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1.02 18:40최종 업데이트 25.11.02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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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의 12.3내란은 그가 기습 공격한 한국 인권과 민주주의의 강인함을 역설적으로 증명했다. 우선, 그 자신부터가 내란 실패 뒤에도 고도의 자유와 권리를 누렸다.

지귀연 판사의 구속 취소로 석방된 뒤인 지난 4월 23일에 보리밥집에서 메뉴를 들여다보는 윤석열의 사진이 <오마이뉴스>에 실렸다. 5월 5일엔 동작대교 인근 한강공원에서 반려견 목줄을 쥔 채 앉아 있는 모습이 찍혔고, 6월 12일엔 자택이 있는 서초구 아크로비스타 지하상가에서 반팔·반바지 차림으로 활보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내란특검팀에 의해 재구속된 뒤인 9월 26일에 서울중앙지방법원 보석심리에 출석한 그는 "1.8평짜리 방 안에서 서바이브(생존)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보석을 인용해주시면 아침과 밤에 운동도 조금씩 하고 당뇨식도 하면서 사법절차에 협조하겠다"는 뜻을 표시했다. 이처럼 여유로운 역모죄인은 유사 이래 드물다.

내란음모 조작 사건, 변호인 조력도 막은 신군부

1980년 8월 14일 육군계엄보통군법회의 대법정에서 '내란음모사건' 첫 공판을 받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 왼쪽은 문익환 목사.연합뉴스

조작된 내란사건의 수괴로 몰려 1980년에 투옥된 김대중은 윤석열 같았으면 단 하루도 '생존'하기 힘들었을 고난을 감내했다. 체포 과정부터가 그랬다. 불법적이고 무자비한 것은 둘째 치고, 매우 무례한 체포였다. <김대중 자서전> 제1권은 토요일인 1980년 5월 17일 밤중의 상황을 기술한다.

"10시가 넘어 초인종이 울렸다. 정승희 경호원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검은 그림자들이 문을 밀치고 쏟아져 들어왔다."

"검은 그림자"는 "40여 명의 군인들"이었다. 김대중은 그림자들이 "다짜고짜 M16 소총 개머리판으로 (정승희) 경호원의 머리를 후려쳤다"라고 한 뒤 "다시 이세웅 경호원이 그들을 막아서자 역시 개머리판으로 휘둘렀다"라고 기억했다. "총마다 검이 꽂혀 있었다"라고 한다.

장교 두 명과 군인 대여섯 명은 김대중의 가슴에 총을 겨눴다. 그는 "총구보다 칼이 더 섬뜩했다"라고 기억했다. 칼끝을 가슴에 들이댄 다음에야 그들은 용건을 밝혔다. "합수부에서 나왔습니다. 잠깐 가셔야겠습니다." 적법절차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폭거였다.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에 의해 연행된 김대중은 서울 남산의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갇혔다. 합수부는 "태어나서 최근까지 행적을 자세히 쓰라"라고 지시하면서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모의"에 대해 캐물었다.

5월 17일 심야에 연행된 김대중은 다음날 시작된 5.18 광주학살을 전혀 몰랐다. 그가 광주 소식을 들은 것은 7월 10일이다. 위 자서전에 따르면, 이 날짜를 기억하는 것은 신군부의 막후 실력자인 이학봉 합동수사단장이 그날 찾아왔기 때문이다.

대령인 이학봉은 "당신이 우리와 함께 간다면 대통령만 빼고 어떤 자리라도 드리겠습니다"라고 회유했다. 신군부가 적용한 죄목은 내란음모 및 선동, 계엄법 위반 및 위반 교사, 외국환관리법 위반 등에 더해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이었다. 김대중을 위험한 빨갱이로 몰면서도, 총리직 이하의 직책을 제안했던 것이다. 이 사건이 조작이었다는 점은 이런 데서도 드러난다.

이학봉은 "우리 요구를 거부하면 살려둘 수 없습니다. 반드시 죽이겠습니다"라고 협박한 뒤 "재판은 요식행위에 불과합니다"라고 말했다. 신군부의 결단이 중요하지 재판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로 '재판은 요식행위'라는 말을 했지만, 이런 말을 하려면 재판이 최소한의 격식은 갖췄어야 한다. 이 사건은 그 최소한마저 결여됐다. 그래서 훗날 재심 법정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체포 과정이 불법이고 혐의 자체가 완전 날조인 것은 공안사건에서 흔한 일이지만, 이 재판에서는 '요식행위'라는 표현이 민망할 정도로 기본 형식들이 결여됐다. 변호인 선임을 막은 것이 그 일례다.

김대중처럼 세계적 이목을 받는 인물에게 역적 누명을 씌울 때는, 적어도 재판절차만큼은 합법적인 것처럼 보여주려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재판에서도 인정됐던 변호인 선임권이 김대중 재판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다.

