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0.29 15:25최종 업데이트 25.10.29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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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9일 경북 경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최고경영자 서밋(APEC CEO SUMMIT)'에 참석해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트럼프 시대를 연 미국은 과거 '철의 장막'을 걷던 그 손으로 이제 '관세의 장막'을 세우고 있다. 한때 장벽의 서쪽에서 미국과 한편이던 나라나 동쪽에서 그것을 경계하던 나라나, 지금은 같은 처지가 되어 관세 장벽 앞에서 나란히 몸을 웅크리고 있다. 자유무역을 세계 번영의 조건으로 믿던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자유무역의 이상을 좇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는 이제 그 존재 이유를 다시 물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1994년 인도네시아 보고르에서 채택된 '아시아태평양의 자유롭고 개방된 무역(보고르 목표)'은 더 이상 현실의 약속이라기보다 기억 속의 문장에 가깝다. 관세 인상, 보조금 경쟁, 전략산업 보호가 국가 정책의 표준이 된 지금, '자유화'라는 단어는 떠나간 시대의 고어(古語)처럼 들린다.

그럼에도 올해 한국이 APEC 정상회의를 주관한다는 사실은 단순한 순번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자유무역으로의 회귀를 요구하기는 어렵지만, 세계의 단절을 완화할 새로운 조율의 틀을 제시할 기회이기 때문이다. 보호무역 시대에도 교류의 흐름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도록 관리하는 일, 즉 '공급망의 안정성을 공공재로' 만드는 과제가 남는다. 그것이 경주에서 열리는 APEC이 존재 이유를 다시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공급망 안정과 예측 가능성을 새 목표로

28일 경북 경주시 첨성대 앞에서 쌍산 김동욱 서예가가 2025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행사를 맞아 서예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1989년 냉전이 막을 내리던 시기에 APEC은 '자유롭고 개방된 무역'이 번영을 보장한다는 믿음 아래 출범했다. 회원국들은 아시아와 미주를 잇는 하나의 시장을 구상하며, 관세를 낮추고 교역의 흐름을 확대하는 데 뜻을 모았다. 생산은 분업으로, 무역은 개방으로 효율을 높이는 것이 시대의 상식이었다.

이 구상이 본격적인 정상 간 협의체로 격상된 것은 1993년이었다. 개방을 통한 성장, 협력을 통한 평화, 그리고 시장의 통합.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첫 APEC 정상회의는 이처럼 명료한 기조로 출범을 알렸다. 각국은 장벽을 낮추며, '교역의 확대가 곧 성장'이라는 공식에 의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세계는 그 공식에서 급격히 멀어지고 있다. 2018년 이후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시작한 관세 전쟁과 기술 통제는 세계 교역 질서를 뿌리째 뒤흔들었다. 미국이 반도체와 전기차, 철강을 국가안보 품목으로 묶자 유럽은 산업 유출을 막기 위해 보조금 경쟁에 나섰고, 중국은 수출보다 내수와 자립을 중시하는 '이중 순환' 전략으로 돌아섰다.

그 결과 관세는 높아지고 기술의 교류와 산업의 흐름은 국경에서 막혔다. 여기에 지정학적 갈등이 겹치면서, 생산과 공급의 네트워크는 더 이상 하나의 '세계시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문제는 이런 변화가 보호무역을 선택한 나라에조차 완전한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부품의 단절, 운송 경로의 불안, 원자재 가격의 급등은 국경을 막은 나라 안에서도 발생한다.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장벽이 되레 그 산업의 부품과 소재를 끊어놓는 역설이 생긴 것이다.

미국이 반도체와 배터리를 전략산업으로 규정했지만, 그 생산의 절반 이상은 여전히 해외 의존적이라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여기에 더해, 반도체 공정과 전기차 모터에 필수적인 희토류의 70퍼센트 이상이 중국에서 정제되고 있다는 점은 미국이 직면한 현실적 모순을 상징한다. 자국의 기술을 보호하려는 정책이 결국 타국의 원재료에 발목 잡히는 구조적 역설로 이어진 것이다.

미국이 스스로 세운 세계 질서를 스스로 허물고 있다는 비판은 이제 무의미하다. 이미 체계는 무너졌고 되돌릴 수도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무너진 질서 위에서 새로운 균형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것이 이번 APEC에서 한국이 맡아야 할 중재자의 역할이다. 그 가운데 가장 시급한 과제가 바로 '공급망의 안정성을 공공재로 만드는 것'이다.

