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식 돼지국밥'의 원조 광화문국밥. 사람들이 줄 서서 찾는 맛집이다.
여운규
"참 이상하다니까요!"
몇 년 전, 지인의 소개로 부산의 어느 돼지국밥집에서 만난 박찬일 셰프는 첫 마디를 이렇게 시작했다. 어색한 인사가 오간 뒤, 이제 막 국물 한 숟갈을 뜬 참이었다.
"분명 별다른 재료가 들어간 것도 아니고, 그렇게 어려운 요리도 아닌 것 같은데, 서울에서 만들면 이 맛이 안 나요. 왜 그럴까요?"
나 또한 매우 동감이었다. 부산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수도권에서 지낸 세월이 이제는 더 길어진 내가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대목이 바로 그거였다. 서울에서는 도통 먹을만한 돼지국밥을 구경할 수 없다는 안타까운 현실. 배고플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음식이 돼지국밥인데, 이걸 아무 때나 나가서 사 먹을 수 없다는 건 내게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돼지국밥은 부산 사람들의 소울 푸드다. 부산 어느 골목을 가더라도 구수하고 꼬릿한 돼지 삶는 냄새가 바닷바람의 짠내와 섞여 공기 중에 떠돈다. 시내를 걷다 보면 거짓말 조금 보태서 길모퉁이 하나를 돌 때마다 돼지국밥집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부산에 살 때, 하루는 무슨 일 때문에 냄새 안 나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 날이 있었다. 어느 주택가 골목에서 '오늘만은 국밥을 먹지 않겠노라' 결심하고 적당한 식당을 찾아 헤맸지만 그날따라 별다른 집이 눈에 띄지 않았고, 하필 보이는 건 죄다 국밥집이었다. 결국 다섯 번째 나타난 돼지국밥집으로 항복하고 들어간 기억이 새롭다. 아, 정말 많긴 많구나. 새삼 느꼈다.
돼지국밥은 종류도 다양해서 정해진 형태나 격식이 없다. 뽀얀 국물이냐 맑은 국물이냐, 밥을 따로 내주느냐 토렴하느냐 등등에 따라 수십 가지 옵션이 존재한다. 부산 사람들은 어느 동네 무슨 국밥집이 최고라고, 틈만 나면 목소리를 높여 논쟁하기를 즐긴다. 다들 자기만의 국밥집 하나씩은 다 가슴 속에 지니고 사는 거다. 거기에는 어떤 타협도 있을 수 없다.
반면 서울은 순대국밥이 주류다. 순대국밥은 얼핏 보아 돼지국밥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고, 돼지 뼈와 부속물 등을 끓여낸 국밥이라는 점에서 거의 같은 음식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둘은 좀 다른 음식이다. 주재료가 순대와 살코기로 서로 다르다는 것 외에도 국물 맛도 뭔가 다르고 주로 쓰는 고기 부위도 다르다. 고명의 차이도 크다.
돼지국밥에는 새우젓에 양념장은 물론이고 정구지라 불리는 부추무침이 꼭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만 국밥 맛이 완성된다고 믿는 것이다. 식탁에 놓인 정구지 접시를 반찬이라 여기고 정작 국밥에는 소금 간만 하는 외지인들을 보면 부산 사람들은 속이 터진다. 달려가 정구지 한 움큼 국밥 위에 얹어주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결국은 "에헤이, 저 양반 국밥 무울 줄 모리네!"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래도 요즘 돼지국밥을 모르는 서울 사람은 없다. 부산 여행 가면 꼭 먹어야 할 음식으로 손꼽히지 않나. 그러나 내가 처음 상경했던 30년 전, 이곳 사람들은 그런 음식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잘 몰랐다. '돼지국밥이라고? 그게 뭐야? 혹시 돼지가 먹는 국밥인가?' 음식 이름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사람이 많았다. '돼지고기 국밥도 아니고 돼지국밥이라고? 그거 좀 그렇다 야.' 나는 억울했지만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제대로 없던 시절이라 뭐라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요즘은 심심찮게 '정통 부산식 돼지국밥'을 구현해 낸 집이라고 선전하는 가게도 많이 보인다. 다만 앞서도 말했듯, 그 맛을 제대로 낸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서울 시내 어디엔가 돼지국밥집이 생겼다는 말만 들으면 일부러 달려가서 먹어보기도 했지만 항상 남는 건 약간의 아쉬움이었다. 왜 그런지는 정말 모른다.
서양 요리사가 돼지국밥집을?

▲광화문국밥의 돼지국밥(특). 맑고 깔끔하고 고소한 감칠맛이 일품이다.
여운규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생겼다. 바로 그 박찬일 셰프가 광화문에 돼지국밥집을 연다는 거다. 국밥집이라구요? 아니, 왜요? 나는 정말 궁금했다. 이분, 서양 요리사 아니셨나. 와인이랑 멋진 요리를 갖춘 레스토랑 운영하시던 셰프님이 갑자기 국밥집이라니. 게다가 돼지국밥을? 의아해하는 나에게 셰프님은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돼지국밥이긴 한데, 부산식은 아니에요."
