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0.16 11:43최종 업데이트 25.10.16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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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의 정치 사회 문화적 풍경을 소개하고 그 이면에 숨겨진 역사적 배경을 살피며 다양한 인물과 사건을 통해 독일 수도의 어제와 오늘을 생생하게 전달한다.[편집자말]
8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 포츠담 광장에서 열린 빛 축제로 인해 건물들이 조명을 받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이제 곧 독일의 서머타임이 끝난다. 곧 북유럽의 길고 어두운 겨울이 시작될 것이다. 오후 4시면 컴컴해지고 아침 8시가 되어야 해가 뜨는 겨울. 북유럽 사람들 표정이 괜히 심각한 것이 아니다. 빛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자 한다면 어두운 곳에서 한번 살아 봐야 한다.

겨울이면 낮이 짧아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늘 흐리거나 비가 와서 그 짧은 낮도 어둑어둑할 때가 많다. 어두움을 극복하기 위해 서머타임이 끝나기 무섭게 성탄절 불빛 장식이 거리를 밝힌다. 불빛만으로 다 밝아지지 않는 마음은 혹시 칭찬을 들으면 좀 나아질까?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칭찬. 이따금 자기 칭찬이 필요할 때가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대의 독일인들은 부모 세대가 인류에 가한 극한 범죄 행위에 스스로 놀라 오랫동안 자기비판 속에서 살아왔다. 자기 칭찬? 상상도 못 한다. 이들이 극도로 싫어하는 구호가 "독일의 본질로 세계가 치유되리라"라는 구절이다. 원래 1861년 에마누엘 가이벨이라는 시인이 썼던 긴 정치 시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당시 여러 영주국으로 흩어져 있는 독일이 통합하여 제국을 이룬다면 장차 유럽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에서 쓴 시였다.

프로이센의 황제가 이 한 구절만 따서 인용한 뒤부터 점차 '독일이 세상을 이끌어야 한다' 내지는 '지배해야 한다'는 뜻으로 변질되어 식민주의와 전쟁을 정당화하는 구호로 오용되었다. 1952년 테오도르 호이스 대통령이 차단막을 세울 때까지. 호이스 대통령은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에 건설된 다큐센터의 개관식 연설에서 독일은 이제 이 어처구니없는 구호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호소했다.

베를린의 경우 나치 범죄의 수뇌부가 있던 곳이기에 더욱더 자기비판이 강했고 그것이 번져 급기야는 모든 것을 우선 비판대에 올리고 보는 습관이 들었다. 비판과 불평은 종이 한 장 차이인지 모른다. 결국 베를린은 투덜이들이 모여 사는 불평의 수도가 되었다.

불평의 수도, 세계의 무대

며칠 전 베를린의 한 일간지에 재미난 기사가 실렸다. "불평하지 말자, 베를린도 세계적인 데가 있다"라는 제목이었다. "베를린은 세계급"이라는 말을 쓴 것이 너무 신기했다. 평소에 들을 수 없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한국 유튜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세계가 놀랐다!'라는 표현을 독일에서는 쓸 수 없다. 그런데 내심 쓰고 싶었던 것일까? 이제 스스로 어깨를 두드리며 우리 잘하고 있다고 말할 때가 되었다는 것일까? 반성은 충분히 했다는 말인가? 해당 기사에서는 모두 일곱 가지를 꼽아 이건 세계적이라고 주장했다.

스타트업 : 가난하지만 섹시했던 시절의 후계자들

한때는 "임대료가 커피값보다 싸다"는 도시였지만, 2000년부터 베를린은 독일 스타트업 자본 전체의 3분의 1을 끌어들이는 블랙홀로 변했다. 잘란도 같은 온라인 의류 매장이 초석을 놓았고, 지금은 온라인 은행 N26이나 투자 플랫폼 트레이드 리퍼블릭 같은 기업 가치 10억 달러 이상의 유니콘들이 뒤따른다. 미래의 스타트업 역시 메이드 인 베를린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물론 실패할 수 있다. 그래도 괜찮다. 베를린에선 실패 경력도 이력서의 한 줄로 당당히 적을 수 있으니까.

베를린 필하모니 건물은 공간 구성이 독특해 연주장 설계의 모델이 되었다.고정희

베를린필 : 스타트업보다 오래된 오케스트라

베를린필에는 128명의 음악가들이 모여 하나의 교향악을 연주한다. 각자 솔리스트로도 객석을 채울 수 있는 실력자들이지만, 함께할 때 진짜 힘이 드러난다. 베를린필은 협업의 교과서다. 단원은 물론이고 지휘자도 단원들이 직접 뽑는데 늘 다른 스타일을 찾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베를린필의 음악 해석이 항상 새로울 수 있는 비결이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클라우디오 아바도, 사이먼 레틀 등 전설적인 지휘자의 뒤를 이은 현 수석 지휘자 키릴 페트렌코 역시 전설이 될 조짐이 보인다. 그는 완벽주의자로 악보 한 장 한 장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본다는 소문이다.

