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29일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천마총 금관 모형'을 선물한 뒤 악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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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금관 복제품은 역대 한국 정부가 외교 무대에서 사용한 주요 아이템이다. '미국은 아시아 문제에서 발을 뗄 것이고 자국 안보는 스스로 지켜야 한다'며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 때문에 한동안 곤욕을 치른 박정희 정권도 이를 활용했다.
박 정권은 '지긋지긋한'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 때문에 1974년 8월 9일 하야하고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백악관에 들어간 직후에 그 선물을 준비했다. 포드 행정부가 한국 방문을 발표한 것은 그해 9월 20일이고, 포드가 김포공항 트랩에 발을 디딘 것은 11월 22일이다. 이 기간에 박 정권은 금관을 800개나 준비했다.
청와대가 금관 제작을 의뢰한 업체는 신진특수공예사다. 이 회사 사장은 '쇠 금'과 '날 생'이 결합된 '쇳녹 생'을 이름으로 쓰는 이생림(李鉎林)이었다. 1981년 2월 18일 자 <조선일보> 인터뷰에 등장한 그는 "포드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인데, 이들에게 선물로 줄 금관 8백 개의 주문이 한꺼번에 들어왔읍니다"라고 회고했다.
기술자 2명 정도가 3일 밤낮을 작업해야 이번에 트럼프가 받은 금관을 다섯 개 정도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청와대가 주문한 것은 실물 크기의 8분의 1이었다. 그래서 기한 내에 800개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전두환 때는 금관이 교황청과의 외교에도 사용됐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초청하는 대통령 친서를 들고 바티칸을 방문한 이진희 문공부 장관이 그것을 들고 갔다. 그런데 이진희는 교황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전달했다. 1983년 5월 14일 자 <조선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이 장관은 교황에게는 동양화를, 국무상에게는 신라 금관 모조품을 선물로 주었고, 이에 대한 답례로 교황에게서 바티칸의 문화와 역사에 관한 서적을 받았다."
포드 대통령 방문단을 위해 대형 금관 1개가 아닌 미니 금관 800개를 준비하고, 요한 바오로 2세가 아닌 아고스티노 카사롤리 국무장관에게 금관을 선물한 일은 박정희·전두환 정권이 금관 복제품을 최고의 선물로 취급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2·12 및 5·17 쿠데타와 5·18 광주학살로 인해 정통성이 바닥이었던 전두환 정권은 1980년 11월 5일의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의 지미 카터가 낙선하고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되자 환호성을 올렸다. 레이건을 좋아했던 전두환은 1981년 5월 31일 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그에게 도자기를 선물했다. 부인인 낸시 레이건이 도자기광이라는 점을 고려한 선물 선택이었다.
5·18 제1주기인 1981년 5월에 전두환 정권이 공을 들인 것은 보름간의 동남아 순방이다. 위 <조선일보> 기사의 제목은 '전 대통령 아세안 5국 순방 준비팀은 바쁘다'이다. 이에 따르면, 전두환 측은 태국 국왕과 말레이시아 국왕에게는 경주 천마총 금관의 복제품을, 필리핀·싱가포르·인도네시아 대통령에게는 레이건에게 준 것과 똑같은 도자기를 선물하는 계획을 세웠다. 아세안 주요 국가 지도자들에게 금관을 주기도 하고 도자기를 주기도 한 것은 금관이 유일한 최고 선물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때 준비된 금관은 금으로 도금한 은관이었다. 복제품인 데다가 실제로는 은관이었던 것이다. 전두환이 그런 왕관을 들고 가서 진짜 왕들에게 대관(戴冠)을 해준 셈이 됐다.
교섭의 불평등을 한층 빛내주는 일로 해석될 수도

▲27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공개된 신라 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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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권들이 금관을 최고의 선물 아이템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점은 노태우 정권 때인 1991년 사례에서도 나타난다. 국내에서는 공안정국이 조성됐지만 남북 간에는 훈풍이 일었던 1991년 10월에 평양을 방문한 정원식 국무총리가 연형묵 정무원 총리 등과 회담한 뒤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서 내놓은 것도 금관이다. 그달 24일 자 <동아일보>는 정원식이 "촬영소 측에 신라 금관 모형을 선물로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금관이 최고지도자에 대한 선물이었다면 이를 촬영소에서 내놓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의 사례들에서 나타나듯이 한국 정권들은 금관을 최고의 선물로 다루지 않았다. 그리고 금관 선물이 이번처럼 국익을 손상시키는 교섭과 동반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이재명 정부는 트럼프에게 무궁화대훈장을 함께 수여하는 방법으로 금관 선물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금관을 선물하는 일 자체는 한국의 국익과 위신에 영향을 주지 않지만, 이재명 정부의 조치로 인해 트럼프에 대한 금관 선물은 종전의 금관 선물과 의미를 달리하게 됐다.
거기다가 한국의 경제적 이익을 손상시키는 교섭을 매듭짓는 기회에 금관이 선물됐다. 미국이 애초에 요구한 '3500억 달러 전액 현금 투자'에서 '2000억 달러 현금 투자, 연간 최대 한도 200억 달러'로 바뀌면서 한국의 부담이 줄기는 했다. 그렇다고 미국의 투자 요구가 갖는 약탈적 성격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종전과 달리 커다란 의미를 갖는 금관 선물이 이 같은 통상교섭에 수반됐다. 이번 교섭의 불평등 성격을 한층 빛내주는 일로 해석될 수도 있다.
1945년 이전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일반적으로 식민지를 보유했다. 반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영국 등은 식민지를 보유하지 않는 정책으로 선회했다. 형식상으로는 약소국의 주권을 존중하면서 실제로는 경제적 지배나 군대 주둔 등을 통해 약소국을 통제했다. 그렇지만 제국주의적 행태는 여전하다는 의미에서 제2차 대전 이후에는 신제국주의라는 표현이 많이 사용됐다.
1945년 이후의 제국주의는 식민지 보유를 추구하지 않다 보니 외형상으로는 노골적 성격을 띠지 않는다. 그래서 식민지를 보유하느냐 않느냐와 더불어 노골적이냐 아니냐도 1945년 이전과 이후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트럼프 제2기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1945년 이전의 그 노골성이 되살아나고 있다. 특히 한국·일본·유럽연합 등은 미국과의 통상협상에서 그것을 많이 경험하고 있다. 그처럼 노골적인 트럼프에게 최고의 의미를 덧붙인 금관을 선물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한미 통상협상의 노골적 성격을 한층 빛내주는 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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