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미술관에 위치한 간송 전형필 흉상
김종훈
전형필은 어의동공립보통학교와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했다. 이 대학 법과를 졸업한 것은 24세 때인 1930년 3월이다. 이 무렵부터 그의 문화재 수집이 시작됐다.
LA 격월간지 <뿌리>의 편집장을 지낸 소설가 이충렬의 <간송 전형필>에 따르면, 양부 전명기와 친형 전형설은 1919년에, 친부 전영기는 1929년에 작고했다. 그래서 대학 졸업반 때 전형필은 두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물려받은 거부가 돼 있었다. 문화재에 대한 열의와 더불어 이 재산이 그의 활동을 뒷받침했다.
전형필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문화재 수집을 위해 그 재산을 활용했다. 1932년에는 고서점 한남서림을 인수하고 1938년에는 지금의 간송미술관인 보화각을 세웠다. 문화재 수집을 용이하게 해주는 인적·물적 네트워크가 그렇게 형성됐다.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에 그의 관심을 끈 것이 바로 훈민정음해례본이다. 한국국학진흥원이 발행한 <인물로 보는 한국의 세계기록유산>은 "이 무렵에는 학자들 사이에 훈민정음 언해본이 세종이 1446년에 펴낸 원본이 아니라 진짜 원본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추론과 소문이 나돌던 시기였다"고 기술한다.
해례본을 훈민정음으로 풀어 쓴 언해본이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발견돼 있었지만 해례본 원본이 따로 존재할 것이라는 말이 나돌던 시기에, 전형필이라는 인물이 문화재 무대에 등장했다. 그는 보화각 건립 이듬해인 1939년에 해례본의 소재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이를 위해 그는 상속재산을 과감히 쏟아부었다. 위 책은 이렇게 기술한다.
"전형필은 문학가이자 교수였던 김태준을 통해 발견자인 이용준 집안과 계약을 통해 당시 경성에서 가장 비싼 기와집 열 채 값을 주고 매입하였다. 당시 일본돈 천 원이면 족하다고 하였으나 어찌 우리의 최고 문화재를 일반 책처럼 살 수 있느냐며 당시 비싼 기와집 열 채 값을 주고, 한남서림 고서적 거래상인에게는 수고비로 천 원을 주고 매입하였다."
고급 기와집 1채 값이면 족하다고 하는데도, 10채 값이나 지불했다. 거래상에게도 집 한 채 값을 수고비로 건넸다. 문화재에 대한 전형필의 가치 평가를 느낄 수 있다.
그는 단순한 수집가가 아니었다. 수집한 문화재를 기반으로 학술 성과를 도출하고 이를 사회와 공유했다. 훈민정음해례본도 그렇게 활용했다. 위 책은 그가 "당시 최고의 서지학자인 송석하 선생에게 부탁해 모사본을 만들게" 했다고 알려준다. 이 모사본에 기초한 번역물은 1940년 7월 30일부터 <조선일보>에 다섯 차례 연재됐다.
위 책은 "그해 10월 무렵에는 <정음>이라는 잡지에 해례본 전문이 실리고, 12월에는 정인승 선생이 한글지에 이 책을 자세히 소개하였고, 1942년에는 전형필 소장임을 밝히고 진본임을 자세히 입증한 최현배의 <한글갈>이 나왔다"고 설명한다.
1938년에 조선어 교육이 폐지됐다. 전형필이 해례본을 입수하고 이 지식을 전파하던 시기는 이처럼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전개되던 때였다. 이런 시기에 그는 상속재산을 단순히 좋은 데 사용하는 차원을 뛰어넘어, 민족문화를 보존하고 사회 전체와 공유하는 자기만의 업(業)을 대담하게 만들어냈다.
그가 문화재 수집을 위해 가산을 탕진했다는 시각도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전영기·전명기의 재산은 전형필의 탕진으로 인해 집 밖으로 흘러 나간 게 아니라, 전형필의 과감한 투자에 의해 새로운 가업의 밑천이 됐다고 이해해야 정확하다.
전형필이 수집한 문화재는 헤아릴 수 없다. 2010년에 발행된 위의 <간송 전형필>에 따르면, 그가 수집한 것 중에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국보 12점을 포함한 총 26점이다. 그중에는 국보 제70호인 <훈민정음> 해례본과 더불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제71호 <동국정운>, 제135호 <혜원풍속도>, 제294호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 보물 제284호 금동여래입상, 제348호 분청사기모란문반합, 서울시 지정 문화재 제28호 삼층석탑 등이 있다.
이 외에, 추사 김정희의 글씨와 겸재 정선의 그림도 집중적으로 수집됐다. 김홍도·장승업의 작품, 고려시대 불교유산 등도 포함됐다.
민족말살정책에 맞선 전형필의 노력

▲지난달 15일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에서 열린 가을 기획전 '보화비장: 간송컬렉션, 보화각에 담긴 근대의 안목'에 추사 김정희의 '대팽고회'가 전시되어 있다.
연합뉴스
수집 과정에서 전형필은 독립운동가들과 협업했다. 해례본 수집을 도운 한 살 연상의 김태준은 박헌영·이현상·이관술·김삼룡과 함께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민족대표 33인인 오세창(1864~1953)은 전형필의 핵심 파트너였다.
<간송 전형필>에 따르면, 간송(澗松)이라는 호를 지어준 이도 오세창이다. 산골 물과 소나무의 이미지를 활용한 아호다. <간송 전형필>에 실린 이원복 국립광주박물관장의 글은 "당시 고서화 최고의 감식안이었던 위창 오세창 등의 도움에 힘입어 예외 없는 철저한 고증을 거쳐 우리 문화재를 모았다"고 기술한다.
전형필은 일본으로 유출된 문화재도 되찾아왔다. <혜원풍속도>도 그중 하나다. 이원복의 글은 "간송은 값의 고하를 따지지 않고 명품 위주로 수집했기 때문에 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모을 수 있었다"라며 "일본에 유출된 <혜원전신첩>(국보 제135호)을 파격적인 가격으로 되사왔"다고 말한다.
민족말살정책을 무릅쓰고 전개된 전형필의 문화재 업(業)은 해방 뒤에도 이어졌다. 그의 사후에는 한국민족미술연구소와 간송미술관이 그 업을 계승했다. 그가 일으켜 세운 기업은 민족문화 발달을 주 종목으로 하는 업이다. 그의 자산 투자를 굳이 가산 탕진이라고 표현한다면, 그 탕진은 세상을 위한 축적이었다.
지난달 19일 루브르박물관의 4인조 도둑은 사다리차를 걸쳐놓고 단 7분 만에 프랑스 왕실 보물을 훔쳐 갔다. 루브르박물관보다 훨씬 손쉽게 보물을 털린 곳은 1910년 이후 35년간의 한국이다. 그중 상당수는 일본 왕실의 도서관에 들어갔다.
그런 시절에 우리 문화재를 지키려는 노력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우리 문화재를 보기 위해 일본행 비행기나 선박을 타야 할지도 모른다. 환수해야 할 문화재가 여전히 해외에 많지만, 한국 문화재 상당 부분은 한국인들 자신의 힘으로 지켜져 오늘날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간송 전형필은 그런 공로자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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