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3월 4일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상하원 합동 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에 반해 미국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 겉으로는 삼권분립의 전형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통령 권력이 의회를 압도하면서 입법부는 민주주의의 중심축으로서 제 기능을 상실했다.
대통령은 거부권과 행정명령을 무기 삼아 의회의 입법 과정을 우회하거나 무력화했고, 의회는 정당 간 갈등에 묶여 이를 제어하지 못한 채 사실상 방관했다. 트럼프 1기 동안만 해도 그는 220건의 행정명령을 발동했는데, 이는 오바마보다 훨씬 많은 수준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2017년 1기 취임 직후 시행된 '무슬림 입국 금지령'이다. 이는 의회 논의 과정 없이 발동되었고, 2019년에는 국경장벽 건설을 위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해 의회가 승인하지 않은 예산을 전용했다.
의회가 속도를 조정하지 못하자, 행정부가 사실상 입법 기능까지 흡수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의회는 민주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심장부라기보다 대통령 권력에 끌려다니는 부속 기관처럼 전락했다.
그 대가는 국가 운영의 반복적 마비였다. 트럼프 집권기에 두 차례 연방정부 셧다운이 발생했는데, 특히 2018년 말부터 2019년 초까지 이어진 35일 셧다운은 미국 역사상 최장이었다.
약 80만 명의 공무원이 무급 휴직에 들어가고, 국립공원과 박물관이 폐쇄되며, 공항 보안 인력마저 줄어드는 등 일상적 공공 서비스가 마비됐다. 의회가 예산 통제권을 정치 공방의 도구로만 사용하면서, 국정 운영을 조정하기는커녕 혼란을 가중시킨 사례였다.
사법부 또한 의회의 무력화 속에서 정치화의 길로 들어섰다. 트럼프는 임기 중 세 명의 대법관을 임명하며 대법원의 구도를 '보수6 대 진보 3'으로 굳혔다. 헌법상 인준은 의회의 권한이지만, 실제로는 제도적 균형을 세우는 이 기능이 사라졌다.
2020년 대선 불복 소송 과정에서 대법원이 트럼프의 요구를 거부했음에도, 그는 판사를 "오바마 판사"라 부르며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그 순간 사법부는 독립적 기관이 아니라 정파적 도구로 보이게 되었고, 시민의 신뢰는 급속히 추락했다.
원래라면 의회가 사법부 인사를 통해 책임성을 보완하고 균형을 유지했어야 했지만, 당파적 이해에 갇힌 의회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 결과 사법부는 독립적 권위라는 허울 속에 정치적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의회의 권위가 무너지게 된 결정적 사건이 2021년 1월 6일의 의사당 습격이었다. 대통령의 선거 불복 주장이 직접적으로 의회를 향한 폭력 사태로 이어졌고, 다섯 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 속에 민주주의의 상징 공간이 무너졌다.
이후 한 여론조사에서 의회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8%에 불과했고, 대법원 신뢰도 역시 25%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시민들은 제도 전체가 무력하다고 느끼게 되었고, 이렇게 민주주의 제도 전반에 대한 불신이 수치로 드러난 것이다.
트럼프의 2기 집권이 시작된 2025년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의회는 무기력 속에 국정을 조정하지 못하고 있고, 대통령은 이를 틈타 행정권을 강화하며 독주를 이어가고 있다.
어느 때보다 정치적으로 변해버린 대법원은 역설적으로 독립적 권위가 약화되었고, 민주주의를 지탱해야 할 최종적 심급이 오히려 행정부의 방패가 되어가고 있다. 사법부가 스스로를 정치적 외압으로부터 지켜내겠다고 주장하면서 정작 정치적 판단의 수렁으로 더 깊이 들어가 버리는 역설이다.
제도의 수호자를 자임하는 기관이 오히려 제도를 흔드는 요인이 되어버린다면, 민주주의는 그만큼 더 깊은 불신의 소용돌이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미국의 사법부가 잘 보여주고 있다.
의회의 역할, '안정'과 '불안정'을 갈랐다
오늘의 미국과 이탈리아를 나란히 놓고 보면, 민주주의가 어디에서 흔들리고 어디에서 지탱되는지가 선명히 드러난다. 같은 급진적 포퓰리즘 우파가 권력을 잡았음에도 두 나라가 보여준 결과는 정반대였다.
안정과 불안정을 가른 것은 이념적 성향이 아니었다. 그것은 의회가 권력의 중심에서 제 역할을 다했는가의 문제였다. 권력이 민의의 전당에서 조율되고 제어될 때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지켜냈지만, 그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순간 민주주의는 급속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결국 시스템에 있다. 제도가 정교하게 설계되지 않으면, 소수에게 집중된 행정부와 사법부 권력은 언제든 자의적 의지에 끌려가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위기 속에 빠뜨리며 민주주의 전체를 흔들게 된다.
이 위험을 막는 마지막 장치는 집단 권력인 의회다. 국민의 대표가 모인 의회가 제도를 제대로 관리하고 권력을 조정할 때만 민주주의는 균형을 유지한다. 의회가 그 책임을 놓치면 불안정이 찾아오고, 제 역할을 다하면 안정이 가능하다. 오늘의 현실은 그 본질을 다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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