베를린 마라톤 : 교통 통제의 반란이 축제로 바뀔 때

매년 9월 열리는 베를린 마라톤에서는 5만 명이 도로를 점령한다. 그날 하루 자동차는 도시에서 사라진다. 보통 도시라면 민원 전화로 마비될 상황인데, 베를린에서는 모두 거리로 나와 맥주잔을 들거나 호루라기를 불며 응원한다. 지하철 안에서 합창이 울려 퍼지고 "마라톤은 베르그하인보다 크다"라고 적힌 포스터가 걸린다. 유명한 클럽인 '베르그하인'은 테크노 음악의 성지이자 입장 거부조차 추억으로 남는 곳이다. 교통이 마비된 거리를 무대로 바뀌는 도시, 그게 베를린이다.

김진옥 성악가가 경영하는 한식당 '나눔'. 올해 미쉐린 추천 레스토랑으로 금딱지를 받았다.고정희

미식 : 소금과 후추 대신 등장한 창의력

처음 베를린에 왔을 때 이 사람들이 너무 측은했다. 세상에, 이런 걸 먹고 살다니. 음식에 대한 상상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 양념은 소금과 후추밖에 모르는 사람들. 채소를 푹푹 삶아 먹는 사람들. 지금은 모두 옛이야기다. 미쉐린 별이 베를린 하늘을 빛내기 시작했다. 그 미쉐린 별을 따는 방법도 남다르다. 예를 들어 베를린 중심가의 유명 식당 '루츠'는 시그니처 메뉴가 없다. 매번 새로운 메뉴를 실험하기 때문이다. 스타트업 창업자처럼 하루가 멀다고 바뀐다. 노이쾰른의 '코다'는 파티시에 기법만으로 풀코스를 만든다. 단것을 워낙 좋아하는 사람들이기에 이것이 통한다. 혈당 걱정은 잠시 미루자.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새로운 조합을 시도하는 것, 이것이 베를린이다.

학문 : 베를린은 똑똑하다

베를린 종합대학 네 곳이 모여 결성한 '베를린 대학 연합'은 도시를 하나의 거대한 실험실로 만들었다. 그러나 대학 행정은 느리디느리고 예산은 자주 깎인다. 그 부족함을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창의력, 그리고 대학 간의 협력으로 채운다. 협력의 성과는 압도적이어서 연구 실적이 날로 상승하고 있다. 혁신의 핫스팟으로 특히 '그린 케미스트리(친환경 화학)' 같은 환경, 지속가능성 연구가 활발하다. 낮에는 연구실에서 실험하고 밤에는 클럽에서 실험하는 도시가 베를린이다.

파티의 수도 : 불멸의 비트

베를린이 '파티의 수도'라 불린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100년 전부터 베를린은 파티 도시였다. <카바레>라는 불멸의 뮤지컬을 기억하시는지. 베를린이 무대였다. 요즘의 베르그하인, 트레조어, 킷캣 같은 이름은 그저 클럽이 아니라 문화가 된 지 오래다. 뮤지컬 <카바레>의 후예로 손색이 없다. 소음 항의나 임대료 폭탄? 괜찮다. 누군가 문을 닫으면, 다른 누군가는 폐업한 맥주 공장을 찾아내 다시 스피커를 켠다. 여기서는 음악이 멈추지 않는다.

베를린의 무지개 도시 세네베르크. 무지개 옷을 입은 곰이 이 거리의 정체성을 상징하고 있다.고정희

무지개 수도 : 축제가 일상인 곳

크리스토퍼 스트리트 데이(성소수자 퍼레이드), 폴섬(가죽·페티시 축제), 드래그 쇼, 퀴어 박물관까지. 무지개 다양성이란 단어가 이 도시에서는 구호가 아니라 기본 세팅이다. 세네베르크의 무지개 거리를 걷다 보면 왜 베를린이 뉴욕·토론토와 함께 '무지개 빅4'로 꼽히는지 자연스레 알게 된다.

역시 불평의 수도

아니나 다를까. 이 기사에 댓글이 폭주했다. 거의 다 비판적이다. '베를린의 미쉐린 식당이 세계급이라고? 프랑크푸르트가 더 낫다, 스타트업은 뮌헨이 더 세고', '마라톤? 평균 수준이다', '무지개 수도? 세네베르크 하나 가지고 어떻게 수도 운운하나?', '괴팅겐이나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베를린 대학보다 훨씬 생동감 있다', '연구 지원 등한시하는 베를린 교육부 덕에 세계급은 요원하다', '세계급인 것이 하나 있기는 하다, 그건 세계급으로 열등한 정치인들이다' 등등.

역시 베를린은 '불평의 수도'가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무슨 특별한 이벤트처럼 칭찬 기사를 쓴 언론인도 혹시 이 점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보니 베를린 필하모닉이 세계급이란 것에는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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