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림자 꽃>에 나온 김련희씨.
엣나인필름
김련희는 이런 문화 차이가 힘들었으나 적응했다. 하지만 가족을 볼 수 없는 고통은 견딜 수 없고 그러려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렵사리 구한 직장에서 일과를 마치고 방문을 열면 찬바람이 다가왔다. 살림살이라고는 '부루스타', 빨래 건조대, 옷장 대신 쓰는 종이상자 몇 개가 전부다. 밥솥을 열면 차가운 밥덩이가 돌아누워 있었다. 이불을 몇 겹 덮고 온도를 높여도 밤 내 온몸을 휘감는 한기는 어쩌지 못했다.
평양에서는 고독을 모르고 살았다. 외로움이란 단어를 머릿속으로는 이해해도 몸으로 느껴본 적이 없다. 남쪽에서는 전체주의 사회라고 하나 집에는 가족이 있고 직장생활은 총화로 시작해 총화로 끝났다. 토요일은 노동하지 않고 정치학습과 업무능력 향상을 위한 기술토론을 했다. 묘향산과 원산 등 관광지를 갈 때도 정부에서 지정한 날짜에 직장사람과 함께 배정된 숙소에 들었다. 그런 김련희가 '혼자' 산다는 건 가시밭에 누운 격이었다.
김련희는 탈출을 결심했다. 여권만 나오면 결행할 생각이었다. 하나원을 나와 7개월쯤 지난 2011년 9월, 경산시청에 여권을 신청했다. 발급이 거부되었다. 몇 달 뒤 다시 신청했으나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북으로 도망할 가능성, 국가보안법상의 표현을 빌리면 '반국가단체'의 지배지역으로 '탈출'할 우려가 있어 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련희는 여권을 포기하고 밀항하기로 마음먹었다. 조심스레 정보를 수소문했다. 세상에 2천만 원이나 필요하다고? 김련희는 포기하고 위조여권을 알아봤다. 그쪽에서 부른 돈이 250만 원,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진을 보내고 기다리니 이틀 만에 만들었다는 답이 왔다. 그런데 중국비자를 받으려면 돈이 더 필요하다고 모두 500만 원을 내란다. 처음과 말이 달라져 다툼이 벌어졌다. 상대방은 김련희를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위협까지 했다. 김련희는 할 수 없이 먼저 경찰에 신고했다. 그는 '신원특이자'인데, 밀항 시도에 공문서 위조까지 했으니 더 주목받는 처지가 되었다. 경찰의 24시간 감시가 시작되었다.
소원대로 구속되었지만...
하지만 김련희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궁리 끝에 혹시 간첩행위를 하면, 남쪽 땅에서 추방되지 않을까? 감옥에 갇히더라도 2000년 9월 2일 김대중·김정일의 합의로 '장기수'가 송환된 예처럼 북녘땅으로 보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는 희망에 들떴다. 길을 찾은 듯했다. 문제는 어떻게 간첩행위를 하느냐였다. 군사기밀을 탐지할 수도 없고, 고급정보에 접근할 수도 없고.
김련희는 '탈북자 명단을 모아 이를 북으로 전달하려 했다'는 간첩 활동의 얼개를 짰다. 황당한 시나리오지만 김련희는 밀고 나갔다. 주변에 수소문해 17명의 이름을 입수했고, 2014년 6월 2일 경북경찰청 보안수사대에 연락했다. 북에 전달할 정보를 수집했으니 나를 잡아가라고. 하지만 경찰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는 며칠 뒤 다시 보안수사대에 연락해 만나자고 했다. 김련희는 핸드폰을 열어 탈북자 명단을 보여주었다. 정성이 통해서인가, 김련희는 원하던 대로 2014년 7월 19일 구속되어 대구구치소에 갇혔다.
