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 서구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 세워져 있는 기념조형물
이돈삼
일제하 3대 독립운동인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또 다른 3대 운동인 3·1운동이나 6·10만세운동과 달리 합법적 집회 공간이 없는 상태에서 발생했다. 1919년 3·1운동은 고종황제의 장례식이, 1926년 6·10만세운동은 순종의 장례식이 계기가 됐다. 광주학생독립운동 때는 그런 계기가 없었다.
왕정시대에는 왕의 죽음이 가장 슬픈 일이었다. 그래서 일제는 한국인들이 고종과 순종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한국인들은 일본이 인정하는 합법의 테두리 내에서 집회를 열 수 있었다. 반면, 1929년 11월 3일의 광주학생독립운동 때는 그런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군중이 모이기 힘들었는데도 일제강점기 3대 운동이 이때 발생했다.
3·1운동과 6·10만세운동은 봄과 초여름에 발생했다. 그래서 군중의 집결이 상대적으로 쉬웠다. 반면, 1929년의 운동은 초겨울 사건이다. 계절적 요인을 고려해 봐도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불리한 조건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원호처(국가보훈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 제9권: 학생독립운동사>는 이 운동의 규모를 이렇게 정리한다.
"광주학생민족운동을 기점으로 하는 전국 학생의 대일항쟁에서 퇴학처분자 5백 82명, 무기정학 2천 3백 30명, 피검자 1천 6백 42명의 희생을 지불하였으며, 참가 학교 1백 94교(소학교 54, 중등교 136, 전문교 4교), 참가 학생수 약 5만 4천여 명이 되었으니, 실로 이것은 학생운동이 아니라 3·1운동 이후 최대의 대일 민족항쟁이라 할 수 있다."
운동의 발단은 나주역에서 생겨났다. 광주에서 수업을 마치고 기차로 하교하던 광주서중학교 3학년 후쿠다 슈조 등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등의 신체를 건드리고, 박기옥의 사촌동생이자 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인 박준채가 성희롱에 대해 항의하고 나선 것이 출발점이 됐다.
후쿠다가 사과를 거부한 일은 이 사건을 역사적 단계로 승화시키는 역설적 기능을 했다. 후쿠다의 태도로 인해 30일에는 나주역에서, 31일에는 기차 안에서, 11월 1일에는 광주역에서 나주 학생들과 일본 학생들 간의 집단 몸싸움 혹은 대립이 벌어졌다. 일제 경찰은 당연히 한쪽을 편들었다.
서로 잘 아는 학생들이 사전에 조직을 이뤄 싸움을 벌인 게 아니었다. 한국인은 무조건 이편, 일본인은 무조건 저편이 돼서 벌어진 싸움들이다. 나주에서 시작된 이 상황은 광주 학생들이 응원 시위를 벌이고 동맹휴학을 하면서 새로운 단계로 발전했다.
일본인이 다니는 중등학교는 보통학교보다 높은 중학교로 불리고, 한국인이 다니는 중등학교는 보통학교보다는 높지만 진정한 중학교는 아니라는 의미에서 고등보통학교로 불렸다. 이런 일에서까지 유치한 민족차별이 있었다.
그런 것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었던 한국 학생들은 일본 학생들의 파렴치와 일제 경찰의 편파성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1929년 11월의 광주를 뜨겁게 만들었다. 더 이상 억누를 길이 없는 한국 학생들의 분노는 한국 황제의 죽음이 없는 상태에서도 대규모 항쟁이 초겨울에 폭발하는 토대가 됐다.
멕시코 한인들의 반일 감정
광주학생독립운동은 한반도 전역은 물론이고 만주로도 퍼지고 중국 상하이를 비롯한 세계 각지로도 확산됐다. <재외한인연구> 2023년 제62호에 실린 김재기 전남대 교수의 논문 '쿠바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 지지운동'은 이렇게 설명한다.
"상해에서 500여 명의 군중대회를 비롯하여 동경과 오사카,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뉴욕을 비롯하여 멕시코의 메리다와 쿠바의 마탄자스와 카르데나스까지 지지운동이 확산되었다. 이에 미국과 중국·소련·독일 등 주요 국가의 언론에서도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보도하여 세계인들에게 알렸다.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의 기관지를 비롯한 독일 신문 포쉬세 자이퉁을 비롯하여 소련의 프라우다지에서도 보도했다. 이후 미국의 메이저 신문인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에서도 보도했다."
