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1.16 11:16최종 업데이트 25.11.16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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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권 시기의 경제개발에서는 특징적인 인구 현상이 나타났다. 농촌 주민들이 서울로 밀물처럼 대거 이동했다가 서울 도심 밖이나 근교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썰물은 그들의 고향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들 상당수 혹은 대부분은 오래도록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들은 국가와 대기업의 필요에 의해 서울 공장에 취직했다. 국가는 주요 기업에 특혜성 지원을 제공하고, 대기업들은 고향 지인을 데려올 것을 노동자들에게 권장했다. 그렇게 서울 공장으로 유입된 농촌 주민들은 값싼 임금을 받고 장시간 노동에 종사했다.

국가는 이 인구이동에 직간접으로 개입하고 그 결과로 재정수입을 얻었다. 하지만 대규모 인구이동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서민 주택문제에는 성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농촌 주민들이 빈 땅에 판자촌을 세우는 것을 묵인했을 뿐이다.

1971년 2월 25일 자 <경향신문>은 "70년 10월 1일 현재 서울 시내에는 18만 7천 5백 54채의 판잣집이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면서 "평균 1채당 2.5가구가 살고 1가구당 5명으로 추산하면, 판잣집 인구는 약 2백 18만 명"이라고 보도했다.

<서울연구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1970년의 서울 인구는 543만 3198명이다. 서울 인구의 약 40%가 판잣집에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됐으니, 당시의 판잣집 문제는 빈민 문제가 아니라 서울시민 일반의 문제였다.

그런데 국가는 판자촌을 묵인하다가도 기업과 연대해 폭력적 철거를 방관하거나 아니면 경찰력을 동원해 지원했다. 1970년대만 해도 서울 시민의 약 40%가 이런 폭력의 위험성에 노출돼 있었다.

그래서 당시 서울 사람들 사이에는 불안감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시기에 판자촌 주민들과의 연대를 위해 인생을 건 인물이 있었다. 본명은 존 빈센트 데일리(John Vincent Daly, 1935~2014)이지만 정일우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알려진 예수회 신부가 그 주인공이다.

청계천 판자촌에서 제정구와 빈민운동

김동원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내 친구 정일우>(2017)푸른영상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위치한 예수회 중서부관구의 홈페이지에 따르면, 아일랜드계인 정일우는 일리노이주 필로에서 출생했다. 고등학생 때 예수회를 접했다가 졸업 후인 1953년에 18세 나이로 입교한 그는 세인트스타니슬라우스대학·세인트루이스대학·세인트메리칼리지에서 예수회 정규과정을 이수했다. 사제 서품을 받은 것은 31세 때인 1966년이다.

그는 입교 당시에는 일리노이주와 서남쪽으로 접한 미주리관구에 속했다. 그랬다가 1955년에 일리노이주와 북쪽으로 접한 위스콘신관구가 창설되면서 그곳 소속이 됐다. 이것이 그를 한국과 매개해 준 공식적 인연이다. 위 홈페이지는 "초창기의 한국 선교가 1년 된 위스콘신관구에 위탁된 때부터" 정일우의 선교가 한국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고 알려준다.

그가 한국에 온 것은 장면 내각이 들어선 다음 달인 1960년 9월이다. 25세 나이로 한국 땅을 밟은 그는 3년 뒤 돌아가 세인트루이스대학에서 공부하고, 사제서품을 받은 이듬해인 1967년에 돌아왔다. 32세인 이때부터 서강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한국 선교에 나섰다.

예수회가 그를 파견한 것은 당연히 교세 확장을 위해서다. 위 글은 그가 한국 예수교의 위상을 증대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평한다. 이런 선교 문제와 더불어 그가 심혈을 기울인 또 다른 과제는 경제개발에서 소외된 도시 빈민 문제다.

정일우는 선교활동만으로는 그것을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서울연구원장을 지낸 김수현 세종대 교수의 <가난이 사는 집: 판자촌의 삶과 죽음>은 "서강대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예수회 수련장으로 일하고 있던 그는 자신이 '복음을 입으로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이에 1973년 예수회 수련장에서 물러나 청계천 판자촌에서 평생 동지였던 제정구와 처음 만났다"고 기술한다.

복음을 몸으로 실천해야겠다고 결심하고 판자촌에 들어간 38세의 정일우는 유신체제 반대투쟁으로 서울대에서 제적된 아홉 살 연하의 제정구(1944~1999)를 만나 빈민운동을 함께했다. 정일우는 제정구와 함께 판자촌 주민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면서 그들의 권익을 위해 싸웠다.

