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9월 10일 자 <경향신문> 기사 "전 교수 등 25년 암약 간첩망 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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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연고선 공작이 끝난 뒤인 1982년 9월 10일,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는 송씨 일가 28명(일부 보도에는 29명)을 고정간첩단으로 발표했다. 이날과 다음날의 신문 1면에는 '고정간첩단 28명 검거' 등의 기사가 실렸다. 이른바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의 대대적 보도였다.
그날 <경향신문> 톱기사는 "국가안전기획부는 거물급 북괴 남파간첩인 노동당 연락부 부부장 송창섭(62·재북)에 포섭돼 입북, 간첩교육을 받고 25년간이나 서울과 충북을 거점으로 암약해온 고정간첩단 29명을 적발, 이 중 간첩 7명과 방조자 5명 등 12명을 구속, 검찰에 송치하고, 4명을 불구속 송치했으며, 나머지 13명은 개전의 정이 뚜렷해 훈계 방면했다"라며 그 일가의 이름을 열거했다.
"구속된 간첩 7명은 송지섭(59·전 군 헌병기관 문관), 송기준(54·대진화학 대표), 송기섭(58·전 서울시 공무원), 한광수(69·전 이화여대 음대 교수), 송기복(40·여·신광여중 교사), 송기홍(37·신림미술학원장)·송기수(35·척추교정사) 등 송창섭의 자녀·친족 등으로 정계·교육계·경제계·군부 및 학원과 국가기관 등에 깊이 침투, 조직적으로 활동을 해왔다."
안기부는 1957년 5월부터 1977년 2월까지 8차례 남파된 송창섭이 각 분야의 친척들을 점조직으로 묶은 뒤 정보를 수집하고, 서울 시내 4개 대학에 재학 중인 자녀들을 통해 대학가 동향을 파악하고 유언비어를 유포했다고 발표했다.
또 공작금 1억 8천만 원이 북에서 지급됐고, 서울 명동·충무로·종로5가 등의 암달러상·광고회사·택시회사 등의 위장업체 수입이 이들의 활동비가 됐다고 발표했다. 덕분에 송창섭 같은 남파간첩들이 이남에 잠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 안기부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그것은 모두 거짓이었다. 송창섭의 남파 횟수도 마찬가지다. 위원회 조사 결과를 담은 위 국정원 보고서는 "입증 가능한 것은 오직 1960년의 2차 남파뿐"이라고 지적한다.
국정원의 내부 자료가 그것을 증명한다. 국정원 보고서는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 발표 후에 작성된 <흑룡공작철>에 송창섭의 1차, 2차 남파만 기록되어 있고, 1968년에는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탄광으로 좌천되었다고 기록돼" 있음을 알려준다.
송창섭 남파에 관한 안기부 발표는 물증이 아닌 진술과 증언에 기초했다. 그런데 진술은 고문과 강요에 의한 허위자백이었고, 증언은 법정에 내놓기에 너무 허술했다.
일례로, 송창섭이 1977년에 부인 한경희를 만났다는 부분은 한경희의 암달러가게 직원인 김건주의 증언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런데 김건주는 '사장님이 가게 인근의 성보다방에서 50대 중년 남자를 만나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을 뿐이다. 그 남자가 북에서 내려온 전 남편일 것이라는 부분은 안기부의 상상이다.
가혹행위로 허위자백 받아낸 불법 수사

▲2007년 10월 24일 국가정보원 진실위원회가 "안기부가 주도하고 사법부가 협력한 대표적인 반인권적 간첩조작사건이었다"고 최종 결론 낸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을 보도한 MBC 뉴스 화면.
MBC
송창섭이 1960년 이후에도 꾸준히 남파돼 자금도 제공하고 지시도 내렸어야 이 사건의 공소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1960년을 제외하고는 그런 일이 없었다.
송씨 일가는 1963년부터 사찰을 받았다. 1960년에 간첩 지령을 받았다면 이 가족들이 헌병대에 들어가고 기업체를 차리고 서울시 공무원이 되고 대학교수가 되는 일은 냉전주의 분위기 속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1960년 이후로 20년 넘게 공안기관이 이들을 그냥 감시만 한 것은 1960년의 만남이 단순한 가족상봉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1982년의 수사는 말 그대로 억지였다. 가혹행위를 동원해 허위자백을 받아낸 엉터리 불법 수사였다. 위 보고서에 따르면, 신광여중 교사인 40세의 장녀 송기복은 안기부 밀실에서 116일간 구금된 상태에서 "무차별적인 온몸 구타, 손바닥·발바닥 등 특정 부위 때리기, 물고문, 거꾸로 매달기, 고압전구 노려보기, 손가락 사이에 각목 끼우기" 등의 고문을 받았다.
송씨 일가는 검찰 수사 과정에서 가혹행위를 폭로했지만 검사는 무시했다. 심지어 검사가 조사하는 동안 안기부 수사관들이 피의자들을 접견했다. 검사는 수사관들에게 피의자 진술 내용을 알려줬고, 수사관들은 왜 검사 앞에서 딴소리하느냐며 피의자들을 압박했다.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에 대해 법적 효력을 부여하기 힘든 상황이 있었던 것이다.
상고심을 맡은 대법원은 가혹행위 폭로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무죄를 선고한 뒤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돌려보냈다. 그러나 서울고법은 유죄를 선고했고, 사건은 다시 대법원에 갔다. 대법원은 재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하고 다시 환송했다. 서울고법은 또다시 유죄를 선고했다. 결국 대법원은 재재상고심에서 서울고법에 무릎을 꿇었다. 이때가 1984년 11월 27일이다.
이렇게 덮인 사건의 진실은 2007년부터 공식적으로 밝혀졌다. 재심을 맡은 문제의 서울고법은 태도를 바꿨고 검찰은 불복을 포기했다. 사법정책연구원의 <형사재심의 현황과 운용 방안에 관한 연구>는 사건의 결말을 이렇게 정리한다.
"국가정보원 과거사위원회는 사건 발행 후 25년 만인 2007.10. '안기부가 대법관 인사 등을 대가로 재판 과정에 개입했고 법원이 이에 적극 협력했다'라고 발표했다. 피고인 8명은 2008.1.7. 서울고등법원에 재심을 신청하였고, 서울고등법원은 2009.2.12. 형사소송법 제422조, 제420조 제7호의 재심 사유를 인정하여 재심개시결정을 하였고, 2009.8.28. 이 사건의 가장 유력한 증거이자 유일한 증거인 피고인들의 자백이 수사기관의 불법구금과 고문에 의한 것임이 명백한 이상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보아 8명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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