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0.18 10:23최종 업데이트 25.10.18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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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사건이 유난히 많았던 1950~60년대에 적발된 간첩 혐의자 중에는 대학 학력자가 많았다. 국가정보원이 2007년에 펴낸 과거사 보고서인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제6권에 따르면, 1951년부터 1969년까지 적발된 혐의자 3369명 가운데 학력이 확인된 사람은 2515명이다. 이 중에서 대학에 재학 중이거나 중퇴했거나 졸업한 사람은 12.2%인 308명이다.

국가데이터처(통계청)의 'e-나라지표'가 한국교육개발원의 <교육통계분석자료집> 등을 근거로 제시한 통계에 따르면, 1980년에 고등교육기관 취학률은 대학 입학이 가능한 적령인구 중의 11.4%였다. 위 통계와 이 통계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1960년대까지의 간첩 혐의자 중에 대학 학력자가 많았다는 점은 그로부터 10~20년이 지난 1980년의 취학률에서도 확인된다.

그런데 위의 2515명 중에 대학원 학력자는 전혀 없었다. 위 국정원 보고서에 따르면, 대학원을 다녀본 사람이 간첩 혐의자로 입건된 것은 1971년 이후다. 이해에 적발된 127명 중에서 학력이 확인된 사람은 74명이고, 그중 5명이 대학원을 졸업한 석사 이상이었다.

1973년 5월 28일경 서울시 영등포구 화곡동(1977년부터 강서구)에서 체포된 재일교포 최창일도 대학원 석사과정을 이수했다. 1974년 6월 3일 자 서울고등법원 판결문은 1941년 일본에서 출생한 그가 히로시마대학 지질학과를 졸업한 뒤 도쿄대학 자원개발공학과 석사과정을 이수했다고 알려준다.

최창일은 체포 2개월 전부터 서울대 자원공학과 시간강사를 겸했다. 1967년 3월경 함태탄광 도쿄지점에 입사한 그는 그해 10월 무렵부터 서울 본사에서 일하다가 1973년 3월에 서울대 강사로 임용됐다. 1960년대에 대학원을 나온 사람이 연고도 별로 없고 언어도 잘 통하지 않는 데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은 당시 일본 사회의 극심했던 한국인 차별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트렌드에 부합하는 희생양으로 선택

KBS 다큐인사이트 “스파이”KBS

그가 검거된 1973년에는 간첩으로 적발된 64명 중에서 학력이 확인된 39명 가운데 9명(23.1%)이 대학원 졸업자였다. 그는 간첩 혐의자들의 학력이 높아지기 시작하는 추세 속에서 검거됐다. 그는 또 다른 측면에서도 비교적 새로운 유형의 간첩 혐의자였다. 남파간첩(직파간첩)이나 고정간첩이 아닌 우회간첩의 혐의가 그에게 주어졌다.

종래의 간첩 혐의자들은 주로 남파간첩 혐의를 받았다. 휴전선이나 한반도 해상을 통해 파견됐다고 알려진 간첩 혐의자는 1951년부터 1969년까지 2802명이었다. 그다음은 남한 내에 생활기반을 갖고 활동하는 395명의 고정간첩 혐의자다.

이 기간에 일본을 우회하는 방법으로 파견됐다고 알려진 혐의자는 90명이다. 남파간첩·고정간첩과 이 같은 일본우회간첩 외에도, 제3국을 우회해 한국에 들어오는 간첩, 남북어부였다가 북의 밀명을 받고 송환된 간첩 등등의 유형이 있었다.

1969년까지는 얼마 되지 않았던 일본우회간첩 혐의자는 1970년대에 많아졌다. 1970~1979년에는 직파간첩 혐의자(287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것이 183명의 일본우회간첩 혐의자다. 이 기간에 고정간첩 혐의자는 156명이다. 최창일은 일본우회간첩이 많아지기 시작한 시점에 붙들렸다.

1970년부터 우회간첩이 많아진 것은 경의선 열차 폭파(1967), 청와대 습격미수(김신조 사건, 1968),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1968), 푸에블로호 나포(1968), 주문진 무장공비 침투(1969) 같은 한반도 무장충돌이 1960년대 후반에 격증해 남북 경계선의 경비 활동이 부쩍 강화된 결과다.

최창일을 검거한 기관은 경찰·검찰·중앙정보부(국정원) 어느 쪽도 아니다. 1977년에 국군보안사령부로 개칭될 보안부대다. 차별이 심한 일본을 피해 한국으로 건너와 직장을 두 개나 잡고 열심히 살아가던 최창일이 보안부대의 레이더에 걸린 것은 의심받을 만한 활동을 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는 대학원 학력 간첩들이 검거되기 시작하고 일본우회간첩이 많아지는 1970년대 초반의 최신 트렌드에 부합하는 희생양으로 그가 선택된 결과라고 이해해도 과하지 않다. 보안부대는 간첩으로 지목할 만한 증거도 전혀 없는데도 그를 과감하게 체포했다. 검거한 뒤에는 그의 고학력과 '일본 우회'를 특별히 강조했다. 그 두 가지가 강조됐다는 점은 국군보안사령부가 1978년에 펴낸 <대공활동사>에서 확인된다.

