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경기도 평택항에 컨테이너가 쌓여 있는 모습.
연합뉴스
한국경제는 외환위기 이전까지 수출주도형 산업화의 성공을 바탕으로 고도성장을 이뤘다. 그 과정에서 중산층이 확대되고 상대적으로 낮은 불평등이 유지된 바 있다. 하지만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성장 엔진은 둔화되었고, 불평등은 심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경기순환의 문제가 아니라, 고용·투자·지역·산업구조 전반에 걸친 '구조적 전환'의 결과이다. 이 글은 이 전환의 내부 메커니즘을 살펴보고, 오늘날 저성장·불평등·지역 격차·청년 기회의 축소로 이어지는 경로를 설명한다.
과거 고도성장의 내적 동력
경제성장은 자본 축적과 혁신을 통한 지속적인 기술 발전이 동반되어야 가능하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 우리나라 고도성장의 중요한 특징은 기업들이 수출로 벌어들인 수익을 국내에 재투자하여 새로운 산업을 끊임없이 창출했다는 점이다. 한국 기업들은 1970년대 경공업 수출에서 출발해 건설·조선·자동차·기계·철강·석유화학을 거쳐, 다시 반도체·전기·전자로 산업의 외연을 확장해 왔다.
이러한 새로운 산업 창출의 중심에는 다음 네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 1세대 기업가들은 기술과 자본이 부족한 여건에서도 도전 정신을 바탕으로 현장에서 직접 실행하며 기술을 축적해 나갔다. 헌신적인 노동자들과 함께 생산혁신을 이뤘고, 빠른 자본 축적과 기술의 상용화에 성공해 세계 시장에 진출할 수 있었다.
둘째, 정부는 소수 기업에 자원을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수출 및 신산업 육성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는 기업가들의 실패 가능성을 낮추고 새로운 산업에 대한 투자를 유도했다.
셋째, 양질의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제도가 작동했다. 당시 기업들은 평생고용과 가족경영형 복리후생을 통해 인력을 유지했으며, 우수한 대학 입시생들이 의대보다 공대를 선호해 양질의 노동력이 풍부히 공급될 수 있었다.
넷째,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기술 수준은 따라잡기 용이했고, 대부분의 생산이 국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낙수효과를 동반한 산업화가 가능했다.
이러한 요인들이 적절히 결합되며 1세대 기업가들의 도전정신을 뒷받침했고, 고도성장의 내적 동력이 되었다. 이로써 창출된 양질의 일자리는 가계소득 증가와 소비 확대로 이어져 선순환 구조를 형성했고, 낙수효과가 실질적으로 작동하면서 내수와 수출이 함께 성장하고 중산층이 확대되었다.
외환위기 이후 성장의 내적 동력 약화와 악순환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는 새로운 산업은 창출되지 못하고, 과거에 잘 작동하던 네 가지 요인이 반대로 작용하면서 저성장과 불평등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겪고 있다.
외부환경의 변화는 노동시장의 구조를 뒤흔들었다. 1990년대 세계화 심화와 외환위기 충격은 기업의 해외생산 확대와 국내 구조조정을 촉진했다. 신규 및 확장 투자가 노동비용이 낮은 해외로 이동하면서, 평생고용과 같은 인력 유지의 필요성이 줄어들었다.
대신 노동시장 유연화로 정규직·비정규직의 이중구조가 심화되고, 고용 안정성은 하락했다. 이에 따라 청년층은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고용을 피하기 위해 공무원 시험 등 안정적인 직군을 선호하게 되어 인적 자원의 쏠림 현상이 심해졌다. 이는 인적자본의 재배치 비용을 증가시켜 산업 전반의 혁신 역량 저하로 이어졌다.
지방 경제의 악순환도 심화되었다. 제조업 기반의 국내 생산설비가 해외로 이전되어 지방은 양질의 일자리가 급감했고, 청년층의 수도권 집중과 지방 이탈이 가속화되었다. 그 결과, 지역 간 인구·소득·산업생태 격차가 심화되었고, 지방의 수요 기반이 약화되면서 내수 침체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발생했다.