공급망은 단순한 물류의 경로가 아니다. 그것은 경제의 신경망이다. 이 신경이 끊기면 각국이 생산하더라도 제품은 완성되지 않고, 재고와 물가, 고용까지 흔들린다. 보호무역의 시대일수록 관세를 낮출 수는 없어도, 지연·중복·정보 단절을 줄이는 일은 모두의 이익이 된다. 그런 이유로 APEC은 이제 자유화의 구호보다 공급망의 안정과 예측 가능성을 새로운 목표로 삼아야 한다.

미국은 스스로도 보호주의가 공급망을 위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국내 정치와 안보 전략이 맞물리며 쉽게 물러서지 못한다. 따라서 "개방하라"는 요구는 설득력이 없다. 접근 방식을 바꿔야 한다. 미국이 물러서지 못한다면, 물러서지 않고도 바꿀 수 있는 출구를 열어줘야 한다.

"당신의 보호조치가 오히려 당신의 산업을 약화시키지 않도록 공급망을 함께 관리하자." 이 논리는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유지하면서도 협력의 틀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경로를 제시한다. 자유무역 복귀를 강요하지 않고, 공급망 안정이라는 실질적 이익을 공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 작동하는 합의 만들어내야

이재명 대통령이 29일 경북 경주예술의전당에서 열린 'APEC CEO(최고경영자) 서밋'에서 특별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제 APEC이 존재 이유를 증명할 수 있는 길은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작동하는 합의다. 올해 한국이 주최하는 회의는 그 현실적 조율의 실험장이 되어야 한다. 한국은 트럼프 미 행정부의 관세주의에 대응해 '공급망 협력'과 함께 '인공지능(AI)·탄소중립 기술 교류'를 새로운 공공재로 제시하고 있다.

이 시도는 과거의 수평적 개방, 즉 모든 장벽을 동시에 낮추려 했던 이상에서 벗어나, 산업의 핵심 단계마다 협력의 구조를 다시 세우는 방향이다. 무역의 자유화를 한꺼번에 복원할 수 없다면, 산업의 흐름이 멈추지 않도록 단계마다 조정의 틀을 만드는 것이 더 현실적인 해법이다.

예를 들어 반도체의 경우, 원재료에서 부품, 조립, 통관, 데이터 이동에 이르기까지 핵심 공정별 표준과 절차를 조율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이렇게 공정의 연쇄를 관리하면 관세와 무관하게 흐름의 막힘을 줄일 수 있다. 각국의 산업정책은 다르지만, 물류와 정보의 연결이 끊기지 않게 만드는 일은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결국 APEC의 과제는 다시 하나의 구호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합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산업의 연결망이 멈추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세우는 순간, APEC의 존재 이유는 다시 살아난다.

APEC은 이제 자유무역의 복원도, 폐쇄의 지속도 아닌 연결의 복원을 선택해야 한다. 그 중심에서 한국은 독특한 위치에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와 중국이 주도하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에 모두 참여하고, 일본과 호주가 이끄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추진 중이기 때문이다.

이 세 구도의 교차점에 선 한국은 역내에서 가장 현실적인 중재자일 수 있다. 문화적으로는 서구와 아시아 양쪽의 감수성을 이해할 수 있고, 경제적으로는 개방성과 기술력을 겸비한 생산 거점이며, 외교적으로는 미국·중국·일본 어느 한쪽과도 단절되지 않은 몇 안 되는 국가다. 이런 구조적 균형이야말로 분열된 질서를 조율할 수 있는 토대다.

따라서 한국의 역할은 단순한 개최국이 아니라, 단절된 세계 경제의 조정자, 즉 전환기의 매개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이번 경주 회의가 상징이 아닌 실질로 남는 길이다.

세계가 다시 연결될 첫 움직임

자유무역의 시대가 저물었듯 언젠가 보호무역의 시대도 저물 것이다. 그러나 그 두 질서 사이의 공백과 혼란은, 누군가가 다리를 놓을 때만 짧아진다. 한국은 그 다리를 설계할 만한 역량을 가진 나라다. 개방과 자유사회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그것을 지켜낸 경험, 문화로 소통하는 힘, 그리고 기술과 산업을 결합한 경제적 창의력을 가진 나라다.

이번 경주의 의미는 끊어진 열차의 앞 칸에 끌려가거나, 뒤 칸에 매달려 원망하는 데 있지 않다. 그 사이를 잇는 일, 그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다. 그렇게 세계가 다시 연결될 때, 그 첫 움직임이 한국에서 시작되었다면, APEC은 과거의 제도가 아니라 미래의 서문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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