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0.11 18:14최종 업데이트 25.10.1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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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었던 조봉암위키미디어 공용

이승만에게는 김일성보다는 진보당 조봉암이 더 큰 위협이었다. 한국전쟁에서 나타났듯이 김일성과의 대결은 그의 권력을 위협하는 한편 크게 강화시켰다. 반면, 1952년 및 1956년 대선에서 나타난 것처럼 조봉암과의 대결은 그의 권력을 크게 위협했다. 1956년 대선에서 조봉암은 극렬한 부정선거 속에서도 30.01%나 득표했다.

조봉암은 이승만의 스트레스 지수도 높여 놓았다. 그는 1956년 대선에서 자기 당 부통령 후보인 박기출을 선거 엿새 전에 사퇴시킴으로써 자유당 이기붕(44.0%)이 민주당 장면(46.4%)에게 부통령 자리를 내주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민주당 부통령과 불편한 동거를 해야 했다.

그런 조봉암을 이승만은 그냥 두지 않았다. 조봉암을 김일성과 연결시키고 간첩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뒤집어씌웠다. 정상적인 정치적 대결로는 이길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조봉암은 '자체 발광'으로는 빨갱이가 될 수 없었다. 그런 사상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을 빨갱이와 엮는 방법을 구사했다. 이를 위해 활용한 것이 제4대 총선(1958.5.2.)을 앞둔 1957년 하반기에 불거진 '박정호 간첩사건'이다.

그해 11월 7일 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57세인 박정호는 만주에서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항일단체 지하요원으로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됐던 항일투사다. 그는 해방 뒤에는 북조선노동당 경리부장 등을 지내다가 한국전쟁 직전에 남하해 무역업을 했다. 진보당을 포함한 혁신세력을 포섭해 평화통일운동을 촉진시키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고 이승만 정권은 발표했다. 평화통일운동이 역모죄로 간주되던 이승만 집권기의 해괴한 분위기를 반영하는 장면이다.

이승만 정권은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박정호 사건을 조봉암과 엮을 타이밍을 모색했다. 이 점은 그해 11월 14일의 서울시경-서울지검 합동 긴급회의에서도 나타났다.

박정호를 비롯한 7명이 재판에 넘겨지고 장건상 등 6명이 검찰로 송치된 이날, 긴급회의 참가자들은 또 다른 11명을 구속하는 문제를 논의한 뒤 진보당 지도부인 조봉암과 서상일에 관한 이야기를 언론에 흘렸다. 다음날 <조선일보>는 "이날 회의에서는 조봉암·서상일 양씨에 관한 문제는 일단 제외한 것이라 한다"라며 회의장 분위기를 전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조봉암과 박정호를 엮을 단서는 없었다. 그런데도 이런 식으로 조봉암 연루설을 흘렸다. 그러다가 1958년 1월 12일 진보당 간부 6명이 체포되고, 13일 조봉암이 체포됐다.

서울지검 정보부의 지휘하에 체포작전이 개시되기 전날인 11일이었다. 이틀 뒤 <조선일보>에 따르면, 정보부의 조인구 검사는 '박정호의 평화통일공작은 진보당의 당세 확대로 귀결되는 것'이라며 진보당에 대한 수사 필요성을 기자단 앞에서 역설했다. 이런 공언까지 해놓고 조봉암을 구속했지만, 박정호와의 공범 관계를 끝내 입증하지 못했던 것이다.

정권의 협박 받은 양이섭의 허위 진술

박정호의 붉은빛을 조봉암에게 묻히려 했던 시도는 실패했다. 그래서 이승만 정권은 새로운 카드를 집어 들었다. 그것이 양이섭(양명산) 간첩 사건이다.

양이섭은 일제강점기 때 신의주에서 우체국 집배원으로 일했다. 우편물 속에 든 거금을 훔친 그는 상하이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벌였다. 해방 뒤에는 육군첩보부대(HID) 공작요원이 되어 남북교역에 종사했다.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과 친분이 있었던 양이섭을 윽박질러, 조봉암은 물론이고 남한 첩보요원인 양이섭마저 북한 간첩으로 만들고자 했다. 빨갛지도 않은 양이섭을 붉게 물들인 뒤 조봉암도 한데 엮고자 했던 것이다.

진실화해위원회의 <2007년 하반기 조사보고서>는 "육군 특무부대는 그해 2.8. HID 공작요원으로 남북교역을 하던 양이섭(51)을 연행하여 여관 등에 불법감금한 상태에서 북한의 지령 및 자금을 조봉암에게 전달하였다는 혐의에 대해 조사를 벌였다"고 기술한다. 조봉암 체포 5일 전에 양이섭에 대한 협박이 있었던 것이다.

양이섭은 1956년 대선을 전후에 조봉암에게 정치자금과 생활자금을 제공했다. 정권의 협박을 받은 양이섭은 그 돈이 김일성 주머니에서 나왔다고 허위 진술을 했다.

