유니세프 주도로 '모든 사람에게 건강을'을 목표로 채택된 보건의료 선언)은 보편적 의료의 가치를 명확히 했다.
불문법을 따르는 영미법 계열 일부 국가를 빼고는, 대부분 건강권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대륙법을 따르면서도 보편적 복지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건강권의 헌법 등재가 번번이 무산되어 왔다.
197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확산하면서 건강권 보장을 위한 국가의 역할은 약화되었고, 보건의료분야에서도 민간이 주도하는 흐름이 형성되었다. 한국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공공병원이 도심에서 외곽으로 밀려나고, 법인화와 독립채산제를 강요받았다. 공공의료의 역할이 줄어들고 병원 폐쇄와 매각이 이어졌다. 지금도 여러 이유로 공공병원의 위탁을 시도하고 있다. 경영 효율만을 좇는 신자유주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속도로 전국민건강보험을 달성했고, 이는 국민들의 건강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로 인한 약점도 명백하다.
첫째, 사회보험 방식의 역진성이다. 다른 나라는 총액의 30~50%를 국가 재정으로 보완해 역진성을 줄인다. 우리나라는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고) 법에 명시된 (보험료 예상 수입액의) 20%조차 한 번도 지킨 적이 없다. 이용자 부담에만 기댄 건강보험 재정으론 의료비 보장성이 최하위권을 맴돌기 십상이다.
둘째, 저수가와 행위별 수가 방식이다. 진료 행위의 양과 횟수에 따라 수익이 증대되는 구조다 보니 과잉 진료와 불필요한 비급여 진료가 늘어나고, 엉터리 치료와 비싸고 가치 없는 검사가 남발된다.
셋째, 우리나라의 의료비 중 공공 재정이 차지하는 비중이 60%대에 머무르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공적 보장률이 낮다 보니, 미충족 의료가 늘어나고, 질병으로 인한 가계 파탄도 충분히 막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자본은 의료공급자와 결탁해 민간의료보험(실손보험)을 키웠다. 국민 80%가 실손보험에 가입한 현실은 건강보험의 위상 약화를 의미한다.
넷째, 부실한 의료전달체계다. 지역과 질병의 경중에 따라 이용 경로가 정해지지 않아 병원 이용이 무질서해졌고, 대도시 대형 민간 병원의 급증은 지역과 공공병원의 위축을 불렀다. 관행화한 원정 진료(지역 거주 환자들이 수도권 대형 병원을 찾는 현상)는 환자의 피로 과중과 치료 비용의 낭비로 이어진다.
의사 양성의 실패

▲서울 시내 한 의과대학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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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방과 건강 증진은 삶의 질을 높이고, 의료비를 줄여 사회경제적 효율을 높인다. 그런데 한국의 보건의료는 여전히 시설과 치료 중심이다. 질병이 많을수록 수익이 보장되는 구조다. 예방의학 전공자조차 드물다.
가장 중요한 대목은 의사 양성의 실패다. 의사는 의료의 핵심이자 지휘자다. 근대 의료 도입 이래, 어느 나라든 좋은 의사 양성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전쟁, 정치 격변을 거치면서 우리나라는 의사 부족이 더 심각해졌다. 서구처럼 의과대학이 먼저 생기고 대학병원이 그 뒤를 따른 게 아니라, 성공한 병원 자본이 손쉽게 의사를 확보하고 브랜드를 높이려 미니 의대를 남발했다. 40개 의과대학 중 국립은 10개뿐이다. 교육도 민간 주도라 공공재로서 의사 양성이 어려운 구조다.
의사면허는 사회적 기득권이 되고, 의사 인력 부족은 해소가 어려운 상황이다. 2000년 의약분업 때 의정 갈등 끝에 의대 정원을 10% 줄이기로 한 것이 지금의 인력난으로 이어진 셈이다. 일본은 이미 2008년부터 고령화에 대응해 의대 정원을 늘렸지만 우리는 25년간 늘리지 못했다. 팬데믹 이후 지역과 필수의료 붕괴가 본격화됐다. 인구 대비 의사 수는 OECD 평균의 60%에 불과하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는 외국인 의사 수입 없인 해소가 힘들 지경이다. 배출되는 의사도 필수 분야보다 대도시와 인기 분야로 몰린다.
민간 중심의 상업적 의료 체계에선 공공의료기관 확충이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의료를 산업으로 보고, 공공병원마저 수익을 내야 한다는 압박이 이어진다. 민간병원의 입장에서는 환자가 적은 지역,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해서는 병원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지역과 필수 의료는 국가가 책임져야 하며, 그 수단이 바로 공공병원이다.
팬데믹 당시 민간 병원이 문을 닫을 때, 1%밖에 안 되는 지역 공공병원이 코로나 환자의 80%를 감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공공병원은 더 힘들어지고 있다. 환자는 돌아오지 않고, 인건비 상승으로 재정은 최악이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독립채산과 책임경영만 강조하는 상황이다. 공공병원이 취약해지면 의료 격차가 커진다. 병원이 없는 곳에 사람이 살 수는 없다.
