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전쟁영웅 고 김영옥 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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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은 대한제국 시기에 미국으로 건너가 항일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 김순권의 아들이다. 김영옥이 LA에서 태어난 날은 고종황제의 사망(1919.1.21.)으로 3·1운동 분위기가 고조되던 1919년 1월 29일이다. LA시립대학을 중퇴한 그는 제2차 대전 중인 1941년에 육군 사병으로 징집됐다. 그랬다가 1942년에 장교후보생이 되고 1943년에 소위가 되어 대전에 투입됐다.
제2차 대전은 '반제국주의 대 제국주의'의 측면도 띠고, '제국주의 대 제국주의'의 측면도 띤다. '제국주의 대 제국주의'의 구도는 '반전체주의 대 전체주의'로 세분됐다. 이 전쟁은 한민족과 중국 같은 반제국주의 진영이 미국·영국 같은 반전체주의적 제국주의와 연대해 일본·독일·이탈리아 같은 전체주의적 제국주의와 투쟁하는 무대였다. 이 전쟁에서 김영옥은 전체주의적 제국주의를 무너뜨리는 데 기여했다.
전쟁이 끝나자 김영옥은 국방부의 만류를 뿌리치고 대위로 전역했다. 그런 뒤, 당시로서는 진귀한 빨래방 사업을 선택했다. 추가요금을 내지 않는 한 고객이 직접 세탁해야 하는 방식이었다. 한우성이 쓴 위의 김영옥 전기에 따르면, "세탁기 약 30대와 대형 건조기 3대"를 구비한 사업장이었다. 군인 봉급을 알뜰히 저축해둔 결과였다.
그러나 세탁기 옆에 오래 있을 수 없었다. 31세 때인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다시 군인이 되어 한반도 최전방에 배치됐다. 휴전선의 중간 부분이 북쪽으로 볼록한 것은 그의 활약과 관련이 있다. 위의 <국방저널>은 "중부전선의 가장 선두에 그의 부대가 있었다"라며 "중부전선이 북으로 치솟아 지금의 휴전선 모양이 만들어진 데는 그의 역할이 컸던 셈"이라고 평한다.
이 전쟁은 동족상잔이었다. 미군인 김영옥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김영옥은 이 전쟁에서도 훌륭한 모습을 남겼다. 미 육군 7사단 31연대 1대대장으로 근무할 때 그는 서울 삼각지의 보육원인 경천애인사를 헌신적으로 지원했다.
김영옥은 부대 내의 캔맥주와 담배 등을 암시장에 내다팔아 약 500명의 경천애인사 아이들을 지원했다. 이 보육원 창설 멤버인 장홍기의 증언을 담은 <주간조선> 2015년 6월 19일자 인터넷판 기사 '전쟁고아 500명의 집, 장시화 목사가 창설, 내가 고아 모집, 전쟁영웅 김영옥이 지원'은 "김영옥이 이끄는 1대대는 1951년 겨울부터 경천애인사를 지정해 재정지원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런 뒤 "대대 장병뿐 아니라 장병의 가족들까지 지원을 해준 덕에 경천애인사 고아들은 다른 고아원에 비해 물자가 풍족했다"라며 "한국전쟁에서 일선 전투부대로서 고아원 한 곳을 지정해 재정 지원했던 유엔군 부대는 김영옥 부대가 유일했다고 한다"라는 설명을 한다.
전쟁이 싫어도 전쟁터에 나가거나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게 인류의 현실이다. 김영옥은 그런 속에서도 전투원 신분으로 전쟁고아들을 챙겼다. 자신의 생존이 가장 큰 급선무인 전쟁터에서 인류애를 실천했던 것이다.

▲'전쟁영웅' 김영옥 예비역 대령이 한국전쟁 참전(1951-1952년) 당시 돌보던 고아원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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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상처를 잘 보듬은 휴머니스트
그는 또 다른 방법으로도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기여했다. 일본계 미국인인 마이크 혼다가 캘리포니아 주의회와 연방 하원을 무대로 위안부 운동을 벌이고 미국 사회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응원하게 되는 과정에도 김영옥이 있었다.
1999년에 혼다는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캘리포니아 주의회에서 통과시키는 운동을 벌였다. 이를 방해한 것은 일본인들이다. 일본인들은 위안부 결의안의 통과를 저지했다.
이 상황에서 혼다가 도움을 요청한 구원투수가 2차 대전 때 일본인 병사들을 지휘했던 김영옥이다. 김영옥 전기에 따르면, 김영옥은 엄호사격을 연상시키는 방법으로 혼다를 지원했다. 김영옥은 혼다에게 총을 쏘는 쪽을 집중 공격했다.
"영옥은 혼다 의원의 설명을 들은 즉시 2차 대전에 참전했던 일본계 미군 장병 지도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무엇 때문에 전쟁터에서 피를 흘렸는지 되새기며 '혼다 결의안' 지지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이들 다수의 지지를 확인한 영옥은 스스로 혼다 결의안 지지서 초안을 작성하고 글솜씨가 뛰어난 변호사에게 의뢰해 초안을 다듬게 한 후, 자신이 먼저 서명하고 2차 대전 참전 일본계 미군 장병 지도자들의 연기명 서명을 받아 혼다 의원에게 보냈다.
혼다 의원은 자기에게 결의안 철회를 종용하기 위해 재미일본인 사회의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 갈 때 이 지지서를 품에 넣고 가서 회의가 시작되자 서한을 꺼냈고, 이를 본 일본계 지도자들은 그 자리에서 반대 의사를 접었다."
오늘날 위안부 운동이 세계적 차원으로 발전한 데는 미국의 지지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미국을 그렇게 만든 데는 마이크 혼다의 공이 컸고. 혼다의 배후에는 김영옥이 있었다.
세상에 대한 김영옥의 애정은 또 다른 방식들로도 표현됐다. 김영옥 전기는 "전쟁 중에도 민간인 여성이나 포로로 잡은 여군 또는 전쟁고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남다른 애착을 보였던 영옥은 여성과 아동을 위해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라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시아·태평양계 가정폭력 피해여성과 그 자녀들을 위해 가정폭력 피해여성보호소를 발전시킨 것"이라고 예시한다. 김영옥은 1980년대 중반을 전후해 약 10년간 LA의 피해여성보호소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김영옥은 전장에서 능력을 발휘한 군인인 동시에 세상의 상처를 잘 보듬은 휴머니스트다. 그가 전시에 한 것과 평시에 한 것은 일견 상충돼 보이지만, 그는 그 둘이 모순되지 않게 성공적으로 역할을 수행했다. 전쟁과 평화 양쪽에 최적화된 특이한 인물이었다. 2005년 12월 29일, LA에서 향년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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