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KBS <9시 뉴스>는 혐한 시위가 기승을 부리던 도쿄 신오쿠보에서 한국식 김치 담그기 행사가 열렸다면서 "혐한 시위 사라진 '한류 1번지'"를 조명했다.
KBS
요즘 일본 극우세력은 국익을 위해 혐한 시위를 자제하고 있다. 12일 KBS <9시 뉴스>는 도쿄 특파원발로 혐한 시위가 기승을 부리던 도쿄 신오쿠보에서 한국식 김치 담그기 행사가 진행되는 모습을 보여줬다. 혐한 시위가 심각했던 장소에서 그런 풍경이 벌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극우세력은 경제·안보상의 국익을 무시한 채 혐중·반중시위에 여념이 없다. 한국 극우는 일본 극우와 연대하면서도 이런 점은 닮으려 하지 않는다.
혐중 혹은 반중 정서가 지금 처음 나타난 것은 물론 아니다. 병자호란을 겪은 17세기 초중반 이래로 만주족(여진족)이 지배하는 중국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고려와 조선에 사대했던 만주족을 상국으로 받들어야 하는 현실을 치욕스러워하는 정서였다. 갑신정변(1884) 때 김옥균이 청나라에 대한 사대의 폐지를 공약한 데는 그런 정서도 반영됐다.
갑신정변에는 그것에 더해 새로운 반중 감정도 투영됐다. 2년 전에 청나라 군대가 임오군란을 진압하면서 내정간섭이 심해지고, 불평등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1882)을 계기로 청나라인들의 한국시장 지배력이 일본 상인들에 이어 2위가 됐다. 청상(淸商)이나 화상(華商) 또는 화교로도 불리는 청나라인들은 자국의 내정간섭에 힘입어 한국인들의 재산을 강탈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반감도 갑신정변에 영향을 끼쳤다.
중국인 사장을 뜻하는 장궤(掌櫃)라는 말이 근대 한국에서 짱깨로 변했다는 견해도 있다. 금고 관리인인 장궤는 말 그대로 하면 최고재무책임자(CFO)에 가깝다. 그런 단어가 중국인을 폄하하는 의미를 띠게 된 것은 중국인들이 혐오를 일으키는 방법으로 돈을 벌어들인 것과 무관치 않다. 이로 인해 축적된 분노가 폭발한 것이 1901년의 '한성 청상 사건'이다. 대한제국 대중과 군인들이 수도 한성에서 중국인들을 공격하고 약탈한 사건이다.
일제의 한국 강점 이후 한중 간에 동지적 감정이 생겼다. 그렇지만 한국 내의 중국 상인들에 대한 반감은 계속 존재했다. 이런 혐중 감정을 한 차원 높게 끌어올린 것이 이승만 정권이다. 이 정권은 미국의 냉전정책에 편승해 한국인들의 반중 감정에 반공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혼합시켰다.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될 반중 감정의 원형은 이때 형성됐다.
이승만 주도하에 혐중 감정 크게 확산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혐중론을 이끈 이승만은 젊어서부터 중국을 멸시했다. 그의 머릿속에 든 중국관은 서양제국주의가 중국 침략을 정당화할 목적으로 퍼트린 엉터리 이미지와 별 차이가 없었다. 그가 29세 때인 1904년에 집필한 <독립정신>에 이런 대목이 있다.
"청나라는 서양 각국이 강력한 힘을 가졌다는 것은 알았으나, 그 나라들이 어디에 있으며 얼마나 큰 나라이고 어떤 정부와 법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고 어떤 풍습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지배층이나 백성이나 세계정세에 깜깜하여 지도상에 중국 영토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 국경이 있는지 아는 사람도 없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세계 경제사를 정리한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에 따르면, 1545년부터 1800년까지 국제결제화폐인 전 세계 은의 45%가량이 중국(명나라·청나라)에 유입됐다. 세계를 상대로 이처럼 큰돈을 벌어들인 나라를 이승만은 세계정세에 둔감한 3류 국가로 폄하했다.
그런 인식을 가진 이승만의 주도하에 1948년 정부수립 이후로 혐중감정이 크게 확산됐다. 이를 분석한 논문 중 하나가 <역사교육연구> 2024년 제50호에 실린 김태웅 서울대 교수의 '이승만정부 시기 중공 오랑캐 서사와 국민역사교육'이다.