김대중을 포함한 공동피고인 24명 중에는 문익환·이해동 같은 종교인도 있었다. 그래서 세상의 이목이 더 많이 쏠릴 수밖에 없는데도, 신군부는 당시 헌법 제10조 제4항의 변호인 조력권을 침해했다. <김대중 자서전>은 "우리는 피고인이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마저 박탈당했다"라며 "모두에게 관선 변호사를 붙여주었다"고 말한다.

고명섭 한겨레신문사 논설위원의 <이희호 평전>은 인권변호사 박세경 등이 수임하기로 했지만 좌절됐다고 알려준다. "신군부는 박세경과 변호인단을 엉뚱한 죄목을 걸어 잡아들였다"라며 "박세경은 구속되고 나머지 변호사들도 1년 동안 영업정지를 당했다"고 말한다.

신군부가 골라준 국선변호인 대부분은 '검사 II'였다. 김대중은 소종팔을 제외한 나머지 변호인들의 태도를 "변호하는 시늉만 내거나 아예 검사의 논고와 비슷한 취지의 변론을 했다"는 말로써 비판했다. "피고보다 검사 측을 옹호하는 말을 계속"하는 변호사도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피고와 검사, 또는 변호인과 검사가 대립하기보다 피고와 '검사 II'가 대립하는 양상이 법정에서 전개됐다. 김대중은 "피고와 변호사 사이에 삿대질과 고성이 오갔다"고 기억했다. 형사재판이 구비해야 할 최소한의 요건이 깡그리 무시됐던 것이다.

소종팔만큼은 검찰 측이 변변한 증거도 없이 내란죄를 운운하는 데 화가 났다. 그는 터무니없는 검찰 기소의 문제점을 지적하다가 법정에서 쫓겨났다. 변호인이 피고인을 변호했다는 이유로 강제퇴정을 당했던 것이다. <이희호 평전>은 그 뒤 소종팔과는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변호인 조력권이 침해된 것은 신군부가 변호인 선임을 훼방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5·18 광주 학살 직후의 공포 분위기로 인해 변호사들이 겁을 먹은 데도 원인이 있었다. 위 평전은 박세경 변호사가 구속된 뒤 이희호와 박용길(문익환 부인) 등이 "찌는 듯한 삼복더위에 서소문 일대 변호사 사무실을 돌고 돌았다"라며 "100군데가 넘는 사무실을 찾아다녔으나 변호를 맡지 못하겠다는 말만 들었다"고 기술한다. "너무 무서워서 못 하겠다"고 말하는 변호사도 있었다고 한다.

명백하게 조작된 사건

지난 80년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주동자로 몰렸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8일 오후 재심이 열린 서울지법 법정에 출석, 심리를 받고 있다.연합뉴스

'요식행위'의 '식'이 전혀 갖춰지지 않은 기막힌 재판을 치르면서 가톨릭 신자인 김대중은 잠시나마 하늘을 의심했다. "갑자기 하느님 존재에 대한 의심이 엄습했다"고 <김대중 자서전>은 말한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하늘에 간절히 기도했다.

1심인 육군계엄보통군법회의의 선고 기일인 1980년 9월 17일, 재판정에 선 김대중은 속으로 기도하면서 재판장의 입 모양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입술이 옆으로 찢어지면 사, 사형이었고, 입술이 앞쪽으로 튀어나오면 무, 무기징역이었다"라며 "입이 나오면 살고, 찢어지면 죽었다"라고 김대중은 그 순간의 긴장감을 복기했다.

그날 재판장의 입술은 찢어졌다. 11월 3일, 고등군법회의 재판장의 입도 찢어졌다. 1981년 1월 23일 대법원 선고기일에는 재판장의 입 모양이 다소 달랐다. 옆으로 찢어지기는 했지만, 앞의 두 재판 때와는 약간 달랐다. 이날은 "기각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김대중의 상고가 기각돼 2심의 사형선고가 확정됐다.

1980년 8월 27일 대통령 임기를 개시하고 9월 1일 취임식을 가진 전두환은 사형 확정 직후의 국무회의에서 입술을 앞쪽으로 내밀었다. 전두환은 무기징역으로 감형시켰다. 김대중을 살리라는 국제사회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결과다. 김대중의 형량은 1982년 3월 2일 징역 20년으로 감경됐다가 같은 해 12월 22일 형집행정지가 이뤄졌다. 석방된 김대중은 미국으로 강제 망명됐다.

전두환 정권은 6월항쟁 다음 달인 1987년 7월 11일 김대중 사면·복권을 단행했다. 그의 12월 대선 출마를 유도해 야권 지지표를 김대중·김영삼으로 분산시킬 목적이었다. 사면·복권은 이뤄졌지만, 엉터리 같은 재판 자체가 취소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김대중은 대통령 퇴임 8개월 뒤인 2003년 10월 23일 재심을 청구해 2004년 1월 29일 무죄 확정을 받았다.

일반 재심에 비해 초고속으로 진행되기는 했지만, 사건이 조작됐다는 점이 너무도 명백했기 때문에 사건 심리에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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