그날부터 김련희는 51번이 되었다. 한 평이나 될까, 24시간 CCTV가 감시하는 독방에서 무더운 여름을 나야 했다. 어느 날 김련희는 더위와 낭패감, 스트레스를 못 견뎌 벽에 머리를 찧었다. 보안과의 교도관이 몰려와 김련희의 손에 수갑을 채웠다. 쇠사슬을 수갑에 걸어 허리에 묶고 이를 발목으로 연결했다. 또 머리에는 눈, 코, 입만 내놓을 수 있는 헬멧을 씌웠다. 찜통 더위는 극성이고 손바닥만 한 창으로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아 김련희는 팥죽땀을 쏟았다. 처음 겪는 징역생활은 그렇게 고통스러웠다.
구속되어 3개월 될 즈음인 11월 21일 그는 생일을 맞았다. 난생처음 감옥 안에서 맞은 생일 아침상을 그는 꾸역꾸역 먹었다. 목숨을 부지해야 딸 련금이도 만나고, 남편도 만날 수 있기에. 그날 김련희는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순시할 때마다 위로의 눈빛을 보내던 한 교도관이 "51번 오늘 생일이죠"하며 꽃 한 송이를 건넸다. 10년 형을 받은 옆방의 한 할머니도 따뜻한 위로를 보냈다. 그런 온기 덕분에 감옥생활을 버텼다.
김련희는 2015년 국선변호인 석명호의 도움으로 2심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고 수감생활 9개월 만에 대구교도소에서 나왔다. 추방되고 싶어서, 벌인 소동이었으나 소득은 없이 징역생활로 몸과 마음만 상하고 말았다.
다시 방법 모색, 이번엔 망명
김련희는 출소해 병원에서 몸을 추스르고 고시원에 작은 방을 얻었다. 1.5평짜리 방, 감옥의 독방보다는 커 갑자기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그는 경산에 있는 어느 재활용공장에 취업했다.김련희는 징역을 산 뒤, 보안관찰 대상이 되어버려 한 달에 두 번 담당경찰서에 출석해 누구를 만났고 무얼 했는지 적어내야 했다. 경찰은 회사로 전화해 특이동향은 없는지 사업주에게 직접 물었다. 탈북자에 전과자, 게다가 경찰은 수시로 연락하고 한 달에 두 번 외출해 경찰에 출석해야 한다면 어느 사업주가 김련희를 품어주겠는가? 회사에선 조용히 나가 달라고 했다. 그는 생계조차도 유지할 수 없는 벼랑으로 몰렸다.
김련희는 그런 지경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추방당하지 못했으나 다시 길을 모색했다. 김련희는 어느 날, 망명을 떠올렸다. 한국에 있는 베트남 공화국의 대사관을 찾아가 망명을 신청해 보자, 북과 베트남은 선린관계이니 사정을 말하면 받아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2016년 겨울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베트남 대사관에 들어가 참사관과 만났다. 그는 김련희의 요청을 들은 뒤 내부에서 논의해 보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곧바로 한국의 경찰이 들이닥쳐 주거 침입으로 김련희를 대사관에서 끌어냈다. 밀항, 위조여권, 간첩되기, 이 모두 좌절되어 마지막이라고 시도한 망명요청마저 거부되고 말았다.
그 뒤로 10여 년 동안 김련희는 재판받고 있다. 베트남 대사관에서 퇴거하지 않은 죄를 포함, 국가보안법상 제6조 잠입탈출·예비음모에 더해 북을 고무·찬양했다는 혐의까지 받고 있다.
김련희는 베트남을 통한 망명이 좌절된 후,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그의 사연이 외신과 국내 언론을 통해서, 또 <그림자꽃>이라는 다큐영화를 통해서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전국을 돌며 강연에 나섰다. 또 페이스북과 유튜브를 개설해 남쪽 동포가 북을 제대로 이해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여러 게시물을 올렸다. 와이파이나 고속도로 통행료, 폭탄세일 같은 일화도 강연과 SNS를 통해 많이 소개되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을 경찰청 보안수사대는 곱게 보지 않았다. 반국가단체를 고무찬양하는 활동으로 바라보고 국가보안법 제 7조를 위반했다고 수사하고 재판에 넘겼다.
