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0.28 14:54최종 업데이트 25.10.28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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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추석 같은 긴 휴가철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여행 계획을 세우곤 한다. 누군가는 비행기표와 숙소, 맛집을 일일이 챙기는 자유여행을 택하고, 또 누군가는 모든 것을 한 번에 해결해 주는 패키지여행을 고른다.

편리하다는 장점 덕분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패키지를 찾지만 패키지여행에는 간혹 보이지 않는 함정이 숨어 있다. 예컨대 여행 경비 속에 이미 '여행자 보험료'가 포함되어 있는데, 현지 가이드가 "위험할 수 있으니 보험을 꼭 들어야 한다"며 별도의 보험 가입을 권유하는 상황을 떠올려 보자. 모른 채 따르면 같은 보험에 두 번 드는 셈이다.

패키지여행 사례는 가상이지만, 의료소송에서는 훨씬 더 심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의 건강보험은 '행위별수가제'를 채택하고 있다. 의사의 손을 한 번 거칠 때마다 이에 대한 비용이 책정된다는 뜻이다. 위암 수술을 예로 들면, 입원 기본비용·마취비용·수술비용이 각각 따로 산정된다. 이때 비용은 직접 계산하기 어렵기 때문에, 의료행위에 소요되는 자원의 상대적 비율을 계산해 '상대가치점수'를 만든다. 여기에 환산율을 곱하면 건강보험 수가가 결정된다.

쉽게 말해 병원비는 세트 메뉴가 아니라 단품 메뉴를 시킨 것처럼 계산된다. 예를 들어, 환자 1명에게 위암 수술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숙련된 외과 의사의 수술 시간, 마취과 의사의 시간 투입, 간호 인력의 배치, 수술실 장비 사용 시간, 소모된 실과 수술용 기구, 수술 후 회복실 사용 등이 필요하다. 이 각각의 요소가 차지하는 비중을 수치화해 만든 것이 바로 상대가치점수다.

문제는 이런 비용을 직접 계산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의사와 간호사의 시간, 장비 사용, 약품 소모, 병실 점유 등 수많은 요소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는 각 의료행위가 소모하는 자원의 양을 상대적으로 비교하여 '상대가치점수'를 만들고, 여기에 환산율을 곱해 최종 수가를 정한다.

상대가치점수의 구성김진환

의료소송 문제에 숨어있는 이중부담

이 점수 안에 의료행위 시 발생할 수 있는 사고를 대비한 위험도 점수도 포함되어 있다. 정확한 숫자가 공개되어 있지는 않지만 처음 도입되던 시점에서는 상대가치점수 100점 중 약 1.8점 정도(관련 글 : 상대가치점수의 위험도 상대가치 강화), 제2차 상대가치 연구에서는 1점 정도로 알려져 있다(관련 보고서 : 의료기관 진료비 특성에 따른 건강보험 수가 구성 요인 분석).

2024년 건강보험 진료비 총액 116조 2509억 원 중 위험도 점수가 1% 정도를 차지한다고 가정하면, 약 1조 1625억 원에 해당한다. 요컨대, 국민은 건강보험료를 통해 이미 의료소송 위험에 대비하고 있다.

이전 정부에서 시작된 필수의료 관련 논의에서 의사단체는 꾸준히 의료소송 발생 시 의사의 형사책임을 면제하고, 관련 배상비용은 국가가 부담하라는 요구를 해 왔다. 이런 주장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여 정부는 올해 약 50억 원의 '필수의료 보험료 지원' 예산을 책정했고, 내년 예산에도 30억 원가량 증액된 80억 원 규모의 예산을 배정했다.

필수의료와 관련된 소송 부담이 정말로 의사들이 말하듯 '교도소 담벼락 위를 걷는 심정으로 진료를 봐야 할 정도'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관련 기사 및 보고서 : 산과의사들 "교도소 담벼락 위를 걷는 심정, 국민중심 의료개혁 추진방안에 관한 연구).

의사들이 큰 부담을 느낀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부담이 너무 크니 국가가 대신 책임져야 한다"는 식의 접근은 곤란하다. 이미 국민이 낸 보험료로 소송 위험까지 고려된 비용이 마련돼 있는데, 다시 별도 예산을 들여 국가가 보전해 준다면 이는 명백한 이중부담이기 때문이다.

