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0.24 06:53최종 업데이트 25.10.24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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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맛은 무엇으로 결정될까? 다양한 답이 있겠지만, 크게 보면 두 가지다. 첫째는 재료고 둘째는 양념이다. 신선하고 좋은 재료는 음식의 기본이다. 제아무리 솜씨 좋은 요리사도 주어진 재료가 나쁘다면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기 어려울 것이다. 식재료의 맛을 끌어올리는 양념은 그 다음의 문제다. 어떤 양념을 어느 정도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같은 재료라도 완전히 다른 음식으로 변신하게 된다.

각 지역마다 발달한 고유의 음식은 그곳의 기후와 풍토에 맞는 식재료와 양념이 결합된 결과다. 같은 재료를 쓰더라도 지역마다 양념이 다른 경우도 많다. 그러다 보니 한 지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대체로 비슷한 양념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며, 어릴 때부터 익숙해진 양념 맛에 대한 선호는 평생을 두고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다. 젓갈을 많이 넣어 진득하고 강한 맛을 내는 남쪽의 김치를 먹고 자란 사람들이 국물 흥건하고 슴슴하게 담근 북쪽의 김치 맛에 선뜻 적응하지 못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분명 둘 다 김치인데, 어찌 보면 참 다른 음식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평소 접해보지 않았던 양념들이 우리 입맛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기도 한다. 익숙하게 보던 식재료를 사용해 늘상 해 먹던 음식이라 하더라도 양념 하나만 바꿔주면 전혀 다른 매력으로 다가오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맛이라 처음엔 낯설고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두 세 번 경험하다 보면 나름의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맛이 있다니. 이걸 이렇게 해 먹을 수도 있는 거였구나. 그런 경험으로 인해 우리 식생활이 더 풍부해 질 수 있다는 건 참 매력적인 일이기도 하다.

다른 나라와의 교류가 많아지고 외국 음식에 대한 경험이 늘어나면서 그만큼 낯선 소스를 접할 기회도 많아지고 있다. 그와 더불어 전통적인 우리 양념 또한 나름의 변신을 시도하기도 한다. 우리 식탁을 좀 더 다양하게 만들어 주는 이색 양념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이색적이라고는 하지만 알고 보면 인터넷으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것들이다.

타힌, 멕시코의 새콤한 고춧가루

새콤 짭짤한 고춧가루 타힌(Tajin). 멕시코 사람들의 필수 양념이다.여운규

타힌(Tajin))은 멕시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고추 시즈닝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맵부심은 하늘을 찌르지만, 사실 고추만 놓고 보면 멕시코가 한 수 위라고 볼 수 있다. 멕시코 고추는 종류도 조리법도 다양하고, 매운 맛의 스펙트럼도 훨씬 넓다고 한다. 언젠가 방송에서 멕시코 사람들이 과일에 고춧가루를 뿌려 먹는다고 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아아, 저 사람들 정말 진심이구나. 나는 약간 겸손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어떤 유명 방송인 출신 유튜버가 골뱅이 요리를 하다가 "이런 게 있다"면서 타힌 가루를 꺼내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아보카도에 뿌려도 좋고 각종 과일이며 채소에 쓸 수 있다고 했다. 검색해보니 망고에 뿌리면 제일 맛있다고 한다. 아 그럼 그 때 멕시코 사람들이 뿌리던 고춧가루가 혹시 이 타힌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장 한 병 주문해 보았다.

타힌은 고춧가루에 말린 라임 가루와 소금을 섞어 만든다. 살짝 찍어 맛을 보면 매운 맛은 강하지 않은 대신 찌르는 듯한 신맛과 짠맛이 인상적이다. 고춧가루에 뭘 많이 섞었다는 점에서는 일본의 시치미와도 유사하지만 맛은 많이 다르다. 샐러드에 드레싱 대신 쓰라고 했으니 오이와 당근을 썰어서 그 위에 뿌려봤다. 오호. 제법 낯설지만 또한 매력적인 맛이었다. 특히 당근의 단맛과 잘 어울리는 점이 인상적이다. 아마도 라임의 산미가 단맛과 만나 새콤달콤을 완성하는 것 같다. 아, 이래서 망고에 뿌리는구나. 금방 이해가 됐다. 내친 김에 월남쌈에도 활용해 보았는데 꽤 괜찮았다. 알고 보니 멕시코 사람들은 맥주 마실 때 이걸 잔 입구에 발라서 즐긴다고 한다.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맥주가 그냥 들어갈 듯하다.

쿰쿰하고 시큼한 노천추의 매력

노천추는 만두를 찍어 먹기에 딱 좋은 식초다. Gemini 로 배경을 합성했다.여운규

노천추(라오천추, 老陈醋)는 수수, 완두콩 등으로 발효시켜 만든 흑식초다. 짙은 검은색 액체라서 간장으로 오인하기 쉽고, 음식에 짙은 색을 내는 데 주로 쓰이는 노추(老抽)와 혼동되기도 하지만, 노추는 간장이고 노천추는 식초다. 쿰쿰한 발효취와 함께 깊고 진한 신맛을 낸다. 훠궈나 마라탕을 파는 식당에 가보면 쉽게 볼 수 있는 조미료다. 톡 쏘는 마라 향과 잘 어울린다. 마라탕 먹을 때 반드시 넣어 드시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나라 가정에서 마라탕을 만들어 먹는 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그렇담 저걸 사서 어디에 쓰나 싶겠지만, 노천추는 만두를 찍어 먹을 때 매우 유용하다. 마트에서 산 냉동만두를 찌거나 구워서 먹을 때 우리는 주로 초간장 양념을 만든다. 진간장에 식초를 섞고 고춧가루를 많이 뿌려서 끈끈하게 만든 다음 거기에 만두를 찍으면 고춧가루가 듬뿍 묻어 올라온다. 그게 우리가 만두를 먹는 기본 공식인 건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만두 먹을 때 노천추만 있으면 간장을 섞지 않아도 충분하다여운규

