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쩔수가없다> 스틸컷
CJ ENM
얼마 전 유만수와 비슷한 나이대인, 한국 사회의 척추를 이루는 40대 사망 원인에서 자살이 1위를 차지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연령대별로는 10대, 20대, 30대, 40대에서 자살이 사망 원인 1위를 차지했다. 40대에서 자살이 사망 원인 1위로 올라선 것은 1983년 관련 통계 작성 이래 처음이다."(<한겨레>)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짐작건대 핵심 이유는 실직 등 경제적 문제다. 생존 경쟁에서 다른 사람을 파괴하지 못하면 자신을 파괴하게 된다. 만수가 경쟁자를 제거하려는 이유다.
엉겁결에 구범모를 없앤 유만수는 점차 옅어지는 죄의식과 함께 고신조, 최선출을 없애는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영화에서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은 만수의 해고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입장에 선 이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다. 해고하는 쪽도, 만수처럼 당하는 쪽도, 만수가 부러워하는 자리에 있는 최선출 같은 이도, 그 자리를 욕망하는 만수도 각기 "어쩔 수가 없다"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관객은 기본적으로 만수의 시점에서 영화에서 벌어지는 황당하면서도 씁쓸한 소동을 보고 해석하게 된다. 무너지는 중산층의 꿈, 잃어버릴 멋진 집과 붕괴할 위험에 처한 단란한 가족을 앞에 두고, 만수는 가장으로서 심각한 자부심의 위기에 처한다. <어쩔수>를 자부심을 지키려고 극단적 행동을 감수하는 중년 남편, 아버지, 노동자의 몸부림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만수만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는가? 황당하게 죽게 되는 구범모를 두고 그의 아내 이아라(염혜란)는 "실직이 문제가 아니라 실직에 대처하는 태도가 문제"라고 힐난하지만, 정말 그럴까? 제거 대상으로 연이어 사라지는 고신조, 최선출도 그들만의 살아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만수의 행복을 위해 제거된다.
<어쩔수>는 그들의 이야기를 더 파고들기보다는 우당탕하는 소란 속에 간신히 상황을 수습하고 재취업에 성공한, 그 와중에서 은연중 공모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만수와 미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감독이 아이러니를 의도했는지 모르겠지만, 만수의 다른 자아라고 할 수 있는 구범모, 고신조, 최선출의 죽음 위에 세워진 영화의 결말이 나는 불편하다. 이 시대에는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부당한 희생을 전제한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만수는 실직 공포 없이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까? AI에 기반을 둔 자동화 공장에서 홀로 일하는 결말부 만수의 모습, 기계에 의해 뿌리가 뽑히는 나무들의 처참한 모습으로 영화는 끝난다. 제지업이 자동화 때문에 더는 인간 노동이 필요 없어지듯이, 만수도 자동화 기계로 인해 곧 사라지게 될 거라는 착잡한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무엇이 "어쩔 수가 없"는 것인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인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인가? 뛰어난 문학, 영화는 답을 주는 게 아니라, 물어야 할 질문을 예리하게 제기한다. <어쩔수>는 그런 질문을 감당한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