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1일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신군부의 탄압 실상을 전파했다는 이유 등으로 중형을 선고받았던 이른바 `아람회 사건'이 재심선고에서 관련자 전원 무죄가 선고된 가운데 피해자 및 유족들이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아람회'란 명칭은 당시 기소된 전직 군 장교 김란수씨의 딸 아람이의 백일잔치에 모여 반국가단체를 조직, 결성했다며 수사기관이 붙인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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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범죄는 수사기관, 기소 및 공소유지 기관, 재판기관의 협업에 의해 일어날 때가 많다. 제5공화국 시절의 유명한 공안사건인 '아람회 사건'은 이 3대 기관의 협업이 실소를 일으키는 방법으로 진행된 사례다.
1982년 10월 19일 자 <동아일보> 등에서 확인되듯, 대법원은 아람회를 "국가변란 목적의 불법 비밀결사",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로 규정했다. 아람회가 반체제 비밀결사라는 경찰 및 검찰의 수사 결과를 법원이 재판을 통해 인정했던 것이다.
아람회 사건 관련자는 12명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07년 상반기 조사보고서>는 충남에 연고를 둔 12명의 프로필을 이렇게 소개한다.
"박해전은 숭실대학교 재학 중, 정해숙·황보윤식·신용·박경옥은 교사, 김창근은 경찰관, 이재권은 금산마을금고 직원, 김현칠은 대전지방검찰청 금산지청 직원, 최재열은 대전공업고등기술학교 학생, 김이준은 숭실대학교 강사, 박진아는 전업주부, 김난수는 육군 대위의 신분이었다.
이들 중 박해전·김창근·이재권·김현철·김난수 5명은 1973, 1974년에 금산고등학교를 졸업한 동창생이고, 황보윤식은 이들의 역사교사였으며, 신용·박경옥은 황보윤식과 대전공업고등기술학교에 재직한 동교 교사이고, 최재열은 그 학교 학생이었다. 김이준은 박해전의 숭실대학교 은사이고, 박진아는 김이준의 처이다. 정해숙은 1970년대에 금산 지역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친목모임이 '반국가단체'가 된 기막힌 이야기
12명이 얽힌 인간관계의 매개자는 역사교사 황보윤식이다. 32세인 그의 제자가 5명이고 동료 교사가 2명이다. 여기에 박해전의 숭실대 인맥과 정해숙의 지역 연고가 접목됐다. 위 3대 국가기관은 이들이 1980년 5월에서 이듬해 7월 사이에 금산과 대전 등지에서 모이거나 대화한 것을 근거로 반국가단체구성죄 및 찬양·고무죄 등을 적용했다.
5·17 쿠데타 1주년이자 5·18 제1주기 전날인 1981년 5월 17일 일요일, 27세의 육군 대위인 김난수의 집에서 파티가 열렸다. 그의 갓난아기를 위한 백일잔치였다. 아기 이름은 아람이었다. 위 보고서에 따르면, 대전경찰서·대전지방검찰청·대전지방법원·서울고등법원·대법원은 그날 그곳에서 아래와 같은 일이 있었다고 주장하거나 인정했다.
"박해전·황보윤식·정해숙·김창근·이재권·김현칠·김난수 등이 회합을 거듭하여 오던 중, 상호 감화되어 황보윤식·정해숙의 지도 아래 박해전의 통솔로 결속된 바, 1981. 5. 17. 김난수의 집에서 동인의 딸 아람의 백일잔치 끝에 직장 사정으로 먼저 돌아가는 김창근·김현칠로 하여금 단체 결성에 관한 일체를 위임받고, 박해전·황보윤식·정해숙·이재권·김난수가 따로 회합하여 민중의식화운동을 통한 민중봉기 유도로 현 정권과 미국 등 외세를 타도·축출함으로써 북한 괴뢰집단의 고려연방제 통일노선에 따라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는 데 기여할 것을 모임의 목적으로 하고"
그러나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결과는 달랐다. 백일잔치의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젊은 축에 속하는 박해전이 친목계 구성을 제의했다. 그러나 "주변이 어수선하여 듣지 못한 사람도 있었고"라고 보고서는 알려준다.
