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건강보험공단
연합뉴스
따라서 필수의료 영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병원의 책임을 줄이고 국가 예산으로 메우는 길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위험도 수가를 제대로 활용하는 재보험 장치를 마련하는 데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이 낸 돈이 본래 취지대로 쓰이고, 의사와 환자 모두가 정당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이미 우리는 "
의료사고는 누가 책임져야 할까?"라는 글에서 의료사고에서 병원의 책임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의료소송 때문에 필수의료가 무너진다"는 주장 뒤에서 책임은 의료기관이 아닌 국민에게 떠넘겨지고, 병원은 점점 책임에서 벗어나고 있다.
의료는 개별 의사가 아니라 의료기관이 제공한다. 따라서 의료사고의 책임 주체 역시 의료기관이어야 한다. 병원은 진료량이 많아 위험을 분산할 수 있고, 위험도 수가는 바로 이런 대비를 위해 존재한다. 그것은 곧바로 배상금으로 쓰라는 뜻이 아니라, 발생 가능한 위험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라는 취지다. 따라서 배상 총액과 위험도 수가 총액을 단순 비교하며 "부족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소송이 제기되면 곧바로 '의사의 개인 과실'을 다투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병원이 소송을 맡고 의료진을 보호해 주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병원은 빠지고, 변호사 비용조차 의사 개인이 부담하게 만드는 경우가 흔하다. 이런 구조는 병원이 의료서비스를 조직적으로 제공하는 사업체임에도, 위험은 개인에게 전가하고 수익만 병원이 독점하는 비대칭을 낳는다. 의사는 '리스크의 개인화'를, 국민은 '비용의 사회화'를 겪는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면서 정작 책임을 져야 할 병원은 사라진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구조를 바로잡아야 할 의료계 내부의 비판조차 거의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의료사고가 일어나면 병원은 조용히 빠지고, 의사단체는 "국가가 보호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며 정부 탓을 한다. 마치 모든 위기의 원인이 국가에 있는 것처럼 말하면서, 정작 병원 내부의 책임구조와 계약관계의 불합리를 바꾸려는 시도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국가 탓'의 관성은 의료의 자기개혁 능력을 약화시키고, 의료계 스스로 문제를 진단할 언어를 잃게 만들었다.

▲병원은 의료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조정하고 감시할 책임이 있다. 출처: Peters Jr, P. G. (2009). Making Hospitals Accountable. Regulation, 32(2), 30-36. https://www.cato.org/sites/cato.org/files/serials/files/regulation/2009/6/v32n2-5.pdf
Cato institute
각자도생 대신 부담도 함께
해법은 오히려 단순하다. 첫째, 건강보험 진료를 제공하는 모든 의료기관은 건강보험 수가에 포함된 위험도 점수에 해당하는 금액을 의료분쟁 대비 준비금으로 적립해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이 낸 보험료가 본래 취지에 맞게 사용될 수 있다. 배상 금액이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면 준비금으로 자체 적립해도 무방하며, 만약 배상액 규모가 클 것이 우려된다면 배상책임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둘째, 개별 의료기관이 이를 직접 준비하는 것이 부담스럽거나 어렵다면, 정부가 진료비 지급 과정에서 해당 금액을 미리 공제하는 방식도 가능하다(관련 기사 :
미래의료포럼 "쥐꼬리 위험도 수가, 공단이 가져가라").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이렇게 조성한 금액을 활용해, 가칭 의료기관보호기금을 설치하고 이를 기반으로 건강보험 진료와 관련된 전체 소송 위험을 공동으로 관리·보험화하는 체계를 운영하는 것이다.
의료소송의 핵심은 결국 책임을 누가, 어떻게 나눌 것인가의 문제다. 국민은 이미 건강보험료 속 위험도 수가로 의료사고 위험에 대비하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재원을 어떻게 책임 있게 활용하느냐다. 의료의 신뢰는 국가가 모든 책임을 떠안는 데서 오지 않는다. 병원이 스스로 책임을 지고, 의사가 그 안에서 보호받으며, 국민이 낸 돈이 본래 목적대로 쓰일 때 비로소 회복된다. "의료의 끝이 법정인 사회"를 벗어나려면, 의료의 끝에 다시 '신뢰'를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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