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가 지난해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 시청사에서 열린 연회에서 수상 소감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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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문화가 세계인들에게 특별한 반향을 일으키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회복, 화해, 위안의 역할을 정확히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한국일까. 이 질문에 대한 본격적인 답을 위해 먼저 지난 세기 동안 다른 문화들이 세계인의 내면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잠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한 시대의 영혼을 이끌던 문화는, 시대가 바뀔 때마다 자리를 옮겨 왔다. 프랑스의 문화사회학자 실비 옥토브르(Sylvie Octobre)와 빈첸초 치켈리(Vincenzo Cicchelli)는 공저<K팝, 소프트파워와 글로벌 문화(K-Pop, soft-power et culture globale, 2022)>에서 한동안 유럽, 특히 프랑스의 문화가 교양과 사유, 미학과 철학을 통해 인간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힘으로 작동해 왔다고 말한다. 예술과 문학, 비평이 인간을 더 깊고 넓은 존재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 곧 '교양으로서의 문화'가 프랑스가 세계에 던진 약속이었다.
전후의 세계에서 문화적 주도권은 점차 미국과 일본으로 이동했다. 영화, 팝 음악, TV와 광고가 결합한 미국식 대중문화는 자유, 기회, 성공, 자기 확장이라는 정동을 전 세계에 퍼뜨렸고, 일본은 만화와 애니메이션, 게임, 이른바 '쿨 재팬' 전략을 통해 비서구권 최초의 팝 컬처 모델을 제시했다.
옥토브르와 치켈리는 미국과 일본의 대중문화가 "미래는 열려 있고, 너도 그 안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감각을 제공했다고분석한다. 프랑스 문화가 인간을 '고양'의 대상으로 보았다면, 미국과 일본의 문화는 인간을 '확장'과 '소비'의 가능성 위에 세운 셈이다.
그러나 산업화와 세계화, 디지털 자본주의가 심화된 오늘의 세계에서, 인간은 더 이상 높이 올라가거나 멀리 나아가라는 약속만으로는 위로 받기 어렵게 되었다. 구조는 거대해졌지만 개인은 더 쉽게 소모되고, 선택지는 늘어났지만 정체성은 더 자주 흔들린다.
이 지점에서 세계는 다시 다른 종류의 문화적 힘을 필요로 하기 시작했고, 옥토브르와 치켈리는 그 공백을 메운 사례로 한국의 K-팝과 한류를 주목한다. 두 학자가 '스위트 파워(Sweet Power)'라고 부르는 것은 프랑스, 미국, 일본이 보여준 모델과는 다른 형태의 영향력이다.
미국의 국제정치학자 조지프 S. 나이(Joseph S. Nye, Jr.)가 제안한 개념인 '소프트 파워'가 국력과 이미지를 매력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타인의 선택과 행동을 바꾸는 힘, 곧 설득과 동의를 이끌어내는 힘이었다면, 스위트 파워는 그보다 더 내밀한 자리에서 작동한다. 국경이나 이념을 넘어, 상처받은 개인들이 어떤 노래와 이야기, 캐릭터와 서사를 매개로 서로를 알아보고 연결되는 과정 자체에 초점을 맞춘 개념이다.
타인을 설득하거나 지배하려는 힘이 아니라, 상처 난 마음을 쓰다듬고 서로를 향해 다시 얼굴을 들게 하는 정동의 힘, 팬덤과 연대를 통해 형성되는 감정적 유대의 힘이 바로 그것이다. 옥토브르와 치켈리는 한국 문화가 이 스위트 파워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대표적 사례라고 읽어낸다.
세계인들에게 한국 문화의 메시지는 "더 올라가라"가 아니라 "쓰러져도 괜찮다, 다시 일어설 수 있다"에 가깝다. 역설적인 것은 정작 한국 사회 안에서는 교육과 직장, 일상 전반에 "넘어지면 안 된다, 항상 더 올라가야 한다"는 채찍의 언어가 깊게 스며 있다는 점이다. 전쟁 같은 경쟁의 전선이 삶을 짓누를수록 한국인들은 그 틈에서라도 잠시 숨을 돌리고 싶어 했고, 바로 그 지점에서 위안과 화해, 회복을 건네는 한국의 노래와 드라마·영화가 한국인에게는 피난처가 됐으며 세계인에게는 위로의 언어가 된 것이다.
한국적 '한'의 구조

▲넷플릭스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한 장면.
넷플릭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서사는 이 구조를 가장 또렷하게 드러낸다. 이 영화에서 악마들은 사람들의 결핍과 상처, 수치심을 먹고 힘을 얻는 존재이고, 혼문은 팬들이 마음을 모아 지켜내는 일종의 보호막이다. 주인공 루미와 진우는 각각 반인반마라는 출생의 비밀과 가족을 버리고 성공을 택한 과거를 안고 살아가며, 끝내 무대 위에서 이 상처들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게 된다.
관객 앞에서 비밀이 폭로되고, 배신과 오해가 뒤엉킨 뒤에도, 이들은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자신의 잘못과 약함을 인정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팬들은 더 이상 우상과 거리를 둔 소비자가 아니라, 함께 노래하며 혼문을 다시 세우는 존재로 등장한다.
