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0.16 12:10최종 업데이트 25.10.16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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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에티오피아 오로미아주 짐마 지역으로 출장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한국 정부가 국제개발원조사업으로 오로미아주 보건국과 함께 이 지역의 일차보건의료체계 강화 사업을 기획하는 단계인데, 사업 계획이 타당한지 해당 지역 보건 기관과 지방 보건국을 방문하고 의료제공자와 주민, 지역 공무원 등 주요 이해관계자를 만나 의견을 듣는 일정이었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대륙 중부에 위치한 지역 강국이다. 지난 10년 동안 연 6~8%대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해 주목받았다. 하지만 하루에 3달러 미만의 소비를 하는 빈곤층이 전체 인구의 38.6%인 4719만 명에 이르고 정치적 불안정, 인플레이션, 민족 분쟁 등이 지속되면서 주민들의 삶 역시 거친 요동 속에 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110달러(2023년)인 이 나라에서 아이를 낳는 여성들은 누구의 도움을 받을까? 한국처럼 병의원이 흔하지도, 전국민건강보험이 있는 것도 아닌 이 나라에서 여성 대부분은 정부가 운영하는 보건소와 보건지소를 찾는다. 보건소에는 간호사와 조산원 등 10여 명의 의료 인력과 10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일을 한다. 우리가 방문했던 보건소의 모성 건강 담당자 두 사람은 수도도 전기도 갖춰지지 않은 보건소에서 하루 70여 건의 외래 진찰과 월 50~60건의 분만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에티오피아 보건소에서 만난 미프진김새롬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밤에는 횃불로 불을 밝혀야 한다는 분만실의 약장을 들여다보던 중 한국에서 화제인 약 하나를 발견했다. 바로 먹는 임신중지약 '미프진'이다.

이 약은 수급이 잘 되는지, 언제부터 쓰고 있는지 물었다. 여기가 두 번째 근무지라던 젊은 직원은 "원래 쓰던 약인데"라면서 산모들이 아이 낳는 터울을 조정하기 위해 쓰는 약이라고 말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에티오피아에서는 2005년 임신중지를 매우 제한적으로 허용하던 법을 개정하고 2006년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여기서 미소프로스톨 단독 요법과 미소프로스톨과 미프진 병용 요법을 모두 안전한 임신중지의 방법으로 허용했다.

세계보건기구가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한 미프진은 현재 전 세계 90여 개 국가에서 사용되는 가장 흔한 임신중지의 방법이다. 에티오피아 보건소에서 만난 '에이스 키트'(상품명) 박스에 적혀있는 것처럼 미페프리스톤을 미소프로스톨과 함께 복용하면 임신 9주까지 95% 이상의 효과를 보인다. 수술에 비해 자원이 덜 필요하고 침습적이지 않다는 게 장점이다. 에티오피아처럼 숙련된 의료진을 만나기 어렵고, 깨끗한 수술방과 입원실을 운영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약물 임신중지의 이점은 더욱 크다.

재생산과 몸의 정치

여성이 각자 처한 상황에서 아이를 낳거나 낳지 않는 결정을 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조건은 지극히 정치적으로 결정된다. 아이를 덜 낳도록 불임 시술받은 사람에게 아파트 분양 우선권을 제공하는 청약제도까지 운영했던 1970년대에서 5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의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다자녀 우대 혜택과 출산에 대한 각종 지원은 물론, 의료에서도 상황은 노골적이다. 임신을 시도하기 위해 난관이나 정관을 '푸는' 데에는 건강보험 급여를 제공하고, 피임을 위한 모든 의료에는 건강보험 급여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런 뚜렷한 대조는 당신들의 재생산권은 국가가 인정하는 건강의 사안으로 보지 않겠다는 제도적 선언이나 다름없다. 그로 인한 결과는 임신할 수 있는 몸을 가진 여성들에게 더욱 치명적이다.

에티오피아 오로미아 지역에서 인류학 연구를 진행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박영수 교수에 따르면, 에티오피아의 오래된 민족 분쟁에서 오로모 사람들은 정치적 경제적 차별을 받았다. 그가 현장 연구를 하며 만났던 많은 오로모 사람들은 정부와 해외원조기구가 수행하는 가족계획 사업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고 했다. 아이를 덜 낳는 게 산모의 건강과 아이들의 복리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국제개발의 메시지가, 사실은 핍박받는 민족에 대한 제노사이드-인종말살 정책이 아닌지 의심할 만한 맥락이 있다고 했다.

특정 지역을 대상으로 유독 적극적으로 행해지는 가족계획 사업에 정치적 이유가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사실은, 보건소에서 만난 미프진을 단순히 반가운 마음으로만 바라볼 수 없게 했다. 내전으로 인한 파괴, 학살, 집단성폭행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오로모 사람들에게 한국 정부의 '가족계획 원조사업'이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이제라도 차근차근 되짚어 파악하고 검토해야 하지 않을지 떨리는 마음으로 되돌아보게 되었다.

무엇을 위한 금지와 지원일까

2019년 4월 11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가 헌법불합치 판결이 나오자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던 여성단체 회원들이 환호를 하고 있다.이희훈

2025년 한국의 의료기관에서는 미프진을 처방받을 수 없다. 2019년 낙태죄에 대한 헌법재판소 판결로 형법상 낙태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음에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2021년부터 현대약품은 미프진과 미소프로스톨 복합제인 '미프지미소'의 품목 허가를 신청했다. 하지만 아직도 미프진은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심사 절차를 통과하지 못했다.