기업가의 도전정신 또한 약화되었다. 1세대 기업가들로부터 기업을 물려받은 2~3세대는 상속비용 최소화와 지배권 방어를 위해 일감 몰아주기, 순환출자, 쪼개기 상장 등 '지대 추구'(경제주체가 생산적·혁신적 활동 없이, 법적 특권·로비·규제 등 비생산적 방법을 통해 남이 가진 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거나, 자신에게 유리하게 자원을 배분하도록 힘쓰는 행위)에 집중했으며, 새로운 산업에 대한 투자는 소극적이었다. 실제로 지난 30여 년간 우리나라의 10대 수출품목은 거의 변화하지 않았다. 이 같은 지대 추구와 기업 내 기회 부족은 우수 인력들이 의대를 선호하게 된 배경이 되기도 했다.
해외이전, 내수침체, 노동시장 이중화는 중산층의 축소와 소득 분포의 양극화를 초래했다. 과거의 낙수효과는 사라지고 중산층은 점점 붕괴되었으며, 내수가 받쳐주지 못하는 구조가 고착되며 고성장의 내적 동력이 약화되었다. 그 결과 저성장, 불평등, 수요부진이 상호 강화되는 악순환 구조가 형성되었다.
성장 엔진 재가동을 위한 발전 전략

▲지난 7월 서울 시내 한 의과대학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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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과 저성장을 극복하고 다시 도약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산업을 지속적으로 창출할 수 있는 경제구조를 재구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가의 도전정신이 살아날 수 있는 제도와 환경, 정부의 신산업 육성정책, 양질의 인력 확보가 핵심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외부환경이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한국경제는 기술 발전 수준이 이미 상당히 높으며, 인공지능과 에너지 전환의 시대에는 지식과 아이디어가 기술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또한 생산의 상당 부분이 해외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도 매우 크다. 이와 같은 조건을 전제로, 우리는 세 가지 내적 성장동력을 재구축해야 한다.
첫째, 기업가들의 도전정신을 재점화해야 한다.
전통 산업에서 강자였지만 지대 추구에 집중해 온 2~3세대 기업가들에게 도전정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새로운 기술 시대에는 아이디어만 있으면 누구나 새로운 산업에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의 조성이 중요하다. 중소기업, 벤처기업, 스타트업 등 도전적인 기업가들이 활발히 등장할 수 있도록 창업 진입장벽을 낮추고, 대기업의 불공정 관행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는 등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특히 인공지능 시대에는 정부가 인프라를 주도적으로 구축해 기업들이 저렴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또한 창업 실패 후에도 재도전할 수 있는 환경과 제도를 마련하고, 생계 위협을 막기 위한 사회안전망 강화가 필요하다.
둘째, 양질의 인력을 확보해야 한다.
현재 우수한 인재들이 의대와 로스쿨 등 안정적인 진로에만 집중하는 구조에서는 새로운 산업 분야의 인력 부족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 청년 인재들이 과학기술이나 문화예술 등 새로운 성장 산업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유인 구조를 설계하고, 그들이 의사 외 직업을 선택할 수 있도록 경제적 유인을 제공하는 마중물 정책이 필요하다.
셋째, 정부의 지원 정책은 지방 중심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를 인정하되, 지방에서 새로운 산업이 창출될 수 있도록 정부가 강력한 유인을 제공해야 한다. 예컨대 인공지능과 재생에너지 인프라를 지방에 구축하고, 규제 샌드박스(신기술이나 새로운 서비스가 기존 규제 때문에 시장 진출이 어려울 때, 일정한 조건에 한해 규제를 면제 또는 유예하여 우선 시험·검증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제도) 운영도 지방에서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한국경제가 저성장과 불평등의 늪에서 벗어나 다시 도약하기 위해서는 과거 고도성장의 원동력이었던 '새로운 산업 창출'의 선순환 구조를, 변화된 시대와 환경에 맞게 재구성해야 한다. 도전적인 새로운 주체들을 육성하고, 미래 산업 인력을 확보하며, 지방을 신산업 창출의 거점으로 전환하는 정책적 노력이 멈춘 성장 엔진을 다시 가동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문성만
본인
필자소개 : 문성만은 전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서 거시경제학, 국제경제학, 응용경제학 분야를 중심으로 교육과 연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스페인 카를로스 3세 국립대학교(Universidad Carlos III de Madrid) 경제학과 및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에서 재직한 바 있으며, 국제적 감각과 정책 현장을 연결하는 연구 활동을 꾸준히 펼쳐왔습니다. 현재 한국경제학회 호남지회장을 맡고 있으며, 학술 공동체의 활성화와 지역 경제 연구의 학문적 기반 확장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태경상저널'과 'Journal of APEC Studies'의 편집장으로 재직하면서 국내외 연구 네트워크 형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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