그에게는 한국의 '국가보안'을 흔들 어떤 능력도 없다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평양시민 김련희 송환촉구모임 관계자들이 김련희씨와 북 해외식당 종업원 송환 등을 촉구하고 있다. 2018.3.28
연합뉴스
김련희는 수다쟁이다. 남쪽에서 14년을 살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싸우는 전사'가 되었으나 길거리에서 흔히 마주하는 중년 여성이다. 그에게는 한국의 '국가보안'을 흔들 어떤 능력도 없다. 설령 안정을 해칠 능력이 있다면 굳이 붙잡아두고 생존을 '보장'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내보냄이 이익이 아닌가?
국가보안법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서 세계인권선언은 제 13조에서 "누구를 막론하고 어떤 나라(자국을 포함한)에서든지 떠날 수 있으며 또한 자국으로 돌아올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김련희는 원하지 않았으나 대한민국 국적임을 확인받고 이 땅에 편입되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민임을 주장하고 있다. 세계인권선언에 비춰보면 그는 대한민국을 떠날 자유가 있고 조선으로 돌아갈 권리가 있다. 조선 또한 그의 귀향을 막아서면 안 된다.
이재명 정부는 김련희가 고향 가는 길을 열어줄까? 김련희의 바람대로 법무부는 공소를 취하할까? 이것이 부담된다면 재판이 끝난 뒤에라도 출국금지를 풀어줄까?
동서냉전은 진즉에 끝났다. 오늘날 미·중의 대립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이 아니다. 미국은 초강대국의 지위를 놓고 싶지 않고 중국은 G1이 되려 한다. 세계의 패권을 누가 쥘 것인가, 누가 더 많은 시장을 가질 것인가, 하는 강자의 대결이다. 왜 한반도는 아직도 반공주의에 사로잡혀 있어야 하는가? 북이 말하는 적대적 두 국가를 받아들이든, 정동영 장관이 제안하는 평화적 두 국가론을 채택하든, 적대를 누그러뜨리고 공동 번영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헌법 개정을 통해서 영토 조항을 손봐야 한다. 한반도와 부속도서가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조항 때문에 조선이 한반도의 북부를 불법지배한 것이 된다. 북진통일이 대한민국의 숙명이 된다. 사회주의 헌법으로 개정하면서 바뀌었으나 북은 1972년까지 수도를 서울로 두었다. 이 규정으로 한국이 남부를 장악한 반국가 단체가 되었고, 영토 완정은 북의 거스를 수 없는 과제였다. 남북 양측은 이 모순을 언제까지 안고 갈 것인가? 유엔에 가입된 독립국가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한때나마 다른 나라의 서울을 자기 수도로 했던 모순, 남북 양측이 한반도의 두 국가론을 받아들인다면 이런 자기 부정을 끝내야 한다. 헌법에서 영토 조항을 개정하면 자연스레 국가보안법은 없어진다. 남쪽의 대한민국이 선제 조치를 하면 한반도에 훈풍이 불 수 있다. 이재명의 국민주권정부, 집권당이며 다수당인 민주당은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이 복잡한 문제를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 가족 품으로 돌아가겠다는 김련희를 묶어둘 수는 없다. 마흔세 살에 한반도 남쪽에 발을 디딘 김련희, 이제는 육십 고개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날개는 부러지고 깃털마저 뽑힌 작은 새일 뿐이다. 날개를 들어올릴 수 있다면 군사분계선을 휘이훠이 날며 남녘 동포에게 인사를 전하고 가뿐히 휴전선을 넘을 터인데, 김련희의 날갯짓은 평화의 바람을 일으킬지언정, 사나운 총탄과 무서운 포성을 불러오지는 않을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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