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황만금: 올림포스와 골고다를 넘어서> 겉표지
한울아카데미
황만금, 강제이주당한 한국인의 성공 이야기
황만금은 1919년 5월 1일 출생했다.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선포(4.13)되고 서울에서 또 다른 임시정부가 선포(4.23, 한성임시정부)되고, 3·1운동의 영향으로 중국에서 5·4운동이 일어나던 격동기의 출생아였다.
출생지는 두만강 인근인 노보키예프(지금의 크라스키노)다. 1921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위의 황만금 전기에 따르면 황만금 본인이 '1919년에 노보키예프에서 태어났다'고 아들인 스타니슬라프 티모페예비치에게 일러줬다고 한다.
한국인들이 두만강 이북의 러시아 연해주를 향해 본격적으로 이주한 것은 1860년대다. 연해주는 청나라와 영국·프랑스의 제2차 아편전쟁(1856~1860)의 평화협상을 중재한 대가로 러시아가 청나라로부터 할양받은 땅이다.
러시아가 한국인 이민을 허용한 것은 자국 국민이 많지 않은 이곳을 한국인들의 힘으로 개척하고 이를 발판으로 청나라를 견제하며 극동정책을 펼치기 위해서다. <재외동포사 총서 13: 중국 한인의 역사 (상)>은 "러시아는 적극적인 극동개발정책에 따라 연해주 지역에서 본격적인 개척을 진행하였다"라며 "개척에 수요되는 인적 자원을 해결하기 위해 한인들의 연해주 이주를 적극 권장하였다"고 설명한다.
고국 가까이에서 태어난 황만금은 항해사를 꿈꾸며 성장했다. 그러나 동쪽 바다로 나갈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도리어 서쪽 초원지대로 끌려갈 운명이 주어졌을 뿐이다. 황만금 전기는 그의 일가가 두만강에서 동북쪽 약 700킬로미터인 하바롭스크로 이주한 일을 언급한 뒤 "그곳에서 만금은 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받았다"면서 이렇게 서술한다.
"학교 취주악단의 축하 음악이 졸업식에서 울려퍼지고 대학 입학시험을 막 마친 그때, 연해주 한인들에게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무지막지한 명령이 떨어졌다. 바로 강제이주였다!"
"1937년 8월 21일, 소비에트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및 소비에트연방 인민대표자회의는 스탈린 및 몰로토프의 서명하에 연해주 내 한인의 중앙아시아 및 카자흐스탄 이주에 대한 조례를 확정했다. 이 정책의 정당성으로 제시한 이유는 '일본의 첩보행위를 진압하기 위함'이었다."
러시아는 청나라를 견제하고자 한국인들의 연해주 이주를 장려했다. 그 후신인 소련은 일본을 견제하고자 한국인들을 거기서 몰아냈다. 이 때문에 열여덟 살 나이로 쫓겨간 황만금의 이후 행적을 한국콘텐츠진흥원이 펴낸 온라인 자료인 '황만금: 고려사람-인물은행'은 이렇게 요약한다.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된 후 타쉬켄트 남부의 안기율의 목화공장의 공급자로 노동활동을 시작한 황만금은 타쉬켄트 철도관리 경영책임자, '레닌의 길' 콜호즈 지도자, 북치르칙구역 당(黨) 관리자로 일하며 지도자로서의 경험을 쌓아나갔다."
그러다가 34세 때인 1953년에 과거의 늪지대였던 폴리타젤을 맡게 됐다. 당시 이 농장은 파산 직전이었다. 황만금 전기는 농장이 국가에 진 빚이 "천문학적인 수치"였다고 말한다. 이곳에 그가 파견된 것은 부채 문제가 있었던 콜호즈를 정상화시킨 과거의 실적이 고려됐기 때문이다.
농장의 문제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황만금 전기에 따르면, 조합원들은 대낮에도 술에 빠져 지내고, 조합 업무가 아닌 부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집단농장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다가 도로마저 부실해 가을과 겨울에는 진흙이 무릎까지 닿았다.
한숨만 나오는 이런 곳의 책임자가 된 황만금은 음주 문제부터 손을 댔다. 근무시간에 술을 마시면 가차 없이 징계했다. 또 인맥을 타고 임명된 간부들을 해고하고 전문성과 실력을 기반으로 간부진을 교체했다. 그러면서 진흙 길을 밤낮으로 헤집고 다녔다. 그 자신이 모범적으로 일하면서 조합원들의 노동 의욕을 자극했다.
이 농장은 얼마 안 가 급격한 번영을 누리며 소련 지도부의 주목을 받게 됐다. 파견된 지 4년이 좀 안 되는 1957년 1월, 그는 중앙정부로부터 '사회주의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훗날 일본인 무용가가 발레극장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날아갈 정도로 이곳은 소련 최고의 모범농장으로 성장했다. 내각위원회 국가상과 표창장, 3차례의 레닌훈장, 10월혁명훈장 등은 그의 실적을 웅변한다.
황만금의 성공은 공산주의 집단농장의 성공이기에 앞서, 우즈베키스탄으로 추방된 한국인들의 성공이다. 황만금 같은 지도자가 진흙 속을 누비며 악착을 떨었기에 그곳 한국인들이 그와 함께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황만금의 운명은 1985년에 미하일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이 등장해 개혁·개방을 표방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신정권은 그를 구체제의 잔재로 간주하고 감옥에 가뒀다. 하지만 그는 1989년에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난 뒤 폴리타젤집단농장 명예회장이 되어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여생을 보냈다. 우즈베키스탄이 독립된 지 6년 뒤인 1997년에 향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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