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8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소속 장애인 활동가들이 부산을 찾아 이동권 등 장애인 권리 쟁취를 위한 결의대회를 열고, 부산역에서 교대역까지 도시철도 전동차 탑승에 나선 모습.
김보성
여성학자이자 평화학 연구자인 정희진은 <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 2005)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통찰을 제시한 바 있다.
"모든 사람은 한 가지 정체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다중적 주체인데, 인간을 성별이나 피부색을 기준으로 '여성', '흑인'으로 환원하여 규정하는 것이 바로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 등 다중적 정체성을 지닌 K라는 장애인이 있다고 하자. 그를 장애인으로만 환원할 때, 그것이 바로 장애차별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K는 장애인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여성이자, 성소수자이며, 노동자이자 빈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장애인이 아니라, 구체적인 한 인간으로서의 K를 위한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하나? 적어도 '장애인을 위한 세상'만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즉 노동자 계급이 차별받고 착취당하고 억압받는데 장애인의 노동권만 온전히 실현되는 세계는 불가능하며, 노인과 청소년과 홈리스와 이주노동자들이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데 장애인만 시설에서 해방되는 세계는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해방되지 않으면, 아무도 해방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장애인의 노동권이 보장되는 세계를 만드는 일은 만인의 노동권이 보장되는 세계를 건설하는 일이며, 장애인이 시설에서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세계를 만드는 일은 그 누구도 시설에 갇힐 필요가 없는 세계에 다가서는 일이다.
우리 사회의 화두 중 하나인 능력주의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비장애중심주의 내지 장애차별주의를 뜻하는 '에이블리즘(ableism)'은 철자에서 드러나듯 그 자체로 '능력주의'를 함축한다. 따라서 능력주의를 철폐하지 않는 한 장애차별주의는 사라지지 않으며, 역으로 장애차별주의를 철폐하지 않는 한 능력주의 사회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다른 세상은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서
우리에게 필요하고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세상은 장애인을 위한 세상이라기보다는 '누구도 뒤에 남겨지지 않는 해방의 공동체'다. 그런 세계가 과연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할까? 우리는 이에 대해 정답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계속해서 움직이고 질문하며, 이 세계를 변혁하려는 지향을 포기하지 않을 때에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변혁'이라는 말이 다소 무겁고 비장하게 느껴지지만, 좀 더 쉽게 풀어보자면 '지금과 다른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이와 관련해 다음 두 가지는 꼭 언급하고 싶다.
첫째, 지금과 다른 세상을 만드는 일은 지금과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장애학에서 쓰이는 조어 중 '싯포인트(sitpoint)'라는 것이 있다. '서 있는' 지점을 뜻하는 '스탠드포인트(standpoint)'와의 대비 속에서, 휠체어에 '앉아 있는' 존재의 상이한 관점을 드러내는 용어다.
이 용어는 높은 곳에 서서 군림하는 위로부터의 정치가 아닌,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의 눈높이에서 출발하는 아래로부터의 정치를 함축한다. 장애학과 장애인운동이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을 위한 일정한 비전과 윤리를 담지하고 있다면, 그건 이 같은 맥락에서일 것이다.
둘째, 지금과 다른 세상은 기존 질서와 토대가 한 방에 무너지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저항 속에 '차별의 재생산이 조금씩 실패하면서' 온다. 장애인들이 갖은 탄압과 욕설에도 굴하지 않고 오늘 또다시 출근길 지하철로 향하는 이유다. 차별금지법의 제정이 차별 없는 세계를 보장해주지는 않지만 이 세계를 변혁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기도 하다.
▲김도현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본인 제공
필자 소개 : 김도현은 2000년부터 노들장애인야학, 장애인이동권연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에서 활동했고, 현재는 2017년 설립한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로 일하며 장애학의 시좌(視座)에서 한국 사회의 진보적 변화를 모색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 '장애학의 도전', '장애학의 시선'이 있고, '철학, 장애를 논하다', '장애의 정치학을 위하여' 등을 우리말로 옮겼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