이 논문은 "그의 사유 밑바닥에는 근대의 중국이 문명화에 들어가지 못했으며 1884년 갑신정변을 진압한 야만국이라는 이미지가 도사리고 있다"라며 "여론 주도층(의 인식)도 이승만의 이러한 중국인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그런 뒤 친일·반공 색깔을 띠는 당시의 오피니언 그룹이 갖고 있었던 중국인에 대한 경계심을 이렇게 설명한다.
"밀수업자, 아편쟁이, 되놈들, 똥덩어리, '아시아의 유태인'이라는 호명은 이러한 경계와 우려의 산물이었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반공주의적 시각에서 화상 가운데 일부가 중국공산당과 연계되어 있지 않나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도 하였다."
실학자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되놈의 '되'는 섬나라 오랑캐를 뜻하는 도이(島夷)에서 나왔다고 설명했다. 중국은 섬나라는 아니지만, 멸시의 대상을 도이·되놈으로 부르는 습관이 중국인을 상대로도 발현됐다. 중국인들을 그런 식으로 폄하하던 시각이 이승만 시기에는 그들을 공산당과 연계시키는 수준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그 같은 혐오 감정이 영향을 끼친 것이 1950년 4월 10일의 외국환관리규정(대통령령) 공포다. 이 규정의 취지는 외국환 거래를 정부 통제하에 두는 것이었다. 그달 25일 자 <조선일보>는 "시중의 불법거래에 의하여 입수한 외국환을 은행에 예입"시키는 등의 목적을 띤 조치라고 해설했다. 일본인들이 쫓겨난 뒤인 이 시기에 한국에서 외국 돈을 가장 많이 만진 외국인은 중국인들이었다. 이 규정은 그들을 견제하는 조치였다.
유령처럼 되살아난 혐중론

▲1950년 8월 15일 경북 대구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마치고 임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던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NARA
이승만의 혐중 프로젝트는 중국인들의 돈줄을 죄는 것뿐 아니라 한국 대중의 의식을 세뇌시키는 방식으로도 전개됐다. 위 논문은 이승만이 벌인 일들을 이렇게 설명한다.
"중국에 대한 이미지를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나아가기 위해 수나라 대군을 수몰시킨 을지문덕을 소환하였고, 일반 지명인 화천호를 파로호(破虜湖)로 개명하였으며, 병자호란의 치욕을 담고 있는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자신을 위한 송수탑을 건립했다."
역사학자 신채호(1880~1936)는 항일 열기를 북돋울 목적으로 <을지문덕전>을 썼지만, 이승만은 반중국 열기를 고조시킬 의도로 을지문덕을 띄웠다. 또 한국전쟁 당시 국군이 중국군을 대파한 호수인 화천호도 호로(胡虜) 같은 중국군을 격파한 곳이라는 의미에서 파로호로 개칭했다.
이승만 정권은 혐중 가요도 유포시켰다. 정부가 제정한 군가 중에는 '무찌르자 오랑캐 중공 오랑캐' 같은 것도 있었다. 또 국민학생(초등학생)들을 위한 혐중 노래도 있었다. 위 논문에 따르면, 이런 노래들이 초등학교에서 불려졌다.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대한남아 가는데 초개로구나/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 이선근 작사, 권태호 작곡 '무찌르자 오랑캐'
"나가자 씩씩하게 대한 소년아/ 태극기 높이 들고 앞장을 서서/ 우리는 싸우는 대한의 아들딸/ 무찌르고 말테야 중공 오랑캐" - 김영일 작사, 권길상 작곡, '대한의 아들'
이승만 정권이 만들어낸 반중 감정은 다소 약화된 형태로 박정희·전두환 집권기에도 유지됐다. 이것은 1992년 한중 수교를 계기로 크게 약해졌다. 그러다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집권을 계기로 미국의 반중 적대 정책이 다시 강화되면서 과거의 혐중론이 한국에서 유령처럼 되살아나고 있다.
중국의 패권 추구적 행태나 역사왜곡·문화공정에 대해서는 강력한 대응이 필요하지만, 지금의 혐중 시위는 국익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국민의힘 정치인들이 거드는 지금의 백해무익한 혐중론에는 이승만의 체취가 강하게 배어 있다. 중국의 현실적 역량을 무시한 채 앞뒤 가리지 않고 중국을 폄하하고 조롱하고 압박하는 것은 이승만식 혐중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