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브레슬라우어 플라츠에 위치한 한국 식당. 음식이 너무 맛있을 뿐 아니라 많은 정성이 깃들어 자주 찾는 곳이다.
고정희
한국 음식이 베를린을 정복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현재 베를린에서만 100여 곳의 한국 음식점이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가는 데 마다 한국 식당 간판을 보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인기가 높다. 주변에서 김치를 직접 만들어 먹는 친구들도 여럿이어서 고춧가루를 늘 나눠준다. 김치는 한국 고춧가루로 만들어야 제맛이 난다는 사실까지도 그들이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 아시아 문화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보수적인 동료가, 동네 한국 음식점에 자주 간다고 실토했을 때 속으로 쾌재를 부른 적도 있다.
유학 시절, 기숙사에서 살 때 공동 주방에서 김치를 만들어 식탁에 놓으면 다른 학생들이 오가며 손으로 집어 먹기도 하고 기름진 음식을 먹고 난 뒤엔 김치 좀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최근 10년 사이에 한국 문화와 한식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음식점 수가 크게 늘었고, 다양한 스타일의 한국 음식점이 나타났다.
심지어는 외국인 사업자가 운영하면서 버젓이 한국 음식, 만두, 불고기라고 써서 광고하는 곳도 많아졌다. 전통 한식부터 현대식 퓨전까지 다양한 메뉴가 제공된다. 현지인들과 관광객 모두에게 인기가 많아 베를린의 한식 시장은 꾸준히 성장하는 추세다.
"한국 사람들 잘 하는 거야 뭐..." 케이무비와 케이클래식
그러나 베를린에서의 '케이문화'를 꼽으라면 단연 '케이무비'와 '케이클래식'이다. 문화영화(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오랜 지기가 있는데 이미 수년 전에 "영화의 나라 한국"이라는 말을 해서 오히려 내가 놀란 적이 있다. 알고 보니 한국 영화를 해외에 가장 먼저 출품한 곳이 베를린영화제였다고 한다. 1956년의 일이었다. 1961년에 강대진 감독의 <마부>가 특별 은곰상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시작된 베를린영화제와의 인연은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지는 중이다. 팬층도 두터운 편이다.
1990년대 말에는 김기덕 감독의 인기가 정말 하늘을 찔렀다. 이후 박찬욱 감독이 이름을 날리다가 이제는 완전 홍상수 감독의 시대다. 여러 차례 베를린 영화제에서 수상해 '베를린의 남자'로 불릴 만큼 강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지난 2024년 홍상수 감독의 <여행자의 필요>가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1990년대 말에 친구들과 베를린영화제에 가서 한국 영화를 함께 보는 전통이 있었는데 그새 다소 시들해졌다. 아마도 넷플릭스 때문인 것 같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나왔을 때는 독일 최고의 신문 문화면에서 전면 기사로 다루며 "영화 역사상 최고의 영화"라 극찬하여 그때도 내가 오히려 놀라고 말았다.

▲재독 작곡가 박영희씨
문화체육관광부
그리고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 독일에서 한국 클래식 음악인들의 활약은 정말 눈부시다. 사실 케이클래식에 관한 얘기만으로 이 글을 다 채울 수 있을 듯하다. "한국 사람들 음악 잘하는 거야 뭐"라는 말을 적지 않게 듣는다.
지난 10월 10일 작곡가 박영희 교수가 독일연방 대통령으로부터 1급 공로 훈장을 받았다. 올해 80세 생일을 맞아 특별 공연을 하는 등 경사가 겹쳤다. 박영희 교수는 유럽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인이다. 이미 2006년 한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석류장을, 2011년 브레멘 시로부터 예술 및 학술 공로 메달을, 2020년 베를린 대예술상을 받았다. 이어 이번엔 1급 공로 훈장을 받음으로써 최고의 영예를 안게 된 것이다. 그녀의 작품 <소리>, <여인아 왜 우느냐> 등은 베를린에서 정기적으로 공연된다.
진중권 교수의 누나 진은숙의 명성은 더욱 높다. 현대 음악계에서 가장 중요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녀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감명 깊게 본 것이 10년은 되었을 것 같다. 와아, 천재란 저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현재 베를린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는 진은숙 작곡가는 지난해 2024년 '클래식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을 수상했다.
이 상은 25만 유로의 상금과 함께 수여되는 국제적 권위의 음악상이다. 2004년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그로마이어상을 받았고, 2005년 쇤베르크상, 2010년 피에르공 작곡상, 2012년 호암상, 2017년 비후리 시벨리우스상, 2018년 뉴욕필 크라비스 음악상, 2019년 바흐 음악상 등 십여 종에 달하는 국제적인 작곡상을 받았다. 아무것도 보태준 것 없으면서도 같은 한국 여성이라는 점 하나만으로 그저 자랑스럽다.
지휘자와 독주자들의 활약도 눈부시다. 지휘자 홍석원과 금노상은 베를린에서 한국 클래식 음악의 레퍼토리를 가꾸어가고 있다는 소식이다. 제2, 제3의 정명훈을 기대할 만하다.

▲서울 서대문구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열린 '2020 금호아트홀 상주음악가 바이올리니스트 이지윤 기자회견'에서 이지윤이 연주를 하고 있다. 2020.1.14
연합뉴스
바이올리니스트 이지윤은 2017년부터 베를린 슈타츠카펠레(국립 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에서 첫 여성 악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단한 일이다. 그녀는 현재 영향력 있는 젊은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성악가들은 또 어떠한가. 베를린뿐 아니라 독일 전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 성악가들이 적지 않다. 오페라를 좋아해서 자주 가는 편인데 요즘은 프로그램을 보면 출연진에 한국 성악가의 이름이 거의 매번 들어있다.
베를린 도이체오퍼(독일 오페라)에서는 테너 강요셉이 한국인 최초로 전속 주역 가수로 활동하면서 <세빌리아의 이발사> <마술피리>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돈 조반니> 등 다양한 작품에 고정 출연했다. 지난해에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보러 가서 오페라글라스를 코에 걸고 강요셉을 열심히 찾던 기억이 난다. 바리톤 이동환 역시 베를린 도이체오퍼 전속 주역 가수로 활동함과 동시에 유럽 여러 오페라극장 무대에 오르고 있다. 베이스 연광철은 베를린 슈타츠오퍼(국립 오페라극장) 등에서 활약하면서 '궁정 가수' 칭호를 받았다.
파독 광부·간호사들의 위대함, 한국인들의 유일한 약점
독일의 케이문화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분들이 있다. 1966년부터 1976년 사이에 간호사로 독일에 와서 처음으로 한국의 위상을 높인 공로자들이다. 그들의 성실함, 근면함, 똑똑함으로 당시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는 것도 몰랐던 독일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확실히 새겼다. 그들 덕분에 유학 생활이 수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처음으로 한국 음식과 문화를 독일에 소개하면서 케이문화의 서곡이 시작된 것은 아닐까?
물론 모든 것을 다 잘하라는 법은 없다. 재능이 뛰어난 한국인들이 성실하게 노력하여 이제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만, 독일이나 영국을 따라가지 못하는 분야가 하나 있다. '정원문화'다. 정원은 그 속성이 매우 느리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리 재주가 출중해도 정원을 하루아침에 뚝딱 완성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 결과가 나오기까지 적어도 3년은 기다려야 하는데 그렇게 말하면 한국 사람들은 모두 도리질을 한다. "3년이요? 아 우리 그럴 시간 없어요." 그래도 상관없다. 정원문화는 느린 독일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다른 곳에서 부지런히 앞서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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