보건복지부는 원칙적으로 약물의 승인 허가는 민간 제약사가 신청해야 진행될 사안이어서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발을 뺐고,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모자보건법이 공백 상태이니 법 개정이 먼저라는 핑계를 반복하며 지지부진했다. 제약사들이 수익을 생각해 급여 신청을 하지 않고 버티던 입덧약 디클렉틴을 정부가 나서서 재빠르게 건강보험이 되는 급여 약으로 만든 최근의 '성과'와 비교하면 참으로 속 보이는 처사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이 치사한 처사에 한국의 재생산 정치를 비추어 본다. 한국의 출산율이 에티오피아보다 더 높던 시절, 이승만 대통령은 가족계획을 국책사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건의하는 유학파 엘리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인구가 너무 많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므로 가족계획에 개인적으로 "대찬성"이지만 "머지않아 남북이 하나로 되어 총선거를 실시해야" 하기 때문에 그때까지 인구가 줄어서는 안 되니 가족계획은 할 수 없다고 말이다.

임신하고 아이를 낳는 여성의 의료 필요는 중요하고 긴급한 문제로 여기지만, 스스로 재생산 운명을 결정하려는 여성의 선택에 대해서는 백안시하며 외면하는 이율배반적인 것은 정부 말고도 또 있다. 산부인과 의사회를 비롯해 한국의 많은 전문가들은 반복해서 미프진 도입을 반대하고 어쩔 수 없이 도입해야만 한다면 최대한 사용을 제한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국제적으로 미프진과 임신중지에 대해 일궈놓은 의학적, 공중보건학적 근거를 참조하지 않은 게으른 말들이 널리 회자되며 두려움을 키운다. 여성의 재생산권 보장을 위해 범법자로 잡혀갈 위험을 무릅쓰고 임신중지를 제공하고 약물을 이용해 여성이 스스로 더 주체적으로 임신중지할 수 있는 방법(Self-Managed Abortion, SMA라고 한다)을 연구하며 지지를 얻은 전문가들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미 수십 년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용되어 온 이 약에 대해 계속해서 '위험'하고 '부적절'하다며 반대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신념과 이해에서 오는 걸까 의문을 품다 보면, 여성 몸을 둘러싼 정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에티오피아에서도, 한국에서도 여성의 몸은 권력과 억압의 구조 속, 가장 첨예한 현장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미프진을 허하라'는 말에 담긴 의미

영국에서 임신중지 접근성 보장을 위해 활동하는 의사 단체인 Doctors for Choice UK가 퀸의 노래를 개사해 만든 캠페인 동영상의 한 장면. 개사한 가사로 "임신중지는 누구에게나 합법이어야 한다"는 자막이 달려 있다. 전체 동영상이 궁금하시다면 다음 링크를 확인하면 된다 https://youtu.be/LdWG6o3i7I4?si=dFAHTSse7Wt7aDtgDoctors for Choice UK

다행스럽게도 머지않아 한국에서 미프진을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재명 정부의 123대 국정과제 중 하나로 임신중지 약물 도입이 포함됐고,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 역시 국제적 근거에 따른 의약품 접근성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헌법재판소 판결이 있었던 2019년으로부터 햇수로 6년 반을 채우게 된 지금까지의 진척이 겨우 요만큼이라고 생각하면 기가 막히지만, 그나마 정권 교체 이후의 대응이 반가운 것도 사실이다.

물론 낙관은 이르다. 모자보건법 개정 전에도 미프진에 대한 품목 허가를 진행하는 편이 법적으로 타당하다는 자문을 받고서도 일을 미루고 정상적 약물 허가 절차를 진행하지 않았던 식약처의 오유경 처장이 유임되었고, 한국의 산부인과 의사들은 2025년 지금도 공개적으로 "임신중절을 하는 여성들에게 급여 혜택을 줄 재정이 있다면, 이는 출산을 하는 사람들에게 활용되는 것이 맞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미프진을 허하라는 말에 담긴 의미는 간단치 않다. 많은 여성이 임신중지할 권리와 미프진을 옹호하는 데에는 국가의 인구정책이 끝끝내 외면하려는 성과 재생산권(Sexual and Reproductive Rights)에 대한 요구가 놓여 있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삶을 살기 위해 임신과 출산의 여부와 시기를 결정할 정보를 얻고 의료와 복지 등 제도적 자원을 활용할 권리, 더 나아가 자신의 성적 특성으로 인해 차별받거나 배제당하지 않을 권리에 대한 희망이 담긴 정치적 요구다.

이 '정치적 요구'가 한국 여성들 사이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일은 아니다. 에티오피아 여성들도 오랜 기간 친밀한 관계에서 안전할 권리, 자유로운 피임과 성에 관련한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를 외쳐왔고, 이 역시 한국의 '미프진'을 향한 투쟁과 같은 선상 위에 놓여 있다.

이 글의 독자들께 묻고 싶다. 비혼 커플의 출산, 일하는 이들의 오줌권, 완경기 노동자의 온도 적응과 쉴 권리, 사산을 겪은 커플의 애도와 회복, 청소년 성소수자를 위한 정확하고 실용적인 성교육에 대해 얼마나 생각해 보셨는지? 가톨릭 국가로 임신중지가 불법인 필리핀의 코피노와 베트남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 라이따이한의 삶, 그리고 이에 대한 한국 사회의 책임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런 문제들을 더 많이 말하고 문제 삼는 과정에서 재생산을 둘러싼 새로운 정치가 진전된다면, 그래서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었던 숱한 인간적 요구를 사회적 권리로 세상에 내어놓게 된다면, 이후의 정치 특히 인구와 여성의 몸을 둘러싼 정치는 어떻게 달라지게 될까? 비록 미래는 우리의 것이 아니더라도 미래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Health Socialist Club 팀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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