한국은 오랜 기간동안 저수가와 의사 수 억제 정책 덕에 낮은 국민 의료비를 유지해 왔다. 여전히 OECD 평균에 못 미치는 수준이지만, 의료비 증가 속도는 매우 높아 세 배에 달한다. 소득이 늘어도 의료비가 더 빨리 늘어 곧 평균을 넘을 전망이다. 대형 병원 쏠림, 과잉 진료, 비급여 진료는 실손보험과 맞물려 의료비 폭증을 부른다. 국가 재정이 미미한 상황에선 민간 자본의 의료 산업화를 제어할 방법이 없다. 의사 수 확대가 의료비 증가를 가속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는다.
민간 병원은 수익을 기대할 수 없는 곳에는 가지 않는다. 인구가 적은 지역은 물론 응급실, 중환자실 운영, 소아·분만 진료 등은 지역에서 유지하기 어렵다. 극심한 의사 부족이 지역 의료 붕괴의 주원인이다. 커져가는 지역 격차는 지역 소멸을 앞당기고, 국토 균형발전과 자치 분권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가로막는다.
필수 의료가 외면받는 현실은 시민 모두에게 재앙으로 돌아온다. 보건 의료는 이익을 내기 어려운 분야다. 의료 자체가 직접적인 경제 효과보다는 시민의 경제활동을 뒷받침하는 사회 안전망 역할이 크며, 필수 의료 분야는 더욱 그렇다. 병든 이로부터 이익을 추구하는 나라는 없다. 의료를 사익 추구의 대상으로 두면 필수 분야 의사 양성은 더 어려워진다.
재정 지원 없는 저수가 정책은 비급여 확대와 과잉 진료를 허용함으로써 유지되어 왔다. 건강보험 보장성이 늘지 않으면, 민간의료보험(실손보험)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실손보험은 과잉, 부실한 비급여 진료와 결합해 국민건강보험을 약화시키고,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키우지만 보험사는 강력한 로비로 손해율을 만회하고, 국민의료비 폭증을 이끈다.
공공성 회복이 관건

▲김민석 국무총리가 12일 권역응급의료센터 현장점검 차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을 방문, 관련 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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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근대 의료 도입 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시민이 주체가 되어 보건의료 체계를 만들거나 개혁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식민지 통치용 보건의료체계는 해방 이후에도 분단과 정치적 이해관계, 기득권의 저항에 막혀 개혁이 늘 지연됐고, 그 결과는 지역과 필수 의료의 공백이라는 재난을 낳았다. 의료를 수익 산업으로 보는 인식, 거대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로비, 이익집단의 조직적 저항 속에서 시민은 건강의 주체로서 권리를 잃어버렸다.
국가는 국민이 건강하게 살고, 질병을 치료받을 수 있도록 보장할 의무가 있다. 이는 공공보건의료를 통해 가능하다. 대부분의 외국에서 '공공보건의료'라는 말을 굳이 쓰지 않는 건, 보건의료는 당연히 공공재이기 때문이다. 의료기관의 95%를 민간이 운영하고, 의료비 공적 재정 비율이 낮으며, 건강보험 재정 지원도 미미한 한국의 현실은 국가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한다. 수십 년간 정부가 바뀔 때마다 보건의료 개혁을 외쳤고, 늘 공공성 강화를 강조했지만, 커져만 가는 문제는 개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증거다.
국가 보건의료의 공공성을 되찾는 일, 이젠 더는 미룰 수 없는 숙제다. 이전 정부도 의료 개혁을 위해 여러 시도를 했다. 의대 정원 늘리기 같은 문제는 십 수 년 고민 끝에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도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됐던 건, 정작 시민들의 지지를 정책에 제대로 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런저런 핑계도 많고 변화를 이루기 어려운 이유는 차고 넘치지만, 우리가 이 길을 가야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국민 모두가 건강하게 살 권리, 그것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필수공공의료 재원 마련, 국립대 병원 복지부 이관, 공공의대와 지역의사제 같은 굵직한 정책들이 한국 의료 문제 해결의 물꼬를 트길 바란다.
저항도 반대도 어려움도 많을 것이다. 한 세기를 묵힌 숙제가 쉽게 풀리겠는가? 하지만 포기해선 안 된다. 위급한 환자들이 병원을 찾아 헤매고, 새벽부터 서울의 대형 병원을 향해 기차에 몸을 싣는 일이 이제는 정말 사라지길 원하는 시민들이 뒤에 있음을 기억하자.
▲조승연 영월의료원 외과 전문의
본인
필자 소개 : 조승연은 서울대 의대를 나와 충북대 의학대학원에서 외과학 박사를 했습니다. 가천의대교수, 인천적십자병원장, 인천시의료원장을 거쳐 성남시의료원 초대원장을 지냈습니다. 전국지방의료원연합회장으로 일했고 지금은 영월의료원 외과 과장으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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