예? 아니, 그건 또 무슨?
회사 바로 건너편, 예전에 함흥냉면을 먹으러 가끔 가던 식당 자리에 '광화문 국밥'의 새 간판이 붙었다. 아이고 이분 진심이었구나. 뭔가 신선한 충격이었다.
마침내 대면한 국밥의 자태는 더 충격적이었다. 투명하고 맑은 국물에 얇게 저민 살코기가 하늘하늘 올라가 있고 그 위에 다진 쪽파. 이게 다였다. 맑은 곰탕 같기도 하고 국수 없는 평양냉면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내가 알던 돼지국밥의 모습은 전혀 아니었다. 그런데 맛은?
맛은 더 놀라웠다. '버크셔K'라 불리는 신품종 흑돼지 살코기로만 끓여냈다는데 어떻게 이런 맛이 나는 걸까. 고소하고 깊은 감칠맛이 확 올라왔다. 잡내 같은 건 아예 없었다. 국물은 투명하게 맑은데 맛은 진하면서 깔끔했다. 닭곰탕과도 비슷하고 약간은 소고깃국 같기도 한, 희한한 맛이었다. 분명한 건, 이런 국물에 다대기나 부추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조합이란 거였다. 그랬다간 어렵게 뽑아낸 감칠맛을 다 덮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맑고 구수한 광화문 국밥은 금세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돼지국밥이라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는 몇 달 뒤에 이번엔 '돼지곰탕'을 내세운 음식점이 또 서울에 생겼다. 역시 맑은 국물의 돼지국밥이었다. 여긴 또 어떤 맛이려나. 한번 가보고 싶은데 지금까지 기회가 닿지 않고 있다. 그러던 사이 이 집은 지금 미국에 진출해 뉴요커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고 한다. 생각이나 해 봤을까. 돼지국밥 먹으려고 줄 서서 기다리는 미국 사람들이라니!
이쯤 되면 서울식 돼지국밥

▲무교동에 새로 문을 연 '이소 돼지국밥'. 맑은 국물에 큼직한 살코기가 인상적이다.
여운규
바로 얼마 전, 점심을 먹으러 가다가 커다란 간판을 달고 새로 개업한 음식점을 보게 되었다. 서울 중구 무교동 도로변 2층에 자리한 '이소 돼지국밥'이었다. 큼지막한 돼지국밥 네 글자를 둘러싸고 약간 촌스런 불빛이 반짝거리고 있는, 인상적인 간판이었다.
격세지감을 느꼈다. 돼지가 먹는 국밥이냐고 묻던 서울 한복판에 이제 저렇게 커다란 간판이 붙는구나. 저건 또 어떤 맛일까 싶어 홀린 듯 들어가 보았다. 하여간 나는 돼지국밥만 보면 먹어보지 않고는 못 배긴다. 파블로프의 개도 아니고, 큰일이다.
여기도 역시 맑은 국물에 얇게 저민 돼지 살코기가 가득했다. 다만 광화문 국밥에 비해서는 약간 육향이 있는 편이었고, 고기의 양도 많아 보였다. 맛있었다. 비록 부산에서 먹던 맛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 또한 돼지국밥이 아니라 할 수는 없었다. 이쯤 되면 이런 스타일의 국밥을 '서울식 돼지국밥'이라 불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잘 먹었다.
돼지국밥의 변신, 성공했다
▲부산 어느 시장통 돼지국밥의 자태. 가장 보편적인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정구지를 팍팍 넣어야 제맛이 난다.
여운규
허영만 화백은 <식객> 만화에서 부산 돼지국밥을 일러 "소 사골로 끓인 설렁탕이 잘 닦여진 길을 가는 모범생 같다면 돼지국밥은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반항아 같은 맛"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게 내가 아는 돼지국밥이었다. 묵직한 국물에 꼬릿한 육향이 작렬하지만 양념장 듬뿍 풀고 뻘건 정구지 팍팍 넣어서 먹으면 어느새 한 그릇 뚝딱 해치우게 되는. 그 맛은 어쩔 수 없이 내 뇌리에 각인되고 핏줄에 섞여 흐른다.
그러나 서울로 올라온 돼지국밥은 변신을 시도했고 성공했다. 본연의 터프함은 잠시 벗어두고 깔끔하고 세련된 옷으로 갈아입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비포장 도로를 내달리던 거친 맛은 사라졌지만 그만큼 맑아졌고, 부드럽고 깊으면서 똑 떨어지는 감칠맛을 대신 장착했다. 나는 서울식 돼지국밥을 먹노라면 오랜 고생 끝에 번듯이 자리를 잡은 고향 친구를 보는 것 같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 내게 묻는다. 지난 30년간 이곳에 와 살면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 고향 바다를 떠나올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산해진미를 앞에 두고도 우연히 마주친 간판에 적힌 '돼지국밥' 네 글자에 대책 없이 가슴이 뛰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알듯 말듯, 고민하는 사이에 어느덧 가을이 깊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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