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0.14 14:48최종 업데이트 25.10.14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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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는 '전(前) 정권 청산'이 자주 일어난다. 이승만·장면·전두환·노태우·노무현·박근혜 정권은 바로 다음 정권에 의해 청산 작업 혹은 정치 보복을 당했다. 박정희 정권은 민주화 과정에서 국민들에 의해 자연스레 청산의 대상이 됐다.

그런데 역대 정권의 전 정권 청산에서 여전히 성역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 있다. 대한민국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준 미군정은 마치 금단의 구역인 소도(蘇塗)처럼 지난 80년간 철옹성을 유지해 왔다.

미군정기인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대한민국 정부의 첫 번째 헌법은 "현행 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효력을 가진다"(제100조), "이 헌법 시행시에 재직하고 있는 공무원은 이 헌법에 의하여 선거 또는 임명된 자가 그 직무를 계승할 때까지 계속하여 직무를 행한다"(제103조)라고 규정함으로써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의 연속성을 인정했다. 미군정이 만든 제도적 토대 위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결과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부조리를 청산하자면 미군정의 부조리를 부득이 건드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 시기의 부조리는 오랫동안 성역으로 남아 있다.

이관술 도쿄고등사범학교 졸업앨범위키미디어 공용

이관술 선생의 억울한 죽음, 법원이 재심 개시 결정한 이유

미군정의 부조리는 한둘이 아니지만, 대표적인 것 하나는 인권 탄압이다. 미군정이 미국식 민주주의를 한국에 이식했다고 인식되고 있지만, 외형상의 표방과 달리 미군정의 수준은 조선총독부의수준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지난 13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21부(이현복 부장판사)가 재심개시결정을 내린 이관술 사건이 그 증거 중 하나다. (관련 기사: 넝마주이의 놀라운 정체... 모두 그를 주목했다 https://omn.kr/29exf)

1902년에 지금의 울산에서 태어나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중등) 교사가 된 이관술은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노동운동과 공산주의운동에 참여했다. 1933년과 1941년에 구속된 적이 있지만, 그는 웬만해서는 검거되지 않는 홍길동 같은 인물이었다. 솥땜장이·엿장수·풍각쟁이·거지·넝마주이 등으로 변신해 가며 경찰의 추격을 따돌렸다.

그런 고생을 하다가 해방을 맞은 뒤 박헌영과 함께 좌파 지도자 그룹을 형성한 그는 얼마 안 가 조작 냄새가 물씬한 공안사건에 휘말려 무기징역을 받았다. 그 상태에서 한국전쟁 중에 지금의 대전시 골령골에서 총살을 당했다.

그가 연루된 사건은 조선공산당 간부들이 인쇄소인 조선정판사에서 위조지폐를 찍어냈다고 1946년 5월 19일에 미군정이 발표한 조선정판사 사건이다. 그해 10월 23일 자 <경향신문> 2면 좌중단이 "사실인가? 아닌가? 세론이 분분"하다고 지적한 데서도 나타나듯이 이 사건은 증거가 불충분했다. 통일적인 한국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5월 6일 무기한 휴회에 들어가 남북분단 가능성이 높아졌을 때 발표된 이 사건은 분단반대진영의 발목을 붙드는 효과도 있었다.

그해 9월 7일자 <조선일보> 2면에 따르면, 조선정판사 인쇄주임 신광범은 위폐에 사용된 종이와 정판사에서 압수된 종이의 재질이 다르며, 미군정이 압수한 인쇄조판으로는 미군정이 압수한 위폐를 찍을 수 없다고 항변했지만,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사건은 조작 냄새를 풍겼을 뿐 아니라 절차상의 하자도 빚어냈다. 기본적인 인권보호절차를 무시한 채 진행된 사건이었다. 이번에 서울중앙지법이 재심 개시를 결정한 것도 그 때문이다.

13일자 <법률신문>이 정리한 서울중앙지법의 판단에 따르면, 미군정 경찰은 법정 유치기간인 10일을 초과해 38일간 이관술을 구금했다. 나머지 피고인들은 61일에서 67일간 구속됐다. 서울중앙지법은 이런 장기 구금의 법적 근거가 없었다는 판단을 내렸다.

더글러스 맥아더가 1945년 9월 9일 선포한 미군정 포고령 제1호는 미군이 한국을 점령하는 목적은 한국인들의 권리 보호에 있다고 표방했다. 포고령은 "조선 인민은 점령의 목적이 항복문서를 이행하고 그 인간적·종교적 권리를 확보함에 있다는 것을 새로이 확신하여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그것은 공약(空約)이었다. <사회와 역사> 2019년 제124집에 수록된 이정은 창원대 교수의 논문 '해방 후 인권논의와 인권옹호조직의 출현: 1945~1948'은 이렇게 설명한다.

"1945년 11월 2일, 미군정은 군정법령 제21호로 '특별한 명령으로 폐기하지 않은 식민지기의 일체 법령은 그대로 존속한다'고 선포하였다. 해방을 맞이한 조선인민들은 민주주의와 경제·사회적 발전 등 식민지기와의 차별적인 제도를 요구했지만, 미군정기의 제도는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박정희의 형인 독립운동가 박상희는 미군정의 실정에 맞선 대구 10월항쟁에 참여했다가 살해됐다. 그를 죽인 것은 미군정 경찰이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뒤에도 미국을 까칠하게 대하는 일이 많았던 이유를 추론해 볼 필요가 있다.

10월항쟁 79주기를 앞두고 지난달 27일 유족들과 시민단체는 대구 중구 태평로 대구콘서트하우스 앞에서 대구시의 지원으로 10월항쟁 발상지 표지판을 세웠다.조정훈

미군정기 인권실태 진상조사해야

미군정이 인권을 경시했다는 점은 제주 4·3항쟁 당시의 대규모 학살에서도 확인된다. 이 항쟁은 미군정 기간인 1947년 3월 1일 시작돼 이듬해 4월 3일에 절정을 이뤘다. 학살에 투입된 서북청년단과 경찰은 자신들의 독단적 판단이 아니라 미군정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이북 출신들이라 남한 땅과의 연고가 약했던 서북청년단원들이 객지에서 생계 걱정도 없이 마음대로 폭력을 행사한 것은 미군정이 든든한 뒷배가 되어줬기 때문이다.

미군정을 뒤이은 이승만 정권이 민간인 학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할 수 있었던 배경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독립운동가 출신인 데다가 무력항쟁이 아닌 외교 활동에 익숙했던 이승만이 민간인 학살을 스스럼없이 명령할 수 있었던 것은 인권이 극도로 경시된 미군정 3년간의 경험과도 무관치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제주에서 최대 3만이 학살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미군정기의 인권탄압은 세계사적 수준이었다. 이관술 사건은 그 일례에 불과하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집권기뿐 아니라 미군정기 역시 인권실태 진상조사와 과거청산이 필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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