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29일 경북 경주예술의전당에서 열린 'APEC CEO(최고경영자) 서밋'에서 특별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제 APEC이 존재 이유를 증명할 수 있는 길은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작동하는 합의다. 올해 한국이 주최하는 회의는 그 현실적 조율의 실험장이 되어야 한다. 한국은 트럼프 미 행정부의 관세주의에 대응해 '공급망 협력'과 함께 '인공지능(AI)·탄소중립 기술 교류'를 새로운 공공재로 제시하고 있다.
이 시도는 과거의 수평적 개방, 즉 모든 장벽을 동시에 낮추려 했던 이상에서 벗어나, 산업의 핵심 단계마다 협력의 구조를 다시 세우는 방향이다. 무역의 자유화를 한꺼번에 복원할 수 없다면, 산업의 흐름이 멈추지 않도록 단계마다 조정의 틀을 만드는 것이 더 현실적인 해법이다.
예를 들어 반도체의 경우, 원재료에서 부품, 조립, 통관, 데이터 이동에 이르기까지 핵심 공정별 표준과 절차를 조율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이렇게 공정의 연쇄를 관리하면 관세와 무관하게 흐름의 막힘을 줄일 수 있다. 각국의 산업정책은 다르지만, 물류와 정보의 연결이 끊기지 않게 만드는 일은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결국 APEC의 과제는 다시 하나의 구호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합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산업의 연결망이 멈추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세우는 순간, APEC의 존재 이유는 다시 살아난다.
APEC은 이제 자유무역의 복원도, 폐쇄의 지속도 아닌 연결의 복원을 선택해야 한다. 그 중심에서 한국은 독특한 위치에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와 중국이 주도하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에 모두 참여하고, 일본과 호주가 이끄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추진 중이기 때문이다.
이 세 구도의 교차점에 선 한국은 역내에서 가장 현실적인 중재자일 수 있다. 문화적으로는 서구와 아시아 양쪽의 감수성을 이해할 수 있고, 경제적으로는 개방성과 기술력을 겸비한 생산 거점이며, 외교적으로는 미국·중국·일본 어느 한쪽과도 단절되지 않은 몇 안 되는 국가다. 이런 구조적 균형이야말로 분열된 질서를 조율할 수 있는 토대다.
따라서 한국의 역할은 단순한 개최국이 아니라, 단절된 세계 경제의 조정자, 즉 전환기의 매개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이번 경주 회의가 상징이 아닌 실질로 남는 길이다.
세계가 다시 연결될 첫 움직임
자유무역의 시대가 저물었듯 언젠가 보호무역의 시대도 저물 것이다. 그러나 그 두 질서 사이의 공백과 혼란은, 누군가가 다리를 놓을 때만 짧아진다. 한국은 그 다리를 설계할 만한 역량을 가진 나라다. 개방과 자유사회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그것을 지켜낸 경험, 문화로 소통하는 힘, 그리고 기술과 산업을 결합한 경제적 창의력을 가진 나라다.
이번 경주의 의미는 끊어진 열차의 앞 칸에 끌려가거나, 뒤 칸에 매달려 원망하는 데 있지 않다. 그 사이를 잇는 일, 그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다. 그렇게 세계가 다시 연결될 때, 그 첫 움직임이 한국에서 시작되었다면, APEC은 과거의 제도가 아니라 미래의 서문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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