악을 물리치는 힘은 경쟁자를 짓밟는 승리에서가 아니라, 상처와 수치심을 고백하고 서로를 지지하는 공연의 순간에서 나온다. 결국 혼문이 빛을 되찾고 무지갯빛 장막으로 다시 서게 되는 결말은 남을 파괴하는 복수가 아니라 고백과 용서, 연대가 악을 봉인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루지 못한 것에서 출발하되, 그것을 타인을 해치는 분노로 바꾸지 않고 스스로를 회복하는 힘으로 전환하려는 정서, 바로 한(恨)의 구조가 그 바탕에 놓여 있다.
흔히 한의 정서를 한국인들만 가진 고유의 정서라고 한다. 일면 수긍이 가는 말이다. 전 세계 어떤 언어로도 한은 번역되기 어렵다. 한자어 恨(hèn)이 중국어에서도 쓰이지만 그 의미는 '증오, 원망, 원한'에 더 가깝다. 일본어에도 '恨み(우라미, urami)'라는 표현이 있지만, 중국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주된 의미는 '원한, 앙심, 섭섭함'에 가깝다. 이와 유사한 개념으로 종종 거론되는 '怨(원, on)'은 일상적 감정에 가까운 恨み보다 훨씬 강한 정서적 긴장을 담으며, 극적 서사나 응징의 뉘앙스가 덧입혀진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영화 <서편제>를 보고 난 뒤 이 문제를 흥미로운 비유로 풀어낸 바 있다. 그는 한국의 '한'과 일본의 '원(怨)'을 비교하면서, 둘 다 이루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감정이지만 풀리는 방식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일본적 '원'은 끝내 복수나 쟁취를 통해 갚아야 하는 빚에 가깝다면, 한국의 '한'은 남을 응징함으로써가 아니라 스스로를 다스리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며 풀어가는 정서라는 것이다.
그는 이를 설화 속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에 빗대어 설명했다. 용궁에 끌려갔다가 간을 빼앗길 위기에 놓인 토끼는 간이 집에 있다고 속여 위기를 모면하고, 다시 육지로 돌아오면서도 거북이에 대한 복수나 응징을 생각하지 않는다. 김대중은 이 토끼를, 남을 해치지 않고도 자신의 위기를 넘어서는 존재로 읽었다. 설화 속 토끼는 원한을 끝까지 붙잡고 복수하는 대신, 자신의 자리를 되찾는 것으로 스스로의 위안을 회복한다.
김대중이 보기에 이것이 바로 한국적 '한'의 구조였다. 풀리지 않은 고통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을 타자를 향한 파괴가 아니라 자기 회복과 삶의 지속으로 전환하는 힘, 그 미묘한 방향 전환이 한국 문화가 세계인의 마음속 결핍과 상처를 건드릴 수 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한'이 한국인에게만 주어진 특이한 감정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우리가 한이라고 부르는 이 감정의 구조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보편적 정서에 더 가깝다. 다만 어떤 문명에서는 이 정서가 언어와 예술을 통해 또렷한 이름과 형식을 부여 받는 반면, 다른 문명에서는 그러지 못한 채 막연한 느낌과 분위기로만 떠돌다가 무의식의 층위에 가라앉아있을 뿐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울 것인가"

▲지난 7일 미국 뉴저지주 이스트러더포드의 아메리칸드림몰에서 열린 한류박람회에서 관람객들이 전시부스를 둘러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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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상실과 실패, 이루지 못한 것들을 안고 산다. '한'의 독특함은 이 보편적 정서를 한국어와 한국 문화가 하나의 이름과 서사 구조로 끌어올렸다는 데 있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말로 붙잡지 못해 무의식 속에 가라앉아 있던 결핍의 감정을, 한국은 한이라는 언어와 판소리와 민요,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오늘날의 K-팝과 애니메이션을 통해 외현적인 문화 형태로 조직해낸 것이다.
세계인이 한국 문화에 열광하는 광경은, 단지 이국적인 취향을 소비하는 장면이 아니라 각자의 내면에 숨어 있던 미완과 상실의 정서가 한국의 노래와 이야기, 장면을 통해 자극되고 이름을 얻는 순간이기도 하다. 한국이 길들여온 이 정서의 언어가 인류 보편의 무의식을 두드리고, 그 무의식은 다시 한국 문화를 향해 응답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한류가 언제까지 버틸까"가 아니다. 이미 한국 문화는 세계인의 마음에서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문화의 본래 기능, 자아를 찾고, 위안과 화합을 얻는 자리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차트의 순위보다 중요한 것은, 쓰러진 사람에게 "다시 서 보자"고 말해 줄 언어를 우리가 얼마나 오래, 얼마나 진실하게 유지하느냐이다.
앞으로의 과제도 단순하다. ▲ 한국인의 집요한 훈련이 만든 높은 테크닉 ▲ 판소리와 설화, 민요와 영화로 이어지는 깊은 감정의 유산 ▲ 그리고 이를 오늘의 감각으로 재조립하는 제작 능력, 이 세 가지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세계가 기대하는 스위트 파워는 전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이 힘을 더 치밀하게, 더 정직하게 작품 속에 구현해 내는 능력에 달려 있다.
<골든>의 한 소절, 혼문이 다시 빛을 되찾는 한 장면 안에 이미 답이 들어 있다. 남을 짓밟는 승리가 아니라, 상처를 드러내고도 서로를 향해 고개를 드는 선택. 한국 문화가 세계 무대에서 지켜야 할 것은 바로 이 장면이다. 이 장면을 잃지 않는다면, 한류의 문제는 "언제 끝날 것인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인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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