박해전의 말을 알아들은 사람들은 모임 구성에 동의하고, 모임 명칭으로 아람회 등을 거론했다. 그런 뒤 쌀 1 말씩을 거둬 여름방학 때 무주 구천동이나 소백산맥 등으로 캠핑을 가자는 말들을 나눴다. 위 보고서는 이런 사실들은 확인되지만 "조직 구성 등 나머지 사실은 인정되지 않는다"고 밝혀냈다. 공안기관들이 구체적 증거를 제시했고 그것을 기초로 재판이 이뤄졌다면, 진실화해위원회가 이처럼 단호하게 결론을 내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대법원 판결문에 "외견상으로는 다른 목적(친목 등)을 내걸고 있었더라도 그 조직의 내용이 국가를 변란할 목적도 아울러 갖고 있었다면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로 보아야 한다"는 대목이 있었다. 학생과 교사 외에도 마을금고 직원, 경찰관, 검찰청 직원, 육군 대위, 전업주부 등이 포함한 지역민들의 친목모임이었다는 점을 법원도 부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람회가 백일잔치 친목모임의 성격과 더불어 반국가단체의 성격도 갖고 있다는 부자연스러운 결론이 도출됐다. 차라리 친목모임의 성격을 부정하고 반국가단체의 성격만 부각시켰다면 좀 더 그럴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면 재판정에 내놓을 자료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백일잔치에 초대하기 위해 전화를 걸거나 편지를 쓰고, 선물을 구입하기 위해 상점을 방문한 일 등은 입증하기 쉽지만, 일어나지도 않았던 국가변란 회합을 증명하기는 힘들다. 아람이 백일잔치 말고는 딱히 입증할 물증이 없었기에, 친목모임의 성격을 부정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서 쓰기를 종용한 경찰

▲2009년 5월 27일 국가보안법과 계엄법 등 위반 혐의로 억울하게 중형을 선고받았다가 무죄 판결을 받은 '아람회 사건'의 피해자 4명(오른쪽부터 조영건씨, 김현칠씨, 박해전씨, 정해숙씨(맨 왼쪽)과 고 이재권씨의 부인 박천희(가운데)씨, 5.18유공자인 장두석(맨 왼쪽에서 두번째)씨가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 있는 고 이재권씨의 묘소에서 사법부가 무죄를 선고한 판결문을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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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에서는 구체적인 증거 없이 수사 및 기소가 이뤄졌을 뿐 아니라 최소한의 적법절차도 준수되지 않았다. 체포·구금부터가 영장 없는 불법 조치였다. 또 구속영장이 발부될 때까지 약 10일 내지 35일간 가족 및 변호인과의 접견이 차단됐다. 고문과 가혹행위도 있었음은 물론이다.
1980년에 개정된 당시 헌법 제10조 제3항은 체포·구금·압수·수색 시에 검사의 신청에 의해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할 것을 규정했다. 강제수사에 필요한 영장을 검사가 신청하게 한 것은 검사를 경찰의 윗자리에 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찰과 검찰을 상호 견제시켜 과잉·불법 수사를 예방하는 취지도 띠고 있었다. 아람회 사건에서는 이 같은 상호 견제가 전혀 구현되지 않았다.
<내일을 여는 역사> 2009년 제36호에 실린 이유정 인하대 교수의 논문 '과거사 진상조사보고서를 통해 본 검찰의 인권침해 실태'에 따르면, 박해전·정해숙은 담당 수사관들이 검찰 조사에 동행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황보윤식도 "경찰에서 고문한 수사관이 검사실에 입회하였다"고 법관들에게 말했다. 이렇게 저승사자를 옆에 둔 상태에서 제대로 된 진술이 나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김창근은 저승사자를 옆에 두고도 혐의를 부인했다. 그런 뒤에 검사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러자 담당 수사관들이 그에게 협박을 했다고 한다.
또 경찰이 피의자에게 유서를 써둘 것을 종용하는 일도 있었다. 고문을 가하는 경찰의 입에서 그런 요구가 나왔다.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7년 뒤 한겨레신문사 창간 기자가 될 박해전은 1981년 11월 16일 대전지법 제4차 공판 때 이렇게 진술했다.
"대공분실에서 수사관이 머리를 거꾸로 하여 수건으로 코를 막고 물을 다섯 번가량 붓는 물고문을 하였고, 몽둥이로 머리를 때렸으며 유서를 쓰라고 협박하였고"
가혹행위에 대한 이 같은 고발은 죄다 무시됐다. 이 사건은 박해전 등 6명에게 징역 1년 6개월에서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이 선고되는 쪽으로 1983년에 종결됐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7년 7월 3일 국가의 사과 및 화해조치, 피해복구와 명예회복을 위한 재심 등의 상응 조치를 권고했다. 재심을 맡은 서울고법은 2009년 5월 21일 무죄를 선고했고 이 판결은 8일 뒤 확정됐다. 백일잔치를 반국가단체 회합으로 둔갑시킨 아람회 사건이 경찰·검찰·법원의 합작극이었다는 점을 대한민국 국가는 26년 만에 시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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