의료소송에 병원의 책임은 없을까?

국민건강보험공단연합뉴스

따라서 필수의료 영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병원의 책임을 줄이고 국가 예산으로 메우는 길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위험도 수가를 제대로 활용하는 재보험 장치를 마련하는 데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이 낸 돈이 본래 취지대로 쓰이고, 의사와 환자 모두가 정당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이미 우리는 "의료사고는 누가 책임져야 할까?"라는 글에서 의료사고에서 병원의 책임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의료소송 때문에 필수의료가 무너진다"는 주장 뒤에서 책임은 의료기관이 아닌 국민에게 떠넘겨지고, 병원은 점점 책임에서 벗어나고 있다.

의료는 개별 의사가 아니라 의료기관이 제공한다. 따라서 의료사고의 책임 주체 역시 의료기관이어야 한다. 병원은 진료량이 많아 위험을 분산할 수 있고, 위험도 수가는 바로 이런 대비를 위해 존재한다. 그것은 곧바로 배상금으로 쓰라는 뜻이 아니라, 발생 가능한 위험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라는 취지다. 따라서 배상 총액과 위험도 수가 총액을 단순 비교하며 "부족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소송이 제기되면 곧바로 '의사의 개인 과실'을 다투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병원이 소송을 맡고 의료진을 보호해 주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병원은 빠지고, 변호사 비용조차 의사 개인이 부담하게 만드는 경우가 흔하다. 이런 구조는 병원이 의료서비스를 조직적으로 제공하는 사업체임에도, 위험은 개인에게 전가하고 수익만 병원이 독점하는 비대칭을 낳는다. 의사는 '리스크의 개인화'를, 국민은 '비용의 사회화'를 겪는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면서 정작 책임을 져야 할 병원은 사라진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구조를 바로잡아야 할 의료계 내부의 비판조차 거의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의료사고가 일어나면 병원은 조용히 빠지고, 의사단체는 "국가가 보호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며 정부 탓을 한다. 마치 모든 위기의 원인이 국가에 있는 것처럼 말하면서, 정작 병원 내부의 책임구조와 계약관계의 불합리를 바꾸려는 시도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국가 탓'의 관성은 의료의 자기개혁 능력을 약화시키고, 의료계 스스로 문제를 진단할 언어를 잃게 만들었다.

병원은 의료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조정하고 감시할 책임이 있다. 출처: Peters Jr, P. G. (2009). Making Hospitals Accountable. Regulation, 32(2), 30-36. https://www.cato.org/sites/cato.org/files/serials/files/regulation/2009/6/v32n2-5.pdfCato institute

각자도생 대신 부담도 함께

해법은 오히려 단순하다. 첫째, 건강보험 진료를 제공하는 모든 의료기관은 건강보험 수가에 포함된 위험도 점수에 해당하는 금액을 의료분쟁 대비 준비금으로 적립해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이 낸 보험료가 본래 취지에 맞게 사용될 수 있다. 배상 금액이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면 준비금으로 자체 적립해도 무방하며, 만약 배상액 규모가 클 것이 우려된다면 배상책임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둘째, 개별 의료기관이 이를 직접 준비하는 것이 부담스럽거나 어렵다면, 정부가 진료비 지급 과정에서 해당 금액을 미리 공제하는 방식도 가능하다(관련 기사 : 미래의료포럼 "쥐꼬리 위험도 수가, 공단이 가져가라").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이렇게 조성한 금액을 활용해, 가칭 의료기관보호기금을 설치하고 이를 기반으로 건강보험 진료와 관련된 전체 소송 위험을 공동으로 관리·보험화하는 체계를 운영하는 것이다.

의료소송의 핵심은 결국 책임을 누가, 어떻게 나눌 것인가의 문제다. 국민은 이미 건강보험료 속 위험도 수가로 의료사고 위험에 대비하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재원을 어떻게 책임 있게 활용하느냐다. 의료의 신뢰는 국가가 모든 책임을 떠안는 데서 오지 않는다. 병원이 스스로 책임을 지고, 의사가 그 안에서 보호받으며, 국민이 낸 돈이 본래 목적대로 쓰일 때 비로소 회복된다. "의료의 끝이 법정인 사회"를 벗어나려면, 의료의 끝에 다시 '신뢰'를 세워야 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Health Socialist Club 팀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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