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 고추장으로 만든 로제 스파게티. 전혀 느끼하지 않다.
여운규
오래전 업무차 방문한 전북 지역의 어떤 기관에서 기념품을 몇 개 얻었는데, 그중에 토마토 고추장이라는 게 있었다. 지역 특산이라고 했다. 감사히 받긴 했지만, 솔직히 이걸 어디에 쓰는지 몰라서 결국 몇 년을 벽장 속에서 그대로 묵혀뒀다. 토마토하고 고추장이라니. 이게 과연 어울리는 조합인지부터가 궁금했다.
그러다가 며칠 전 우연히 이태리 출신 유명 셰프가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 축구 선수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는 영상을 보게 되었다. 한식이 가미된 퓨전 이태리 음식이 줄이어 나왔는데, 그 마지막은 고추장이 들어간 파스타였다. 아하, 이게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거구나. 그러고 보니 언젠가는 버터를 섞은 고추장이 외국인들에게 인기라는 말도 들어본 적 있다. 그걸 파스타에 응용할 수 있는 거였구나. 나는 금세 호기심이 발동해서 검색을 이어 나갔다.
고추장으로 만드는 파스타를 찾아 보는데 눈에 띄는 게 있었으니 바로 그 토마토 고추장이었다. 스파게티 소스 재료로 딱이라는 거다. 그렇네. 전통적인 파스타 재료인 토마토와 고추장이 합체했으니 이거야 말로 퓨전 그 자체였다. 이거였네. 비로소 눈이 밝아지는 느낌이 들면서 곧바로 벽장에 넣어둔 토마토 고추장 단지를 찾아봤는데, 아쉽게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아마도 유통기한을 훌쩍 넘기는 바람에 어느 순간 폐기해 버린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좀 작은 용기에 든 것을 별도 주문했다.
조심스레 찍어 먹어 보았다. 토마토 고추장은 일반 고추장에 비해 단맛이 두드러지는 대신 짠맛은 좀 덜하다. 대체로 약간 달달한 고추장이라고 보면 된다. 토마토의 새콤한 향도 조금이지만 느껴진다. 스파게티 소스로 쓸 때는 생크림과 버터를 섞어서 로제 파스타처럼 만드는 게 가장 좋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부드러운 크림과 고추장이 섞이면서 진하고 깔끔한 맛이 완성됐다. 느끼함이 전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크림 파스타 싫어하는 사람들도 이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날 저녁, 영화나 볼까 하고 거실에 앉았다. 뭔가 주전부리가 없나 찾다가 국 끓이고 남은 황태채를 발견했다. 그렇다면 찍어먹을 소스도 필요한 법.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토마토 고추장을 다시 곁들여 보았는데 이게 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일반 고추장보다 약간 덜 짜고 달달하다는 점이 찍어먹는 소스로서도 큰 장점이었다. 고추장의 달콤한 변신이라 할 만했다.
아, 이걸 왜 몰랐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버리지 않는 건데. 나는 황태를 씹으며 크게 후회했다. 한편으로는 기업과 지자체에서 이걸 어떻게 요리해 먹는지에 대해서도 좀 더 적극적인 홍보를 했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반복되는 일상은 소중하지만 때로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그럴 때는 자극이 필요한 법이다. 재미있고 건강한 자극 말이다. 큰 돈이 드는 거창한 이벤트가 물론 제일 확실한 방법이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을 때, 난생 처음 보는 양념 한 종지가 그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잘만 하면 집안에 앉아서 여행 간 기분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익숙하던 식재료가 낯선 양념을 만나서 전혀 다른 맛의 음식으로 변하고, 늘 먹던 고추장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도 나름 멋진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똑같이 흘러가던 내 인생에도 잘만 찾아보면 그런 기회가 숨어있는 건 아닐까. 우리 삶에 느닷없이 나타나 점 하나 찍어 줄 알싸한 양념이 어디 없을까. 한번 찾으러 나서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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