위 논문 제목에 들어간 쿠바섬에 한국인들이 집단으로 이주한 계기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직후의 국제 설탕가격 폭등이다. 이 때문에 쿠바 설탕산업이 호황을 맞으면서 이 나라의 사탕수수농장들로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됐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재외동포사 총서 2: 재외동포사회의 역사적 고찰과 연구방법론 모색>은 한국인 집단이 들어가는 순간을 이렇게 기술한다.
"멕시코에서 지원한 288명의 한인과 가족들은 따마울리빠스호를 타고 1921년 3월 4일 유카탄반도를 떠나 쿠바를 향해 떠났다. 그러나 쿠바의 마나띠항에 도착한 그들은 정식 서류를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입국을 거절당하여 마리엘항으로 향했으며, 우여곡절 끝에 쿠바 당국의 허가를 얻어 1921년 3월 25일 마나띠항에 입항하게 되었다."
서류 미비가 말썽이 된 것은 멕시코의 한인들이 일본에 귀화하라는 일본영사관의 제의를 거부하고 무국적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결국 멕시코와 미국의 교포사회가 쿠바 당국에 강력히 항의해 한국인 288명의 입국이 허용됐다.
일제는 대만과 사할린에는 일본 국적을 부여하면서도, 한국에만큼은 주지 않았다. 그래서 멕시코 한인들에게 국적을 주고자 했던 일본의 조치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런데도 무국적을 고수한 것은 멕시코 한인들의 반일 감정을 반영한다. 그중 일부가 쿠바로 이주했으니, 쿠바 교포사회의 반일 감정도 강할 수밖에 없었다.
쿠바의 한인들까지 하나로 묶었다

▲1929년 11월 6일 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광주학생독립운동 기사.
위키미디어 공용
고국의 학생들이 일제에 맞서 궐기했다는 소식을 1930년 초반에 전해 들은 쿠바 교포들은 학생들을 응원하는 대회를 열고 후원금을 모았다. 위의 김재기 논문은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 쿠바지방회 3개 지역에서 100여 명이 참여하여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지지대회를 개최하고 후원금 100여 달러를 모금하였다"고 기술한다.
100여 명이 평균 1달러를 냈다. "당시 경제적으로 일거리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잘해야 한 달에 5~6달러 벌던 한인들에게는 큰돈"이라고 위 논문은 말한다.
어린아이들도 성금 납부에 동참했다. 쿠바 교포사회 최초의 학교이자 유치원 및 초등학교 성격을 띠는 민성국어학교의 학생 21명도 동참했다. 위 논문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대한인국민회 기관지인 <신한민보>는 1930년 2월 27일 자 기사에서 이들의 성금을 "코 묻은 돈"으로 표현했다.
그 21명 중의 최연소자는 1923년 생인 주미엽이다. 일곱 살인 주미엽은 고국에서 싸우는 언니와 오빠들을 응원하기 위해 10전을 기부했다. 아홉 살인 오빠 주희열은 40전을 냈다.
그들의 아버지인 주한옥은 1921년에 쿠바로 이주해 멕시코 여성과의 사이에서 주희열·주미엽을 비롯한 다섯 자녀를 낳았다. 주미엽의 성금은 최연소자의 성금이라는 의미뿐 아니라, 쿠바에서 출생한 교포 2세의 성금이라는 의미도 갖는다.
주미엽은 그 뒤 민족주의 활동에 참여했다. 위 논문은 그가 대한여자애국단에 가입한 일을 거론하면서 "가정의 일용품을 절약하여 독립운동 후원금을 마련하여 임시정부의 외교선전·군사운동 등에 보냈으며 일화(日貨)를 배척하고 부인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였다"고 기술한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지구 반대편인 쿠바의 한인들까지 하나로 묶었다. 일곱 살인 주미엽도 성금 모금에 참여하고 항일민족운동의 길을 걸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동이 얼마나 멀리까지 퍼져 갔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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