정일우는 1970년대 후반의 서울 양평동 판자촌 철거 현장은 물론이고 1980년 중반의 서울 목동 철거 현장 등에도 등장했다. 학생운동권 및 민주화 세력이 가세한 목동 투쟁에서는 철거민 운동이 한 단계 도약하는 성과가 도출됐다. <서울학연구> 1999년 제13호에 실린 위 김수현 교수의 논문 '서울시 철거민운동사 연구'는 목동 철거민 투쟁이 "1980년대적인 철거민운동의 전형"이었다고 평한 뒤 이렇게 설명한다.

"주민들은 초기에는 막연히 적정 보상을 요구했으나, 반대운동이 지속되어가면서 아파트 입주권이나 대토, 임대아파트 등으로 그 요구가 구체화·다양화되었다. 또 목동에서는 최초로 세입자 대책 문제가 등장했으며, 세입자에게도 보상해야 한다는 선례를 남기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아직 영구임대주택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세입자에게도 장기임대아파트를 제공하게 된다."

철거민들이 겪은 고통에 비하면 위와 같은 보상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한적이나마 성과를 거둔 것은 그들의 투쟁과 더불어 협력자들의 연대 때문이다. 위 논문은 "목동에서는 학생이나 종교계가 본격적으로 주민들과 연대"했다고 말한다. 정일우 같은 종교인들도 인상적인 투쟁을 벌였다.

소외된 사람들과 생사고락 함께한 성자

빈민운동 대부 '파란눈의 신부' 정일우 신부제정구기념사업회

정일우는 서울 상계동에서도 헌신적으로 싸웠다. 그와 동지들의 노력은 종교계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1987년 4월 14일 자 <동아일보>는 "미국인 정일우 신부와 제정구 씨, 손인숙 수녀 등은 지난해 6월부터 이곳 상계동 철거지역 내 폐허 위에 비닐천막을 치고 목회활동과 봉사활동을 전개해왔다"고 전했다.

그곳 철거 현장 한복판에 십자가와 함께 세워진 10평 남짓한 비닐천막은 천막성당 겸 천막교회였다. 1986년 12월 23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오전 11시에는 가톨릭 미사, 오후 8시에는 개신교 예배가 거행됐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낮에 철거반원들과 싸우느라 육체적으로 지친 주민들에게는 종교의식을 많이 갖는 게 힘이 됐다고 한다.

정일우는 그 천막 바로 옆에 1인용 텐트를 치고 기거했다. 김수환 추기경이 그 천막을 방문하고 1986년 성탄절 메시지에서 상계동 문제를 지적함으로써 가톨릭계의 관심을 증폭시킨 데는 정일우와 동지들의 헌신이 밑거름이 됐다.

정일우는 철거반대투쟁에 그치지 않고 철거민 보금자리를 만드는 데도 참여했다. 1970년대부터 그는 철거민들을 위한 복음자리마을·한독주택·목화마을 등을 조성하고 그들의 경제적 자립을 도왔다. 경기도 시흥시 소래면의 복음자리마을에서 생산된 복음자리 딸기잼이 널리 알려진 것은 그 때문이다.

정일우의 헌신은 국제사회까지도 감동시켰다. 1986년에 그는 제정구와 함께 막사이사이상을 받았다. 1997년에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그는 1990년대 후반에는 산업화에서 소외된 농촌 문제에 더 집중했다. 도시빈민과 연대하게 된 애초의 동기가 농촌 문제와 접목됐던 것이다.

군사정권들이 주도한 한국의 산업화에서는 소수 특권층을 위해 다수 대중을 희생시키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졌다. 국가와 재벌은 산업화의 결실을 차지하는 데 치중한 나머지, 그로 인한 대중의 고통은 사실상 방치했다. 이 과정에서 판자촌 철거민들이 한층 더한 고통을 겪었다.

위 김수현 논문은 "국내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베를린에서 열린 해비타트 국제연합(Habitat International Coalition, 1987년)에서도 우리나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함께 '가장 비인간적인 철거를 자행하는 나라'로 지목당하는 수모를 겪었다"고 말한다.

서울 올림픽 전년에 이런 지적을 받았던 나라에서 정일우 신부는 판자촌 및 철거민 현장에서 복음을 온몸으로 전파했다. 그는 79세로 선종하는 날까지 한국 산업화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성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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