진실화해위원회의 <2024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제19권 '재일동포 최○일 인권침해사건'에 인용된 <대공활동사>는 "일본에서 히로시마대학을 거쳐 동경대학원 공학부를 수료하고 서울공대 자원공학과 강사를 역임한 인테리", "함태탄광 내에 지하당을 조직하여 간부를 포섭·입북시키라는 지령을 받고 일본을 거쳐 함태탄광 근무를 구실로 6차례나 왕래", "산업계에 침투한 대표적 지식인 간첩 중 한 명" 등의 표현을 썼다. 최창일을 엮으면 최신 트렌드에 맞는 간첩을 체포하는 실적을 쌓게 된다는 인식이 없었다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위의 진실화해위원회(진화위) 보고서에 따르면, 최창일이 간첩으로 지목된 핵심 근거는 한일을 오가며 대남공작지도원 야마모토에게 국내 기밀을 제공했다는 것이었다. "야마모토에게 무사히 귀국했다는 서신을 작성하여 우송", "함태탄광 정보와 국내 생활상 등의 정보를 제공", "함태탄광 본사 직원명단을 제출하고 남한의 생활상으로 공업 발달이 더디어 실업자가 많다는 등의 국가기밀을 누설" 등등이 근거로 제시됐다.

대법원, 재심 소송에서 무죄 확정

2024년 5월 23일 최창일씨에 대한 재심을 맡은 항소심 재판부의 무죄 선고 이후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고 최창일씨의 딸 최지자씨(오른쪽 두번째)와 최정규 변호사(왼쪽 두번째)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변상철

그처럼 부실한 내용들과 함께, 최창일이 입북해 사상교육을 받았다는 등의 허무맹랑한 근거도 제시됐다. 그가 입북한 증거가 확실했다면, 일본인에게 한국 도착 사실을 알리고 회사 사정과 한국 생활상을 이야기한 것까지 무리하게 증거로 제시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일본인들을 만나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쉽게 입증될 수 있었다. 쉽게 입증될 만한 사실에 대해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쪽으로 수사가 진행됐다고 볼 수 있다.

또 최창일이 국내에서 신문을 읽은 것과 정치상황에 관심을 가진 것도 간첩죄의 증거로 제시됐다. 진화위 보고서에 따르면, 보안부대는 "야마모토 지령에 의해 국내에서 각종 신문 등을 탐독하고 국회의원 겸직 파동 등에 대한 정보를 탐지"한 것도 간첩활동이었다고 주장했다. 1970년대의 일부 공안수사관들이 얼마나 손쉽게 월급을 받았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이 사건에서는 수사절차상의 하자도 심각했다. 진화위 보고서는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보안사가 재일동포인 최○일을 영장 없이 연행하여 60일 이상 장기간 구금한 점 등"을 지적했다. 한국어가 서툰 재일교포에게 가혹행위를 가해 유리한 진술을 끌어내려 한 것도 문제점으로 꼽혔다. 당시 보안부대 수사관인 변아무개는 최창일이 조사받던 시기에 이런 수사기법이 있었다고 진화위에 진술했다.

"당시 서빙고분실에는 아파트에 비유하자면 베란다 같이 생긴 곳에 1층과 2층을 연결한 의자가 있었다. 이 의자에 앉혀놓고 조사를 하다가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경우 수사관이 버튼을 누르면 의자가 지하로 떨어트리는(떨어지는) 식이었는데 이것을 엘리베이터라고 불렀다. 피의자에게 겁을 주고 공포감을 주기 위해 사용했었다."

위 진술 중에서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경우"는 '원하는 답변이 나오지 않는 경우'로 수정돼야 마땅하다. 공포스런 분위기 속에서 수사가 진행됐는데도 법원은 최창일의 유죄를 손쉽게 인정하고 높은 형량을 선고했다.

1심인 서울형사지방법원은 간첩방조나 기밀탐지 등에 관한 일부 공소사실을 무죄로 인정하면서도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선고했다. 서울고등법원은 1심에서 일부 무죄로 인정된 부분을 유죄로 뒤집으면서 동일 형량을 선고했다. 이 형량에 대해 최창일도 불복하고 검찰도 불복해 3심이 신청됐지만, 대법원이 양쪽의 상고를 모두 기각해 형이 확정됐다.

엉터리 같은 간첩사건으로 69일간이나 보안부대에 구금됐다가 징역형을 받은 최창일은 1979년 광복절 때 가석방됐다. 한국인 차별이 없는 일본을 벗어나 고국에서 직장을 두 개나 얻은 그는 그 기쁨을 오래 누리지 못했다. 고국은 일본인들의 차별보다 더한 고통을 그에게 안겨줬다.

박정희 정권의 간첩조작에 휘말려 32세 나이로 인생을 빼앗긴 최창일은 57세 되는 1998년에 뇌출혈로 눈을 감았다. 2024년 5월 14일 진실화해위원회는 "중대한 인권침해"를 인정하는 진실규명결정을 내렸고, 같은 해 11월 14일 대법원은 재심 소송에서 최창일의 무죄를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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