그런데 그 간장 종지 옆에 저 노천추를 같이 두고 번갈아가며 찍어 먹어보자. 만두 먹는 재미가 배가 된다. 식초라고는 하지만 사과식초의 신맛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산미다. 신김치에서 나는 신맛과도 비슷한 듯 다르다. 이게 알고 보면 산의 종류가 달라서 그런 것인데, 하여간 뭔가 다른 경지다. 곡물을 발효시킬 때 나오는 묵직한 산미가 매력적인 식초다. 굳이 간장을 섞지 않아도 홀로 충분히 만두의 기름기를 잘 씻어준다.

고추장의 달콤한 변신, 토마토 고추장

토마토 고추장으로 만든 로제 스파게티. 전혀 느끼하지 않다.여운규

오래전 업무차 방문한 전북 지역의 어떤 기관에서 기념품을 몇 개 얻었는데, 그중에 토마토 고추장이라는 게 있었다. 지역 특산이라고 했다. 감사히 받긴 했지만, 솔직히 이걸 어디에 쓰는지 몰라서 결국 몇 년을 벽장 속에서 그대로 묵혀뒀다. 토마토하고 고추장이라니. 이게 과연 어울리는 조합인지부터가 궁금했다.

그러다가 며칠 전 우연히 이태리 출신 유명 셰프가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 축구 선수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는 영상을 보게 되었다. 한식이 가미된 퓨전 이태리 음식이 줄이어 나왔는데, 그 마지막은 고추장이 들어간 파스타였다. 아하, 이게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거구나. 그러고 보니 언젠가는 버터를 섞은 고추장이 외국인들에게 인기라는 말도 들어본 적 있다. 그걸 파스타에 응용할 수 있는 거였구나. 나는 금세 호기심이 발동해서 검색을 이어 나갔다.

고추장으로 만드는 파스타를 찾아 보는데 눈에 띄는 게 있었으니 바로 그 토마토 고추장이었다. 스파게티 소스 재료로 딱이라는 거다. 그렇네. 전통적인 파스타 재료인 토마토와 고추장이 합체했으니 이거야 말로 퓨전 그 자체였다. 이거였네. 비로소 눈이 밝아지는 느낌이 들면서 곧바로 벽장에 넣어둔 토마토 고추장 단지를 찾아봤는데, 아쉽게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아마도 유통기한을 훌쩍 넘기는 바람에 어느 순간 폐기해 버린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좀 작은 용기에 든 것을 별도 주문했다.

조심스레 찍어 먹어 보았다. 토마토 고추장은 일반 고추장에 비해 단맛이 두드러지는 대신 짠맛은 좀 덜하다. 대체로 약간 달달한 고추장이라고 보면 된다. 토마토의 새콤한 향도 조금이지만 느껴진다. 스파게티 소스로 쓸 때는 생크림과 버터를 섞어서 로제 파스타처럼 만드는 게 가장 좋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부드러운 크림과 고추장이 섞이면서 진하고 깔끔한 맛이 완성됐다. 느끼함이 전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크림 파스타 싫어하는 사람들도 이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날 저녁, 영화나 볼까 하고 거실에 앉았다. 뭔가 주전부리가 없나 찾다가 국 끓이고 남은 황태채를 발견했다. 그렇다면 찍어먹을 소스도 필요한 법.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토마토 고추장을 다시 곁들여 보았는데 이게 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일반 고추장보다 약간 덜 짜고 달달하다는 점이 찍어먹는 소스로서도 큰 장점이었다. 고추장의 달콤한 변신이라 할 만했다.

아, 이걸 왜 몰랐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버리지 않는 건데. 나는 황태를 씹으며 크게 후회했다. 한편으로는 기업과 지자체에서 이걸 어떻게 요리해 먹는지에 대해서도 좀 더 적극적인 홍보를 했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반복되는 일상은 소중하지만 때로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그럴 때는 자극이 필요한 법이다. 재미있고 건강한 자극 말이다. 큰 돈이 드는 거창한 이벤트가 물론 제일 확실한 방법이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을 때, 난생 처음 보는 양념 한 종지가 그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잘만 하면 집안에 앉아서 여행 간 기분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익숙하던 식재료가 낯선 양념을 만나서 전혀 다른 맛의 음식으로 변하고, 늘 먹던 고추장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도 나름 멋진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똑같이 흘러가던 내 인생에도 잘만 찾아보면 그런 기회가 숨어있는 건 아닐까. 우리 삶에 느닷없이 나타나 점 하나 찍어 줄 알싸한 양념이 어디 없을까. 한번 찾으러 나서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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