1982년 9월 7일 자 <중앙일보> '중앙청 <53> 진보당 8'에 따르면, 법정에 선 양이섭은 자신이 조봉암에게 5백만 환을 전달하자 조봉암이 북에 보낼 감사 편지를 자신에게 준 일이 있다고 진술했다. "돈을 보내주어 감사한데 5백만 환만 더 보내달라는 편지"였다는 게 그의 진술이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그동안 열두 차례 남북을 내왕하면서 미화 2만 3천 달러, 한화 2천만 환 그리고 인삼·녹용 등 북한에서 가져온 물품을 북괴의 지령에 의해 전달했다. 이 돈은 조봉암으로 하여금 미군철수운동 및 평화통일운동을 전개하는 신문사를 경영케 하기 위한 것이다."

조봉암 재판이 진행될 때인 1958년 11월에 서울 시내에서 쌀 1가마니는 1만 2500환 미만이었다(11월 7일 자 <동아일보>). 양이섭이 말한 금액은 상당한 거액이었다. 그런 돈이 북에서 나와 자신을 거쳐 조봉암에게 들어갔다는 것이 양이섭의 주장이었다.

조봉암은 한화 3백만 환과 미화 620달러를 받은 일은 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자신은 양이섭의 돈을 받았을 뿐이지 북한의 돈을 받은 적은 없다고 항변했다.

법적 심판 받은 이승만 정권의 악행

1959년 8월 1일 자 <조선일보> 기사 "조봉암 사형을 집행"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1심 법원은 이승만 정권의 기대와 달리 조봉암과 양이섭에게 징역 5년이라는 예상 이하의 형량을 선고했다. 그런 뒤 양이섭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그는 2심에서 양심선언을 했다. 그해 9월 5일 자 <조선일보>는 전날의 항소심 첫 공판을 이렇게 보도했다.

"진보당 공소심(控訴審) 첫 공판에서 사실심의를 받기 시작한 양명산 피고는 '진보당위원장인 조봉암 피고가 북한괴뢰집단의 정치자금을 얻어 쓰고 그 지령에 움직였다는 범죄사실은 모조리 터무니없는 특무대 조작이었다'고 1심 때의 진술을 완전히 전복시키고 '특무대에서 강압적인 방법으로 조서를 날조한 것'이라고 진술하여 판사·검사는 물론 피고 그 변호인들 방청객들을 놀라게 했다."

양이섭의 진술은 조봉암의 유죄를 입증할 증거였으나 양심선언에 의해 무너졌다. 위 보도에서처럼 판사도 깜짝 놀랐다. 그런데도 재판은 여전히 조봉암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진행됐다. 2심과 3심은 사형을 선고했다. 유력 대권주자 조봉암을 죽이기 위한 희대의 판결들이었다. 1959년 2월 2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고, 7월 31일 사형이 집행됐다.

이 사건이 조작됐다는 점은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해 빨갱이 소리를 듣고 법복을 벗은 유병진 판사의 발언에서도 드러난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죽산 조봉암 평전>에 인용된 태윤기의 <권력과 재판>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뒷날 유씨는 이 사건의 변론을 맡았던 태윤기 변호사를 만나서 '나도 조봉암 씨가 당시 이 대통령의 정적이라는 점을 심사숙고 고민한 끝에 5년이라는 형을 언도한 것이며, 실은 집행유예 정도가 알맞은 판결이라고 생각되었다."

비슷한 발언은 조봉암 용공몰이에 가담했던 조인구 검사의 입에서도 나왔다. <죽산 조봉암 평전>에 따르면, 1960년 6월 10일 자 <법정신문> 인터뷰에 유병진의 이런 말이 보도됐다.

"일전에 서울형무소에서 진보당 사건의 담당 검사였던 조인구 씨를 만났을 때 조씨는 나에게 '그때 좋은 판결을 하여 주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조씨 역시 그 기소가 무리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였다."

조인구는 1심에서 사형을 구형했다. 그런 그가 '고작' 징역 5년을 선고한 유병진의 판결을 "좋은 판결"로 칭송했다. 1960년 상반기를 휩쓴 4·19혁명이 이런 양심적 발언들을 가능케 했으리라고 볼 수 있다.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을 빨갱이로 몰기 위해 간첩사건 둘을 그 앞에 대령했다. 이 시도는 성공하는 듯했지만 실상은 실패했다. 사법부를 동원한 조봉암 살해는 민심을 크게 이반시켰고, 이는 조봉암 사망 8개월 뒤인 1960년 3월부터 4·19혁명이 일어나는 데도 영향을 끼쳤다.

이승만 정권의 악행은 결국 법적 심판을 받았다. 조봉암이 한을 품고 죽은 지 52년이 흐른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조봉암 사건 재심에서 간첩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을 무죄로 인정했다. 조봉암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 중에 발견된 총기를 근거로 기소된 불법무기 소지 부분에 대해서는 유죄를 인정하고 선고를 유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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